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상을 거스리는 삶(1) (롬 12:1-2)

  • 잡초 잡초
  • 328
  • 0

첨부 1


세상을 거스리는 삶(1) (롬 12:1-2)


너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기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7-8월은 한 여름입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말하면 하한기에 속합니다. 즉 영적 취약기입니다. 기도하기에 게을러지고 성경을 안 읽게 되고 휴가철로 모두 마음의 상태가 산란해지는 영적 취약시기입니다. 그래서 7-8월 2달간은 “제자도”에 대해서 집중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즉 진정한 제자의 길과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어 복을 받고 잘 사는 것 그리고 예수 믿어 건강해지는 것입니까. 그것도 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라면 그것은 어린아이 수준의 신앙인입니다.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와 목적은 우리들이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제자는 어떤 것입니까. 매주일 예배참석 하고 봉사하는 것이 제자입니까. 11조 헌금하고 구역예배 잘 드리는 것이 제자입니까. 그것도 제자가 하는 일이기는 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목적이나 목표는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제자도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두 달 동안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여러 가지 제자도의 내용들을 종합해서 10가지 제자도의 덕목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첫 번째 제자도의 덕목은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기를 “너희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라,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는 모두 1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11장까지는 전반부로 주로 신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내용들을 신학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장에서 마지막 장까지는 실제적인 문제들 즉 믿음으로 의로워진 후에는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 라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처음 예수 안에 들어와 입교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때로 장로도 됩니다. 그렇게 직분이 올라갈 때마다 신앙이 덩달아 성숙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성숙을 위해서 노력하고 힘써야 하고 직분에 상응하도록 영적성숙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신앙이 성숙하게 되면 내 안에서 자생력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이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게 하는 힘이고 능력이고 중심입니다. 그 삶의 내용을 본문에서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기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여 살라.” 신앙인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모습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점을 줄기차게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16절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빼내시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이유도 구별되게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도 세상을 거슬러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너희는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늘 “너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또 물으십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거슬러 살아갈 내용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신앙의 분명화 

제자의 첫 번째 덕목은 신앙의 분명화입니다. 오늘의 특징 중 하나는 불분명, 불투명, 불확실입니다. 오늘은 말도 태도도 행동도 언어도 다 불투명합니다. 신앙도 뜨뜻미지근합니다. 불확신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내가 믿으며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하고 고백은 하지만 실제로는 심히 막연합니다. 그 초점이 흐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유일신관이 흔들리고 중심이나 목적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 원인 중 가장 큰 원인은 다원주의의 영향일 것입니다. 

오늘은 모두 이 영향에 침몰되어서 있습니다. 우선 오늘 삶 내용이 다양합니다. 하나를 고집하기에는 너무 다양한 삶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평안한 삶입니다. 평안은 굳이 예수를 필요로 하지 않게 합니다.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합니다. 혼자 살아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거기다 오늘은 다종교시대입니다. 모든 종교가 섞여 살아갑니다. 초점이 흐려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염려하시던 부분입니다. 

오늘 일부 신학자들 입에서도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고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불교의 해탈도 구원이라고 해석합니다. 유교의 득도도 구원이라고 해석합니다. 동학의 혁명도 구원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최재우를 최메시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풍조가 마침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전도자 무디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 혼자 집에서 예배 드려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을 받고 무디는 지금 잘 타고 있던 장작개비 한 개를 뽑아 던져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 잘 타던 장작개비의 불이 꺼졌습니다. 그러자 무디가 이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는가 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때로 집에서 혼자 예배드리거나 TV를 보고 예배드려도 되지 않느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물결이 점점 더 거세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물결을 거스를 용기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그냥 그 물결에 휩쓸리거나 편승하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저녁예배는 아예 잊어버리고 새벽예배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만한 소신도 용기도 만인 앞에 서서 분명하게 고백할 자신감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모호한 신앙인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애매모호함은 어디를 가든지 채이게 됩니다. 오늘은 분명함, 확고함, 확신 있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하는 때입니다. 뜨겁든지 차든지 하는 신앙 모습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사람들이 주님을 선지자 중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보느냐?”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신앙고백이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물질 풍조 

이 물질의 풍조가 또 거셉니다. 오늘은 매사를 돈으로 해석하고 판단합니다. 돈이 있으면 고상하게 보이고 귀티가 나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현대인들에게 물질은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더 가지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반대로 돈이 없으면 초라해집니다. 무시당합니다. 힘이 빠집니다. 뒷자리로 밀려납니다. 비굴해 집니다. 그래서 오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지려고 총력을 기울이고 마침내 그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물질의 물결이 너무나 거셉니다. 그래서 이 물결에 휩쓸려 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롯을 보면 이 물질 때문에 삼촌을 버립니다. 부모 없는 것을 길러주고 양육하여 아들처럼 길렀습니다. 그런데 재산 때문에 삼촌을 기꺼이 버리고 소돔으로 갑니다. 인간은 물질 앞에서 이성도 도리도 잃기 쉽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소돔성이 불탈 때 다 버리고 맨몸으로 겨우 탈출하기에 이릅니다. 나오미는 물질 때문에 베들레헴을 버리고 이방 땅으로 갑니다. 살기가 힘들다고 장차 메시야가 탄생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진 땅을 버리고 이방 땅으로 갑니다. 그리고 결국 그곳에 가서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고 모든 재산 다 잃고 빈 몸으로 쓸쓸하게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오늘도 이 풍조에 밀려가다가 결국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미국의 어느 유명한 신학교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계속해서 모호한 신학을 가르치더니 학생들이 줄어들자 마침내 운영을 할 수 없게 되자 학교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운영이 안 되면 문을 닫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을 닫으면 자본금이 아까워 막대한 돈을 받고 이방종교에 팔아버렸습니다. 오늘 이 땅에 이방종교의 막대한 장학금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 장학금을 그냥 주겠습니까. 신앙의 개종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장학금을 받고 유학가기 위해서 오늘 많은 젊은이들이 신앙 전향을 하고 장학금을 받아 떠납니다. 그리고 이방종교의 자본금이 들어와 싼 이자로 사업자금을 주고 있습니다. 그냥 주겠습니까. 

때로 우리는 천만금이 주어진다 해도 그것이 아니다 할 때는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제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노인은 노년에 집 한 채가 있습니다. 그러면 만족해야 합니다. 미래는 주님께 맡기고 영적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동안 못 다한 기도생활을 하며 마음의 여유 있는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하는 삶을 누리며 하늘이 푸른 것도 발견하고 산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도 듣고 못 본 풀들이 산에 가득함도 보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노부부는 평생 모은 돈 20억 원을 학교에 장학금으로 내고 자기들을 위해서 겨우 쓸 돈만 남겨놓고 살아가는 오늘의 삶이 천국의 삶 같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매일 돈 돈 돈 하며 살아가는 분도 있습니다. 가진 것이 적다고 쟁쟁하면서 주일날 헌금을 하는데 10년 전에도 오늘도 천 원씩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나에게 복을 주세요! 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시절에 예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능력이 주어지겠습니까. 그리고 무슨 힘으로, 무슨 중심으로, 무슨 뜻이 있어서 세상을 거슬러 살겠습니까. 모두 이 물결에 휩쓸려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속문화 

오늘 세속물결이 대단합니다. 오늘은 문화라는 탈을 쓰고 이 세속물결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늘의 문화는 말이 문화이지 대부분은 성적 문화입니다. 오늘은 매사가 성적입니다. 옷차림도, 영상도, 글도. 연극도, 문화도, 거리풍경도 다 성적인 자극을 주는 문화입니다. 이 성은 우리 주변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손을 뻗으면 금방 취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중등학생들이 동네의 초등생 장애아를 윤간하였습니다. 왜 그랬느냐고 묻는 경찰의 물음에 키득키득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요즘 10여세 된 초등생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성폭행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공기 속에 이 성적풍조의 유전인자들이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누구든 매연을 마시고 살아가듯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이 성적 문화의 풍조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문화는 말이 문화이지 성적풍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너무 손쉽게 손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핸드폰으로 인터넷으로 비디오로 각종 영상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오늘 청소년들 그리고 젊은 신앙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영적 파괴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 풍조의 물결에 당당하게 맞서거나 거슬러 나아갈 청소년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미국의 7대 병이라는 진단이 발표된 적이 있습니다. 그 중 5번째 병이 부모의 이혼으로 이복형제가 많은 것이라고 합니다. 부모들이 은밀하게 성인 비디오를 보고 그냥 놓고 직장에 간 사이 집에 이복 남매들이 그 비디오를 보고 놀다가 순간 충동을 일으켜 성적 실연을 하는 일로 아이들이 임신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미국을 병들에 하는 7가지 병중 5번째 병이라고 합니다. 

이 물결이 마침내 교회 안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기독교에서는 동성애를 허용하였고 영국 성공회에서는 동성애자를 사제로 서품을 주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제 지원자가 없으면 신학교의 문을 닫아야지 지원자가 없다고 동성애자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처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펄쩍 뛰다가도 얼마 있으면 그럴 수 있겠다 하고 수긍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하나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윤리적 상대주의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이 물결이 이렇게 거셉니다. 


자기애 

오늘 또 하나의 물결은 자기애 즉 나르시시즘(narcissism)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잘 생긴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나르시스입니다. 어느 날 사냥을 갔다가 물가에서 목말라 엎드려 물을 마시려는데 순간 물에 비친 청년이 너무 아름답게 생겨서 그만 도취해서 사랑에 빠집니다. 이 청년은 매일 엎드려 물속의 청년을 바라보고 대화를 하며 행복해 하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르시시즘” 즉 자기애, 자아도취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자아도취시대입니다. 모두 자기에게 몰입하고 도취하고 자아실현을 위해 몸을 던집니다. 오늘은 자기를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자기실현을 위해서 장애가 된다고 해서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결혼을 무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이도 낳지 않으려 합니다. 아이는 자기 욕구 실현을 하는데 최대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내 인생을 허비하고 희생하기 위해 결혼해서 아이를 낳느냐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나르시시즘입니다. 

사람이 예수를 알기 전에는 모든 삶의 초점이 두 가지에 맞추어져 살게 됩니다. 하나는 나 자신입니다. 매사를 나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내가 초점이고 내가 중심입니다. 내가 주님이고 내가 우선이고 내가 목적입니다. 그래서 싸움이, 불화가, 다툼이, 관계악화가, 실패가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르시시즘입니다. 또 하나는 욕망입니다. 내 안에는 아주 강한 욕망의 덩어리가 들어 있어 나를 무섭게 지배합니다. 나로 욕심을 내게 하고 탐욕을 부리게 하고 미워하게 하고 속이게 하고 더 가지려고 몸부림치게 하고 더 올라가려 안간힘을 다 쓰게 하고 그러다 넘어지게 하고 탈선하게 합니다. 이 두 가지 원인은 모두 하나님을 거부하게 합니다. 불신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세상 유행에 몰두하게 하고 세상 물결에 휩싸이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성경말씀에서 세 가지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제자의 삶은 무슨 일을 할 때 먼저 이 일이 내게 합당한가가 아니고 하나님께 합당한 일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의 삶이고 판단이고 중심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모두 나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별이 된다 해도 따르려고를 하지 않습니다. 아직 미성숙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과연 내안에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나는 진정 주님의 뜻을 존중하고 있는가?” “그리고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나는 모근 것을 포기하고 예수를 선택할 용기가 있는가?” “나는 물질의 홍수, 문화의 홍수, 유행의 홍수의 물결에서 헤어날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사람들이 이런 물음도 없고 생각도 없이 정신을 잃고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어느 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려면 이 정도의 용기와 각오와 판단이 전제되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야 오늘 진정한 예수의 제자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제자의 첫 번째 덕목은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정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