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능력, 복음 (롬 1:16-17)

첨부 1


하나님의 능력, 복음 (롬 1:16-17)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가 다급해서 거기에 치중하고 살다 보면 진리의 문제가 뒷전으로 밀려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문제는 빵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주제입니다. 현실에서 바쁘게 살다 보면 진리가 멀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내 안에 확보되어 있느냐가 관건인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육체를 이끌고 가는 힘은 영혼, 정신세계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육체는 힘이 없습니다. 영혼이 있어서 육체가 귀중한 것이고, 영혼을 위해 진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진리가 확보되면 육체의 삶에 다가오는 어려움을 치고 나갈 수 있는 에너지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떡이 필요한 존재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산다는 것입니다. 첨단의 과학이 발달될수록 사람들은 더 공허하고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과학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영성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영적 공허를 채우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삶의 진리가 어떤 진리인가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에 대한 확신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를 확인해야 합니다. 

진리를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진리는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변하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이념도, 사상도, 철학도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도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주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천지는 없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1,600여 년 동안 성경은 40여 명의 기자들을 통해 다른 시대, 다른 사람들이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제가 일맥상통합니다. 

두 번째, 진리의 출처입니다. 

어떤 말인가 보다 누가 한 말인가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강권적인 역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영감을 받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곧 말씀이고 말씀이 성육신 하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고 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 진리가 구원의 길로 이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먹고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영혼을 영원까지 인도해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종교나 과학은 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진리는 영원으로 인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진리가 구원과 연관되지 않는다면 그 진리는 일부분일 뿐 완전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러므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는가에 따라 그 진리를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를 정확히 알고, 그 진리의 기초 위에 우리 신앙을 올려놓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만 왔다 갔다 하고 탄탄한 기초 위에 믿음을 세우지 않으면 어느 날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확신이 없이 교회에 다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움이 와도 이 진리를 생명처럼 붙잡고 마지막까지 갈 수 있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가슴으로만 뜨거운 것이 아닙니다. 감정은 언제나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진리에 근거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아야 합니다. 이것에 가장 중요한 책이 로마서입니다. 

여러분은 로마서를 읽고 계십니까? 많은 신자들이 믿음과 확신을 갖기를 원하지만, 성경은 읽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로마서는 구원의 문제를 다룹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로마서의 핵심적 구절입니다. 로마서 전체를 이해하려면 이 두 절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구원을 얻었느냐 입니다. 돈을 많이 벌었느냐, 나이가 몇 살이냐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 성경전체가 말씀하는 주제 중 하나가 구원입니다. 바울은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로마서를 썼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자들이 다시 한 번 이 부분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 이 구원의 기초 위에 우리 신앙이 세워져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궁극적이고 핵심적인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기초해서 구원의 문제가 잘 정돈되어 있다면 그 인생은 축복된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이어가시는 것은 구원의 역사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그 모든 기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으로 이끌고자 하시는 도구이자 수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사건과 문제와 질병은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셔서 우리를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손길인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 구원을 어떻게 소개할 것입니까? 구원을 설명하는 것은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흔히 구원은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완전한 해답은 아닙니다. 구원의 일부일 뿐입니다. ‘칭의’는 죄인 된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는 것은 모든 저주와 심판, 형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의롭다 여김을 받는 이 구원은 과거적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이 땅에서 이루어가는 구원, 하나님의 백성다워져 가는 것, 죄를 통제하고 죄와 싸워 이기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화되어 가는 것을 현재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내 삶이 복음 안에서 계속 변화되고 있다면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그 구원의 삶을 누릴 때 삶이 바뀝니다. 지금의 삶은 처음에 예수 믿었을 때와 다릅니다. 그것이 천국이 이미 임한 것이고 천국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날마다 부부가 싸웠는데 점점 그 횟수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성품이 성자와 같고,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과거의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는 성품이 험악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삶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때 삶이 변화됩니다. 이것이 구원을 경험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많이 변화되었고 또 변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육체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닙니다. 육체를 가진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넘어집니다.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은 미래적 구원, 이루어가야 할 구원입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완전히 변화되어 완벽한 완성적 구원을 이루어, 어느 날 우리가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장막으로 인도해 우리의 몸과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주님의 임재 앞에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이것이 ‘영화’ 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이런 구원은 어떻게 주어집니까?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져 갑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너무나 멋진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구원이 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을까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력합니다. 아무리 선행을 쌓고 수행을 감당한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도덕적인 삶은 위안을 주고, 죄에서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죄를 사하려고 해도, 아무리 수행을 해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완성하여 구원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완벽주의자로 수많은 규칙들을 만들어서 얼마나 진실되게 지키려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의 열심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외적으로 행하는 죄는 일부분에 불과하고, 내면에 숨겨진 죄는 더 깊습니다. 

어떤 분은 아이가 세상에 오염될까 봐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꽁꽁 묶어 보호하려고 하지만 방안에서 생각으로 짓는 죄는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는 그럴 아이가 아니라고 합니다. 나쁜 짓을 했어도 친구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 성경의 진단에 의하면 우리가 얼마나 악하고,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우리의 부패의 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도 성경에서는 그것은 금방 더러워지는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았어도 은혜를 쏟는 것은 순간입니다. 유대인들도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구원으로 가까이 가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구원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갔던 것입니다. 구원으로 가는 전제 조건은 인간의 전적인 무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했을까요? 인간에게는 전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밑바닥까지 죄의 실체를 인정하고, 바닥으로 내려가 비로소 복음의 서광이 비치는 것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소망이라는 것을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점점 자신을 강화하고, 종교적 열심을 통해 자신을 포장하고, 은폐하고, 미화하고, 자기를 속이면서 정당화하고,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자신을 속일 때 복음에서 멀어져 갑니다. “나는 전적으로 무능하고 죄인이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습니다.”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왜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일들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로마서에서 강조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신칭의’의 교리입니다. 

17절의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는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방법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추구했던 모든 방법과 이론들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시는 기준은 아주 단순합니다. ‘믿음’입니다. 차별하거나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인격의 수준이 어떤지를 따지지 않으시고 오직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미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라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복잡하게 만드셨다면 아무도 그것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간단하게 ‘믿음’만을 요구하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그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유효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며, 결단코 그 구원은 실패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고 완성시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시작하신 그 구원을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구원을 반드시 성취하시고 아무도 그 구원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합니다.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이나 사람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줄을 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 강력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갖기만 하면 그 믿음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붙잡고 있어서 우리의 구원이 결단코 빼앗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실성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편에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시고 완성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합니다.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사람이 구원을 어디에서 만들었거나, 구상했거나, 갑자기 깨달은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편에서 만들어진 구원의 계획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보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의’가 아주 중요합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의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을 말합니다. 의는 하나님과 화해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화목제물이 되신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 때문에 온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상태입니다. 그것이 불의한 삶입니다. 

죄는 기준을 벗어났을 때를 말합니다. 헬라어로 죄는 ‘하말티야’라고 하는데 과녁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이 죄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아무 데나 화살을 쏘아놓고는 거기가 과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기준이 없는 인생, ‘불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온 것입니다. 의는 기준인데 그 절대적 기준은 하나님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롬 3:23)’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행과 종교를 통해 의에 이르려고 노력하지만,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패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죽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어놓으신 기준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의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지만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죽어주심으로, 그를 믿음으로 더 이상 우리에게 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나타났고 그 의의 옷을 입으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종교로, 행위로 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선물하시고, 그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의 옷을 입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다르게 취급하십니다. 완전한 의인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몇 가지 죄만 해결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지을 죄까지 모두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죄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구약의 속죄는 한시적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커서 한번에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려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기시고 흰 눈보다 더 희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 더 이상 정죄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정죄감은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정신적인 모든 질병의 근원은 죄로부터 오는 수치감, 정죄감, 죄책감입니다. 이것에 짓눌린 사람은 사는 날 동안에 어렵고, 불행합니다. 

성도 여러분, 믿으면 의롭다 여겨주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정죄감과 수치감, 양심의 가책과 자신의 행위로 고통받고 있는 분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믿음으로 자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좀 더 선한 행위를 하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봉사하는 동안에는 천국에 갈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을 때는 구원이 흔들립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믿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도 우리에게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 구원은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받으면 됩니다. 구원도 받으면 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합니다. 어떤 것에도 빼앗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편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무 간단한 것 같아서 이 구원의 도를 거절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구원은 우리 편에서는 공짜이고 간단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대하드라마를 쓰신 것입니다. 구구절절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을 동원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를 만들어 오시고,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의 정점으로 오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의 뿌리를 십자가에서 무너뜨리신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가 이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믿음으로 받고 구원의 감격을 누리시며 우리의 노력과 행위로 구원에 도달하려고 했던 허망한 일들을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 위대한 로마서의 교훈을 여러분의 것으로 삼으시고, 종교개혁자들이 그렇게 회복시키려고 했던 참 진리가 여러분의 것이 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 가운데 날마다 역사할 줄 믿습니다. (이규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