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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겸손 (눅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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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눅 18:9-14)


오늘 예수님의 비유말씀에 의하면 어느날 두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한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세리와는 따로서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하는 자, 불의하는 자, 그리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 칠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멀찍이 서있던 세리는 13절에 보니까 그는 멀리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지 못하고 그는 가슴을 치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며 기도합니다. 

오늘 성경의 결론은 뭐냐 예수님 말씀에 보면 하나님앞에 의롭다함을 얻고 내려간 이는 누구냐 다시말하면 옳다고 인정받은 사람이 누구냐 이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였다는 것입니다. 또 쉽게 말하면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 그 기도를 거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리의 기도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이였습니다. 

9절에 보니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사람들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을 앞에 놓고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새리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 얘기가 예수님이 지어내신 얘기였다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돌로쳤을지도 모릅니다. 거짓말을 퍼뜨린다고 바리새파사람들을 모독한다고 그런데 이 정황에 비추어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거의 실화에 가까웠던것 같습니다.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예수님이 비유라는 방법을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 바리새파라는 말은 구별된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헤롯당들, 사두개인들, 바리새파 이렇게 있는데 이 바리새인들은 이중에서도 믿음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죄있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구별된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적인 열심과 윤리적인 정결함 그리고 이웃에 대한 구제의 열심 대개 이런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이였습니다. 

그들은 누가보기에도 참 경건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오전 9시 오전 12시 오후 3시  세 번을 기도합니다. 길을 가다가 시간이 되면 그들은 길에서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철저하게 기도시간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성경에 보니까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또 일주일에 두 번씩 이틀씩 금식했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일년에 한번 대 속죄일에 금식하는데 이들을 오히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자기의 의를 드러냅니다. 오늘 이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율법을 강요하는것은 좋았는데 그들의 외형은 껍데기로 가득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속 사람은 그렇지 못한데 겉사람이 그렇게 살아가려니까 그들은 위선과 형식의 사람들로 변질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주로 예수님의 말씀에 바리새인들이 책망과 꾸지람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좀좀 있습니다. 

이 바리새인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먼저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의 내용을 다시 봅니다. 11절 12절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성경을 자세히 보면 나는, 나는 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나는 다른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오히려 그의 기도에는 하나님보다는 자신이 더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의 의를 하나님앞에 열거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기 보다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사람에게 듣게 하기 위한 그런 기도였습니다.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행실, 자기의 업적, 자기의 열심을 자랑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으실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우리의 불의가 덮여짐을 얻는 것이고 우리가 정결함을 입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로 구원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너무 착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삶이 깨끗해서 윤리적이래서 인심이 좋아서 성격이 좋아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은 자기의를 마음껏 뽐내고 자랑했습니다.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꼭꼭 빠짐없이 드리고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나는 토색하지, 토색이라는 것은 남의 것을 약탈, 뺏는 것입니다. 불의, 부정직한 것, 간음, 음란한 행동을 하는 것, 나는 그런것하고는 먼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의로 충만해 있는 사람이였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다름사람이 듣기 위한 기도로 전락해버릴 때 기도의 타락이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기도인 것입니다. 

한번은 보스턴에서 전도집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집회의 대표기도를 맡은 사람은 지성인이고 학자인 유명한 사람이 기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몇일후에 그 지역 기독교 신문에서 그 기도를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이 위대한 학자의 기도는 아마도 보스턴 시가 창설된 이래로 보스턴시민에게 바쳐진 가장 웅변적이고 가장 지성적인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를 누구에게 바쳤다고 했습니까. 보스턴 시민에게, 기도란 누구에게 바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그러나 그 학자는 사람들에게 유창한 말로, 웅변적인 말로, 기도한 것입니다. 시민들에게 그 기도를 바친꼴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바리새인의 기도는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올려드린 기도가 아니라 자기의를 하나님께 과시하고 드러내는 기도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찬양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찬양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양이라 하면서 사실은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씁니다. 사람들이 잘 듣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나, 사람들이 은혜를 받나, 정말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에 관심이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다 나를 매도해도 하나님만 나의 중심을 알아주신다면 나는 틀림없어.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뒷전이고 사람들이 먼저 나를 인정해 줘야돼. 우리 성가대를 알아줘야 돼, 내 기도 잘한다고 칭찬해 줘야 돼. 

혹시 여러분 기도하고 칭찬받은 경험 있으십니까? 권사님의 기도를 들으면 참 마음이 뜨거워지고 은혜가 되네요. 더 잘하려고 사람들에게 더 잘하려고 하니까 하나님과는 점점 멀어지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가대 찬양이 참 은혜스러웠습니다. 우리는 점점 사람들이 좋아하는 찬양을 향해서 발검음질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바리새인의 타락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 자신을 보지 못했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이 그런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될 두가지 지식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고 둘째는 자기자식에 대한 지식이다. 하나님을 진실로 바로아는 사람은 자기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웃시야왕이 죽던해에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게 되었는데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뵌 이사야의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듭니까.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왜? 내가 이렇게 죄인인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 죄인이 감히 성전에 와서 하나님을 뵈었으니까 죽는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뵌 사람들은 자기가 한없이 작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영광됨에 비해 자기는 죄인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5장에 우리가 잘아는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잡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깊은데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잡았더니 너무너무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 전에 말씀을 보면 밤새도록 고기를 못잡았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시니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님정도로 존경받을만한 랍비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마어마한 고기를 잡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구나. 이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저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하나님의 영광됨 앞에서 자신의 누추한 모습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의 기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바리새인의 또 하나의 잘못은 그는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이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게 감사의 조건이 됩니까. 하나님 제가 저 사람처럼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게 하심을 감사하나이다. 이게 감사의 조건이 될까요.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그게 뭡니까? 교만입니다. 바리새인은 철저하게 교만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였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세리의 기도는 어떠할까요. 13절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감히 하늘을 쳐다볼수도 없습니다. 왜 하늘이 부끄러워서. 세리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나쁜일을 많이 해야지 하나님께서 기도를 빨리 응답하신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세리라는 사람은 그 당시에 매국노라고 지칭받았습니다. 

로마가 지배할 때 자기동족에 세금을 거둬가지고 일부는 자기가 착복하고 로마에게 갖다 바치는 사람들이 세리들입니다. 직업이 세리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였습니다. 부자였지만 외로웠습니다. 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으니까. 자기동족의 피를 빨아서 로마에게 갖다바치는사람들을 누가 좋아했겠습니까. 그래서 그 당시에 부요하게는 살았지만 대표적인 죄인들의 그룹에 창기와 세리가 있습니다. 창기란 몸을 파는 타락한 여인들을 창기라고 합니다. 

또 한부류는 세리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리가 하나님앞에 나와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가슴을 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비통함과 애도함의 뜻입니다. 여기엔 회개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하는 고백,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앞에 그는 회개 기도를 하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의 원어를 보면 저의 죄와 허물을 주의 자비로 덮어주소서. 저는 저의 죄와 허물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의 자비로 저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소서. 이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쌍히 여겨주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하나님앞에 고백합니다. 그가 드린것은 회개의 기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리고 그를 의롭다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거부되거나 열납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인과 아벨형제가 하나님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드린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예배도 거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물과 그 제사는 열납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가인은 시험에 들었습니다. 오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운데 하나님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세리의 기도를 열납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오해하지 말고 들으십시오. 어떤분은 아주 교회에 오래된 권사님이신데 누가 보기에도 흠잡을데가 없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히 드리시고 전도도 열심히 하십니다. 기도도 많이하시고 사람들에게 많이 사랑도 베푸십니다. 남의 험담도 하지않고 남 폄하하는 말도 안합니다. 완벽한 분입니다. 신앙의 경륜도 깁니다. 또 한사람은 그 교회에 나온지 한달밖에 안됐습니다. 전에 전과가 좀 있었습니다. 마약같은 거 하다가 감옥에도 갔다 왔습니다. 그 사람이 와서 교회나온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이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오히려 오래된 권사님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고 교회나온지 얼마안된 마약범으로 있다가 교회나온 이 사람의 기도를 들으셨다면 충격적인 것 아닙니까. 꼭 그렇다는 법은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은 뭐에요?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아무리 오래되고 그 시간에 기도하고 정기적인 시간에 예배에 집회에 참석할 정도로 열심히 있다고 하더라도 그 중심이 자기 의로 가득차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기도와 예배를 받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교만으로 가득해서 남을 멸시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용납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가 과거에 죄인이였고 이러이러한 못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도 자신의 죄인됨을 회개하고 뉘우치며 하나님앞에 드리는 그의 기도를 하나님은 더 기뻐받으십니다. 그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얘기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겸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교만한자의 기도는 거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4절말씀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하시니라. 사실 이 얘기는 기도의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결론은 겸손의 문제로 끝납니다. 자신을 높이고자하는이는 낮아지고 교만하고자하는자는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는자는 하나님이 높이신다. 이 얘기는 겸손과 교만의 문제로 결국 귀착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찬양, 우리의 예배,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안받으시고의 차이는 겸손의 관건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앞에 사람앞에 겸손하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겸손처럼 어려운것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영원한 주제가 겸손입니다. 사실 하나님앞에 나오는 것이 겸손입니다. 왜? 내 의로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지 않으면 내가 씻음받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린 하나님앞에 나와서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바로 예배다 하는 것입니다. 

브루스라는 분은 겸손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겸손은 숨기고 싶은 마음이 생길때 드러내고 보이고 싶은 마음이 생길때 숨기는 것이다. 자기 부끄러움을 남에게 막 숨기고 싶은 것은 오히려 숨기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고 남에게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숨기는 것이 겸손이다. 알듯 모를듯합니다. 그래서 미끄러운 수박씨처럼 잡으려면 빠져나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엔드류머레이라는 분은 겸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겸손은 아무도 나를 칭찬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내가 멸시나 책망을 받더라도 늘 마음에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겸손한자는 자신에 대해 아주 낮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겸손한자는 자신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을 잃어 버린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이다. 참 겸손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우리 모두의 과제이고 문제입니다. 

목사인 저 자신에게도 이런 문제가 제일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혹 목사는 강단에서 설교하다보면 우쭐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을 것입니다. 교만에 빠지기 쉬운 속상을 가질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인들이 늘 존중해주니까. 목사가 잘못해도 하나님의 종으로 알고 존중해주니까 제가 무슨 그럴듯한 사람인 줄 알고 착각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교만의 출발인 것입니다. 

미국에서 그런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가장 겸손한 목사에게 겸손한 목사라 칭호를 줄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교회의 담임목사님이 가장 겸손한 목사로 뽑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너무 감사해서 그리고 교인들이 너무 좋아서 우리 목사님이 가장 겸손한 목사로 뽑히니 너무 좋아서 교인들이 금메달을 하나 만들어서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목사님께 해서 그 메달을 목사님께 걸어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주에 교인들은 그 메달을 목사님에게서 다시 반환받아 갔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목사님이 그 다음주일 그 메달을 메고 설교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목사입니다 하고 그 메달을 목에다 걸고 설교했기 때문에 그 목사님에게서 그 메달을 다시 빼앗아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어느날 목사님의 겸손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예수님도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우리도 겸손해야 됩니다. 그랬더니 예배가 끝나고 악수를 하는데 어떤 집사님이 오셔서 하는 말이 목사님 말씀에 참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다른건 몰라도 제 장점중에 하나가 겸손이거든요. 그랬습니다. 나는 겸손하려고 늘 노력하거든요. 그분은 이미 그 순간 교만에 빠진 것입니다. 내가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상에 나같이 교만한 사람이 어디있어라고 말할 때 오히려 그는 겸손에 가까워 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분들은 그럽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분을 다 교만하다고 그러는데 자기 혼자 자기를 겸손하다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실상 교만으로 똘똘 뭉쳐있으면서도 겸손을 가장해서 가장 겸손한 사람인척 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폐부의 중심을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이같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겸손을 훈련해야 되고 겸손을 배워가야 됩니다. 

사무엘브랭글이라는 자기가 다니는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목사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이분은 큰 교회에 청빙을 받았는데 그 목회에 재미를 별로 못느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좀더 불신자들과 접촉하고 그들을 위해 복음을 증거하는 그런 일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문을 들으니 영국에 윌리엄부스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그런 섬김의 사역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 목사님밑에가서 배워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브랭글목사님은 윌리엄부스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윌리엄부스가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 한 20여명의 훈련을 받는 무리들과 함께 이브랭글목사님을 함께 집어넣었습니다. 그분들과 똑같이 훈련받게 했습니다. 

이 브랭글목사님이 하는일이 뭐냐 자기와 함께 훈련받는 동료들의 진흙이 뭍은 더러운 구두를 닦는것이 주어진 첫 번째 과제였습니다. 그는 구두를 닦다 닦다 힘드니까 그는 불평이 나왔습니다. 내가 큰 교회 청빙도 뿌리치고 온 사람인데 내가 남의 신발에 있는 흙이나 닦아주고 있는 처지라니 시험에 들뻔 했습니다. 마귀가 와서 속삭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말씀이였습니다. 예수님이 허리에 수건을 두루시고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기는 장면을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그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기쁘게 섬겨서 그 시험과정을 통과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주여, 주님이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셨는데 제가 어찌 동료들의 더러운 구두를 못닦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그 일을 기쁘게 그 일을 감당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이란 참 어려운 것입니다. 어떻게 겸손을 배워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겸손을 배워야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영광된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한없이 낮추셨습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구속하기 위해서 그분은 가장 낮은자리 밑바닥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조롱을 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에 맡으시고 가장 흉학한 죄수가 달리는 십자가에 매어 달리셔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보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 주님이 우리가 배워야 될 겸손의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 보면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랬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마음 그것입니다. 여러분 혹 다른 사람의 약점이 자꾸 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것은 내가 교만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섭섭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나를 이렇게 대우할 수가 있어. 이러면 여러분이 교만하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내 안에 있는 교만이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이렇게 대우할 수가 있는가. 나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우리는 매번 교만의 삶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자 무디에게 한번 그런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도시에서 집회를 했는데 그 도시의 신문이 이 무디를 아주 비난했습니다. 무디는 무식하고 철자법도 틀리고 설교도 아주 우습게 안다고 그리고 배우지도 못한 무식한 사람이라고 그를 아주 폄하하는 그런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 무디의 동료들이 매우 흥분했습니다. 신문사를 향해 고소를 하던가 항의를 해야지 하지 않냐고 흥분했습니다. 그런데 전도자 무디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보게 그냥 내버려두게나 저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나는 신문에 난 것보다 훨씬더 나쁜 사람이야. 난 더 악한 놈이야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무디의 겸손인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낮아지고자 하는 자를 들어서 높은 자리에 앉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런 비유도 있습니다. 너희가 어디에 가거든 상석에 앉지 말아라. 혹 상석에 앉았다가 더 귀한 손님이 와서 자리를 내어 달라고 하고 그 자리에 더 귀한 사람을 앉힌다면 너희가 부끄럽지 않겠느냐. 잔치에 초대를 받으면 늘 말석에 앉아라.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성경에도 그렇습니다.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예수님은 결론을 맺습니다. 바로 이것이 반전의 법칙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주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6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또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잠언 22장 4절에 보니까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이 우리의 신앙의 주제입니다. 

바로 이 사순절은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는 계절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 앞에 설 때마다 바로 주님의 겸손을 배우고 겸손을 훈련하는 그런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 겸손해서 우리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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