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일반 여가와 놀이의 신학-기독교적 레저문화

첨부 1


여가와 놀이의 신학: 기독교적 레저문화*

 

김영한(숭실대, 조직신학)

 

 

머리말

 

주 5일 근무 시대의 막이 오르면서 주말 연휴시대가 열리고 있다. 레저는 21세기 문화의 특징이며 이미 우리에게도 다가온 것이다. 주5일 근무 시작 후 일본에서는 매년 국내관광객이 15%씩 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2박3일 주말여행이 새로운 여행풍속도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에서도 2박3일 패턴화 하는 가족단위 레저문화가 급부상하고 있다. 여가중심 사회는 레저산업, 헬스케어(health care) 산업을 발전시키며, “잘 먹고 잘 살자”는 웰빙(well-being)족을 급증시킨다. 페밀리 레스토랑(family restaurant)은 손님수가 30% 이상 늘면서 손님의 주력이 20대 초반에서 30-40대 가족으로 바뀌고 있다. 홈 쇼핑(home shopping)도 토요일 오후 시간대에서 금요일 오후시간대로 옮겨가고 있다.

일본에서는 주 5일 근무제가 1988년에 도입되었다. 당시 일본은 세계경제의 최강자로 군림하며 곳곳에서 무역 분쟁을 일으키던 때다. 경쟁상대국들은 “일본의 수출 경쟁력은 엄청나게 긴 노동시간 덕분”이라고 주장했고 일본도 이런 상황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일본 정부는 노동법에 “1주일에 40시간 근무”만을 선언적으로 규정해 놓았을 뿐 규정을 어겨도 벌칙을 주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주5일제가 실질적으로 정착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1936년부터 주당 40시간 노동제를 시작하여 본격적인 주말 레저시대를 열었다. 유급 휴가 제도도 그때부터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서구에서는 주5일체 도입 초기에 여가를 활용하지 못해 발생했던 가족의 해체, 생산성의 저하 등의 부작용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여가를 선용하여 이것을 노동과 인간 삶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여가란 단순히 무위도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재창조의 계기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가를 비생산적 개념에서 생산적 개념으로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여 최근 들어 여가학(science of leisure)이 신학문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도 주 5일 근무 시 주일성수가 어렵게 되어 신자들의 교회이탈 내지 신앙적인 해이가 야기될 위험성이 경고되고 있다. 그리하여 토요일 예배 등 주일을 대체하는 예배시간 조정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주5일제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단지 주일 예배를 토요일에 드릴 것이냐 주일에 드려야 하는 가의 기술적인 성찰 보다는 더 본질적으로 놀이와 여가에 대한 보다 깊은 신학적 성찰에서 나와야 한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기독교 여가선용을 위한 신학적 연구로서 개혁신앙적 관점에서 놀이와 여가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

 

1. 놀이의 이해

인간은 일만 할 수 없다. 일하면서 쉬어야 한다. 쉬고 일해야 한다. 그럴 때 충전 된 새로운 에너지와 착상으로 창조적인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만을 인간의 전부로 보는 일중독주의(workaholism)는 인간을 일중독자(workaholic)로 만들어 가정과 직장과 삶 자체를 메마르게 한다. 노동은 휴식과 삶을 즐기는 여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휴식과 놀이는 생산적이며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노동윤리의 하나인 생산성 원칙(productivity principle)이 놀이(play)의 개념에 의하여 도전받기 시작했다. 놀이가 잘못 이해되어 방종과 자아도취주의(narcissism)로 왜곡되면서 놀이의 생산성 까지도 훼손되기에 이른 것이다.

놀이는 비생산적 활동이라는 편견이 우리 가운데 퍼져있다. 그러나 이것은 놀이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다. 놀이는 우리에게 휴식을 가져다 줄뿐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재충전을 마련해주며 심지어는 놀이라는 게임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경제적인 생산성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2년 전에 있었던 월드컵 경기는 운동선수뿐만 아니라 이를 운영하는 단체와 관람하는 자들에게 경제적인 유익 및 심리적인 유익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월드컵을 주최한 우리 한국에게는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이러한 게임을 관리?운영하는 능력을 보여주었고, 입장료를 팔면서 경제적인 수익까지 올렸다. 그리고 일본과 더불어 이 게임을 주최한다는 민족적인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고 더욱이 서구의 강호를 이기고 4강까지 감으로써 약소민족이라는 민족적인 한(恨, grudge)을 발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놀이란 그 의미를 노동처럼 그 활동 외적 요소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요소에서 찾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놀이란 노동과 대립되고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다른 태도 내지 마음의 상태”로 보아야 한다.

놀이라는 의미는 매우 포괄적이다. 놀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네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여가이다. 이것은 “논다”는 우리말로서 일을 하지 않고 자유로운 여가를 갖는 것을 말한다. 프랑스어로 바캉스(vacance), 영어로 휴가(vacation)라는 말의 원어는 문자적으로는 비어 있음, 공석(emptiness)을 나타낸다. 둘째, 게임 놀이이다. 윷놀이, 장기 놀이, 바둑 놀이 등이다. 이것은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통해서 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셋째, 신체적 활동이다. 스포츠와 운동이다. 농구, 축구, 야구, 검도, 유도, 수영, 등산이다, 이러한 스포츠 운동은 넓은 의미에서 게임 놀이에 들어간다. 농구, 축구, 야구, 검도, 유도나 수영이나 동산도 게임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윷놀이나 장기 놀이나 바둑 놀이가 신체 활동보다는 두뇌가 많이 사용되는 게임이라면 농구나 축구 등은 두뇌와 더불어 신체적 물리력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심미적 활동이다. 음악을 연주하며, 연극을 하는 예술, 상상력, 환상적 행위이다. 다섯째, 축제적 활동이다. 그것은 축하연, 축하의식, 축하예배 등으로 회상적(memorial) 문화활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이 회상은 성탄절, 부활절, 8.15 해방절 같이 기쁨의 축제일수도 있고 수난절, 6.25 전쟁 등 비극의 축제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이해에서의 놀이는 긍정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생산적이다.

게임 놀이는 조직화와 기술과 전문화에 집중하고, 예술과 연극, 환상은 창의성과 상상력의 발휘로 이어지고, 축제와 의식은 지나간 것의 의미를 재현시키고 상기시키는 것에 집중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놀이가 있다. 이것은 여섯째, 소모적인 활동이다. 이것은 놀이의 타락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허송세월 하는 것, 허랑방탕 하는 것, 허비하는 것, 게으르고 나태한 것 등이다. 심지어는 놀음과 심지어는 도박하는 것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공휴일(holiday)이란 영어의 단어는 본래 성일(축제일, holyday)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 성일이 세속화된 것이다.

우리는 이상에서 기술한 놀이의 의미 가운데 세가지 긍정적인 문화적 방향을 말할 수 있다. 놀이는 현재를 즐기며,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창조하며, 과거를 상기한다. 여기서 놀이란 단순히 삶의 빈 공간 같은 중립적이거나 시간의 소모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우리 삶의 전체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근거가 된다.

 

2.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 제작자 인간(homo faber),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

 

놀이의 관점에서 인간을 본다면 인간이야말로 하이징가(Huizinga)가 말한 것처럼 “유희하는 인간”(Homo Ludens)이라고 말할 수 있다. 놀이란 노동하는 인간이 노동하다가 그치고 빈 공간을 얻는 것이나, 할 일 없어 백수처럼 빈둥거리며 소일하는 것이 아니다. 놀이란 인간 삶 전반에 관련된 포괄적인 것이다. 영국의 문호요 극작가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이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 움직이는 연기자들(players)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놀이란 인간이 하는 특정한 활동이 아니라 세계 안에 실존하는 인간의 존재의 역할이 하나의 연기(play)요 역할(role)이다. 놀이란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린다면 “세계 내 존재”(das-in-der-Welt-Sein)인 인간의 "존재방식”(Seinsweise)이다. 인간은 “놀이하면서 일하며”(work playfully) “일하면서 놀이한다.”(play workfully) 여기서 놀이와 노동이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분리 될 수 없이 인간의 존재방식 안에 서로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놀이란 인간에게 있는 하나의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놀이만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유희하는 인간은 디오니소스적 인생관을 사는 자이다. 디오니소스적 인생관에서는 삶이란 축제요 놀이다. 축제란 지각과 감성에 의하여 지배된다. 노동이란 놀이, 휴식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인생의 즐거움이란 놀이와 축제라고 본다. 프랑스나 독일에서는 직장인들이 바캉스(vacance)를 가기 위하여 일하며 돈을 모으고 좋은 바캉스에서 인생의 축제를 즐기고 거기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서구인들의 삶에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인생관이 스며들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놀이 그 자체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될 때 축제로서의 놀이는 더 이상 축제가 아니라 무의미한 놀이가 되어 버리고 만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우(Bernard Shaw)의 다음 말은 적절하다: “날마다 지속되는 휴일은 지옥이다. 그것은 마치 무한한 돈은 있으되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인생관은 17세기 계몽주의에 대한 18세기 낭만주의적 범유희주의적 반발에서 나온다.

이에 반해서 인간은 "노동하는 인간"(homo faber)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인간의 본성이란 놀이가 아니라 일이요 노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놀이란 단지 일이란 노동에 종속되는 텅 빈 공간(vacation)이라는 휴가시간에 불과하다. 놀이란 여기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소모적인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작업의 중지이다. 놀이란 여기서는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하는 휴식과 기분전환을 제공하는 도피처일 뿐이다. 노동하는 인간은 아폴로적 인생관을 사는 자이다. 아폴로적 인생관에서는 삶이란 노동이요 일이다. 노동은 이성과 법, 질서에 의하여 통제된다. 놀이란 단지 노동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다. 호모 파베르는 사상적으로는 근대 계몽주의의 정신을 추종하는 과학기술주의, 실증주의, 공리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는 산업혁명의 산물이다. 그리하여 과학기술, 일과 능률만이 유일한 가치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을 노동에서만 보려는 "실증주의적 환원주의"(positivistic reductionism)에 귀속한다.

그러나 노동 그 자체가 인간의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놀이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놀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노동하고 쉬며 재창조하는 존재로 만드신 성경적 인간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놀이와 노동이란 두가지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고 보완하는 것이다. 놀이나 노동이나 모두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의 놀이나 노동이나 어느 하나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제작자의 측면이 있으며 유희자의 측면, 아폴로적인(apollonian) 측면과 디오니소스적(dionysusnian) 측면이 둘 다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을 제작자나 유희자 어느 한 면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근대 과학주의에 영향 받은 환원주의적 사고이다. 인간은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놀이와 노동을 인간됨(being human)이라는 전체성에서 조명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이 인간의 핵심이 아닌 것처럼 놀이도 인간의 핵심이 아니며, 놀이와 노동이 함께 인간됨에 귀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희랍적인 귀족주의적 인생관에서 보는 것처럼 비생산적인 여가의 향유가 아니다. 개혁신앙의 관점에서 인간됨이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놀이나 노동이나 그것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놀이나 노동이나 그것은 인간됨의 수단이다. 이것은 인간됨을 실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의 수단일 뿐이다. 인간의 존재가치는 놀이나 노동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예배이다. 예배에도 노동의 요소도 있고 놀이의 요소가 있으나 이 모든 요소들은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근본 목적에 기여할 뿐이다. 개혁신앙적으로 놀이하는 자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쾌락이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3. 재창조로서의 휴식과 여가

진정한 휴식은 몸과 마음의 휴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적인 휴식이다. 전자는 직장생활의 다급함으로부터의 휴식이고 후자는 하나님 앞의 휴식이다.

 

1) 몸과 마음의 휴식

노-하우(know-how)라는 기술적 지식이 지배하던 20세기에는 시간이 곧 돈이므로 쉴 새 없이 일하는 사람이 성공했지만, 21세기에는 노-웨어(know-where)와 노-화이(know-why)라는 본질적 지식이 중시되며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는 정보를 빠른 속도로 검색해 그것을 재활용하고 재창조하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여가란 서로 간에 눈을 맞추며 진정한 휴식을 즐기는 것이다. 여가는 단지 오락이 아니라 복지 가족 제도, 노인 문제 등 심리, 사회 문화현상과 더불어 나타나는 활용되는 남는 시간이다. 20세기 말 후기 산업 사회에서 노동과 여가의 구분이 시작되었다. 자기 수양이라는 행위로서의 여가 개념이 사라지고, 일하고 남는 시간으로서 여가 개념이 등장한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노동과 놀이는 통합된다. 21세기의 성공은 급변하는 고도의 자동문화의 환경에 적응하여 놀이와 축제로서의 여가를 통합적으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주 5일제 시작과 함께 휴일이 늘어나면 모두 행복해 질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한다. 시간이 넉넉하면 모두 잘 놀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아무런 의식과 준비 없이 맞이하는 시간과 여가란 공허와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낳고 향락이나 놀음 등 소모적인 놀이에 몰두하는 재앙이 될 뿐이다. 강요된 휴가는 자치 범죄와 향락으로 연결되거나 무분별한 여행이나 놀이를 통한 낭비를 초래한다.

바쁜 일과를 성공의 척도로 삼아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서는 “바쁜 것은 내 시간의 가치가 높아진 것이고 시간은 돈이므로, 나는 부자고 아는 성공한 사람이다”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불행은 일하는 시간 이외의 시간마저 돈으로 생각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휴식을 물질화 시키는 것이다. 휴식하는 시간은 돈이 아니라 우리에게 재충전을 해주고 행복을 가져다준다. 취미생활에는 나이나 국경이나 인종이 중요하지 않다, 남들 보기에 좋은 여가는 진정한 여가가 아니다. 자기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여가가 참된 여가이다. 긴장을 풀고 자신을 성찰하고 새로운 착상을 가질 수 있는 여가가 생산적인 시간이다.

 

2) 영적 휴식 - 거룩한 여가(otium sanctum)

 

영적 휴식이란 교부들이 말하는 것처럼 “거룩한 여가”(otium sanctum)이다. 미국의 영성신학자 리차드 포스터는 이 말을 “생활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와 하루의 활동 중 평화로운 능력, 쉬면서 미를 즐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자기 자신의 보조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 로서 특징지운다. 그것은 성과로서 억압받는 삶에서 벗어나 내면의 안식을 누리는 삶의 자세이다. 거룩한 여가를 위해서는 조용한 장소와 방해받지 않는 시간과 말씀의 묵상의 내적 자세가 필요하다. 홀로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고독이란 이집트의 안토니(Anthony) 같은 교부들의 삶처럼 외부로부터 방해받지 않은 처소에 들어서는 것이다. 하루 중 자기만의 시간, 주 중 자기만의 시간, 한 해 중 자기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편안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말씀의 묵상”(meditatio scripturarum)이 주(主)가 되어야 한다. 말씀의 묵상은 피상적으로 읽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 본문을 가지고 한 주일씩 깊이 있게 하는 것이다, 한 사건, 한 비유, 몇 구절이나 한 단어를 택해서 그것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재창조의 침묵으로 들어간다. 말씀의 묵상 가운데서 우리의 모든 염려, 분노, 두려움, 좌절과 고민과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의 묵상은 단순히 내적 경건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 관계해야 한다. 카톨릭의 영성신학자,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다음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고난만 묵상하고, 닥하우와 아유슈비츠의 수용소를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 시대의 기독교를 온전히 체험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선지자적인 심정을 가지고 우리의 가정, 직장과 사회, 국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주님께 아뢰고 주님의 인도와 간섭을 간구하는 마음의 자세이다. 그럴 때 우리들에게는 이 세대를 볼 수 있는 내적 통찰이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4. 재창조로서의 놀이

 

진짜 재미는 나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는 일상 속에 있다. 혼자 있어도 좋고, 둘이 있어도 어색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놀이의 시작이고 핵심이다. 놀이는 커뮤니케이션, 즉 의사소통이기 때문이다. 잘 놀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과 잘 통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그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손쉽게 색다른 재미를 끌어 낼 수 있다. 제대로 노는 것이란, 혼자 놀아도 너무 재미있어서 심심하지 않은 것“이다.

미국 예일신학부의 월트스토르프(Nicholas Wolterstorff)는 "예술의 보편성"(universality of arts)을 말한다: ”예술을 논의함에 있어서 우리는 인류에게 보편적인 것을 논의한다. 음악이나 허구나 시나 역할 놀이, 조각, 시각 그림 없이 살아간 백성은 없다.“ 월트스토르프는 예술, 특히 ”행위 속의 예술은 인류에게 보편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차원에 이르는 예술만이 아니라 원시인이 동굴 속에서 그린 벽화나 조각은 삶의 표현으로서 “행위 속의 예술”(arts in action)이며 이 행위 속의 예술이란 우리의 삶의 근본 존재방식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논다는 것에 대한 환상과 편견을 버려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논다는 것은 돈과 시간을 들여 누구나 깜짝 놀람만큼 대단하게 놀아야 하며 또는 일상적인 것에서 벗어나 특별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환상을 가지고 있다. 한국 중년남성들은 정신을 잃도록 폭탄주를 마시는 것만 노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왜곡된 술 문화 속에서 변형된 일종의 자폐증이다. 폭탄주를 즐기는 이유는 상호교감에 대한 부담 때문에 빨리 취해서 서로 눈 맞추기를 거부해 버리는 것, 바로 이렇듯 눈 맞추기를 거부하는 증상이 자폐증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놀이란 각자가 재미있어 하는 일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놀이의 시작이다. 첫째, 즐거움이나 재미를 느끼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재미있는 일에 몰두하여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는 경험이 바로 행복한 순간이다. 결국 행복은 일의 선택에 달려 있다. 재미있는 일을 선택하여 열심히 하면 재미와 행복은 저절로 뒤따른다.

 

5. 놀이의 신학적 의미: 안식으로서의 여가

개혁신앙에 의하면 놀이란 인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때문에 놀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바르게 조명될 수 있다. 필자는 놀이의 신학적 의미로서 네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창조 사역에 나타난 놀이

창세 전 하나님은 그냥 비생산적으로 가만히 계신 분이 아니라 그는 무한한 여가를 가지셨다. 하나님의 여가는 곧 그분의 창조적 활동의 침묵이요 준비이었다. 창세 전 하나님은 그의 예정의 경륜 속에서 무한한 여가를 즐기고 계셨다. 하나님은 이 여가 속에서 그의 창조와 인간을 향한 영원한 예정의 경륜을 작정하시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창세 전에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을 말하고 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 하나님은 창조 이전에 그의 무한한 여가 속에서 그냥 계신 것이 아니라 창조를 예정하시고 섭리하시는 그의 창조적 경륜을 하시고 계셨다.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구속하시고 하신 그의 영원하신 창조와 구속의 경륜이 그의 무한한 여가 속에서 계획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필연적인 창조가 아니라 그의 예정에 입각한 의지적 자유로운 행위의 창조이었다. 이 창조는 하나님의 자발적인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고, 하나님은 창조의 선하심을 즐기셨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예정의 목적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칼빈이 말한바 같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이며 섹스피어가 말하는바 같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과 즐거움을 위하여 각기 역할을 맡은 연기자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인간의 삶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기는 것이다”

인간의 놀이는 하나님이 그의 창조 이전에 누리시든 여가를 본받는 것이다. 놀이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며 자유로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놀이는 자기 삶의 향유에 있기 보다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분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다. 우리의 놀이란 단순히 우리의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한다.

 

2) 안식: 창조의 축제

 

여가는 창세기적 개념이다. 하나님의 안식 안에서 주어진 안식의 선물을 누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경배와 찬양과 감사가 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란 하나님 의존의 상징이며 하나님과 피조물 관계의 상징이다 안식일은 “창조의 축제일”이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안식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2:1-3)

첫째, 안식일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날이다. 이 날은 휴일(holiday)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날(holy day)이다. 복받는 날이다. 안식일은 자연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된 복된 날이다. 안식일의 존재는 이 날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안식에 있다. 안식일은 종교적인 날이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둘째, 안식일은 하나님이 쉬신 날이다. 일곱째 날 하나님은 창조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 그러므로 안식이란 피조물에게 유익한 날이며 삶을 향유할 수 있는 날이다. 자연에게도 마찬가지로 안식년이 적용된다. 7년에 한번은 땅도 경작하기를 쉬어야 한다. 쉰다는 것은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복 주심에 의존하는 것이며 땅은 쉬게 됨으로 비옥해지면서 생산성을 높인다. 안식일에는 하나님이 준비하심에 의존하기 때문에 노동할 필요 없다.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우리의 삶은 노동의 피곤함에서 벗어나고 우리의 생체리듬은 활력을 되찾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힘을 충전한다.

셋째,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일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안식일을 제도화 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면서 안식일의 인간화를 표명하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人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7-29). 예수는 안식일이 일하는 날 때문에 제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쉼과 안식을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이해하신다. 안식일의 의미는 눌린 인간의 해방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이다.

넷째, 안식 계명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으로 바라보고 그것은 선취하는 것이다.

삶이란 인간의 노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는 것이다. 노동은 이것을 위한 수단이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실현하는 도구이다. 안식일이란 창조와 종말이라는 시간의 틀 사이에 있는 하나님 의존의 삶을 묘사해준다. 몰트만에 의하면 “안식일이란 하나님 창조의 목표이며 창조의 완성이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매주의 안식을 통해서 미리 앞당겨지고 미리 경험된다.

 

3) 놀이로서의 삶 : 창조의 소명 그리고 메시야적 기대

 

첫째, 우리 삶은 놀이로서 창조의 소명이다. 놀이란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고통이 아니라 기쁨을,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누리게 하시고, 병이 아니라 건강을 누리고 삶을 향유하도록,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mandate of creation)이요 소명(calling)이다. 이러한 놀이란 단순히 여가나 자유로운 시간의 차원을 넘어서서, 자유 안에서 창조로운 명상이요 계획이다. 놀이란 예술과 축제, 기쁨과 게임, 희락의 마음, 찬양과 경배이다.

솔로몬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더불어 부귀와 영화를 선물로 받은 자로서 그는 삶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려고 하였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하여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시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전2:3-10)

전도서 기자는 삶을 즐기는 것이 인생의 의미요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분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전2:24-25) “이에 희락을 칭찬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 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중에 이것이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전8:15) 이러한 삶의 향유란 자연이 우연히 부여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노동과 노고와 슬픔 가운데서 즐기도록 하신 것이다. 전도서 기자는 희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무절제한 희락과 놀이에 대한 유신론적 경고이다. “청년이여 내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향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잠11:9).

Als das Spiel ist unser Leben das Fest. Es kommt aus dem messianischen Leben Jesu.

둘째, 놀이로서의 우리의 삶은 축제이다. 그것은 예수의 메시야적 삶에서 비롯된다. 예수는 안식일은 인간을 위하여 있으며, 안식년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해”라고 선포하였다. 예수는 제의와 세속,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 안식일과 평일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의 삶의 세속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삶의 메시야적 축제성”(die messianische Festlichkeit alles Lebens)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우리의 삶 전체는 놀이요 메시야적 축제의 참여이다. 몰트만은 예수가 제의(祭儀)적인 안식을 폐하고 새로운 메시야적 안식일을 제정하였다고 말한다: “특별한 안식일이 끝나는 것을 뜻하는 예수의 역사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궁극적인 안식일의 시작이다.” 메시야적 축제란 단지 즐기는 게임이나 시간활용을 위한 놀이에서 끝나지 않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멸시받는 자를 받아들이고 주린 자와 함께 먹고 마시는 축제에의 참여이다.

 

4) 예배로서의 놀이

 

놀이로서의 삶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예배이다. 기독교적 제의와 예배는 유대교적 안식일이나 제의적인 예배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적인 의미에 있어서 안식일이나 거룩한 달을 지키는 것에서 해방되었다(갈4:8, 골2:16,롬14:5). 그리스도가 신자들에게 주신 자유는 제의적 율법을 허용하지 않는다(갈5:1하). 바울은 놀이로서의 삶의 예배와 축제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한 우리의 구체적인 헌신과 복종이 예배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근거 위에서 우리의 삶을 지배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다가오는 부활의 축제를 미리 맛보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몰트만이 피력하는바 같이 “평일과 축제일의 분리를 폐기시키는 예배와 삶의 새로운 통일성은 단지 윤리적으로 세속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하나님의 통치의 축제는 매일의 세속성 가운데서 살아 있어야 한다. 세상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육체의 쾌락에 대한 저항과 성령에 대한 구체적인 복종은 “희생 제물”이 된다. 이러한 희생적인 제물에 근거한 놀이의 삶은 하나님 받으시기에 합당한 합리적 예배가 된다.

 

5) 의인(義認)과 사귐으로서의 놀이

 

신자의 놀이는 세상적인 놀이를 부정한다. 세상적인 놀이는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몰입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속적인 놀이를 비판하고 부정한다. 그리하여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세상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고 구속하신 새 사람의 놀이에 참여한다. 이 새 사람의 놀이란 신자의 의인(義認, justification)에서 출발한다. 신자의 놀이는 부조리하고 구조적으로 잘못된 현실을 비판함으로써 비로소 현실에 대한 진실한 긍정의 자세를 보여준다. 여기서 놀이는 안일주의에 빠지지 않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명상이며 비판적 기획에 들어간다.

신자의 놀이는 단지 인간됨의 긍정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하여 이루어진 메시야적 축제에 참여한다. 이러한 참여는 신자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귐에 의존한다. 나 혼자만의 놀이는 자기 몰입적인 것이며 이기주의적인 것이 된다. 신자의 놀이란 이러한 자기중심의 놀이가 아니라 타자 중심의 놀이이다. 타자 중심으로 놀이를 함으로써 신자는 진정한 공동체의 소속이 된다. 이러한 사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을 모방하고 반영한다. 몰트만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메시야적 축제는 메시야적 공동체로 이해되는 사귐에 의존한다.”

 

6) 하나님 나라의 놀이

<1> 찬양으로서의 놀이

하나님 나라는 놀이의 나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그에게 모든 존귀를 돌리는 찬양의 나라이다. 요한계시록의 장로들처럼(계11:16)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놀이이다. 하나님 나라의 약속은 놀이와 충만한 상태로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다. 성경은 낙원의 찬양과 놀이에서 시작하고 회복된 하나님 나라의 찬양과 놀이에서 종결된다. 단지 이러한 놀이가 낙원에서나 하나님 나라에서나 모두 인간의 자기 몰입적이거나 자기 향략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경배와 그 차에서의 거룩한 놀이를 말하고 있다.

성경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놀이와 정의와 평화가 온전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지상에서의 놀이란 우리의 부패하고 죄된 마음과 육신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사회의 구조적인 악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분량에서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 지상에서 우리의 축제는 지나칠 수도 있고 기준에 모자랄 수도 있으며 우리의 찬양과 경배가 그러하고 우리의 쾌락이 그러하고 우리의 휴가가 그러하다. 이러한 지상에서 놀이는 하나님 나라에서 결핍 없는 온전한 분량에서 성취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온전한 놀이의 나라이다. 결핍이 없으며 지나침이 없으며 성취되고 충족된 놀이의 나라이다.

 

<2> 희년의 성취

 

선지자 이사야는 다음같이 놀이와 축제의 나라를 약속하고 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 하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 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며,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이라”(사65:17-23)

구약 율법에서 주어진 희년(禧年)이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한번도 실시되어 본적이 없는 제도였다. 이것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예표(豫表)하는 경제적인 정의와 공평을 약속하는 것이다. 비로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경제적인 정의는 온전히 이루어 질 수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약속한 살롬(shalom)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이 살롬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 희년은 하나님의 구속의 해요 모든 부조리와 왜곡이 제자리에 되돌아오는 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해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희년(Jubilee)은 그 진정한 위치를 가지게 된다.

요한 계시록에서 사도요한은 19장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이 부를 찬양과 경배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천사들이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계19:1-9)

요한은 21장에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락을 노래하고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계21:4-5)

하나님 나라는 할 일 없는 여가(餘暇)와 지루함의 왕국이 아니라 찬송과 경배의 나라이며,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축제의 처소요, 현세의 모든 아픔과 고통이 치료 받는 치유의 왕국이며 눈물과 이별과 애통이 없는 기쁨과 재회와 감격의 나라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축제의 나라이다. 지상에서의 모든 축제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축제를 예기하며 선취하는 것이다.

 

<3> 제의와 놀이, 성전과 세속의 극복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성전이 없다. 거룩한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제의적 장소인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서나 충만해 있을 때는 불필요해 진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성전과 세속, 주일과 평일의 분리는 극복되며 성전과 일요일 자체가 극복된다.” 요한은 증거한다: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추심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계21:22-23).

삶과 분리된 종교가 극복되고 종교의 실체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영원한 교통 속에서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찬양과 경배의 삶이 이루어진다. 여기서는 삶과 찬양이 종합되고 종교가 삶 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종교는 완성된다. 제의와 놀이가 통일되고 성전과 세속의 분리는 극복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성전은 필요 없고 종교가 필요 없다.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영원한 기뻐함과 즐거워함의 놀이가 찬양과 경배, 하나님 안에 거함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 안에서 이루어진다.

 

6. 놀이의 윤리

 

놀이는 창조의 명령이며 창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소명이다. 필자는 기독교적 놀이의 이념을 다음 두가지로 규정하고자 한다.

첫째, 먹고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놀이란 무책임한 자기 몰입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 있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놀이에서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시간이나 여유로운 공간이기 보다는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정신과 태도이다. 이러한 자유스러운 정신과 태도에서 상상력은 증대되고 우리의 전 인격적인 헌신과 찬양이 하나님께 돌릴 수 있으며 우리의 창조적 활동은 증대된다. 그러므로 놀이의 윤리란 나의 삶과 여가와 자유시간이 전적으로 나에게 속하며 나의 것으로 여기고 방종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놀이라는 삶의 소명과 창조의 명령을 주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헌신하는 태도를 말한다.

둘째, 놀이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찬양과 놀이의 선취하는 것으로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고 준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놀이는 소모적이거나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에 참여한다. 우리의 여가는 다가오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복락과 여가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 놀이는 다가오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복락을 예기한다. 그러므로 놀이는 현재적이고 찰나적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다. 진정한 놀이의 원형은 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복락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념에서 필자는 기독교적 놀이의 윤리(christian play ethics)는 다음과 같이 일곱가지로 규정하고자 한다. 첫째, 정의로워야 한다. 자신의 향락과 즐거움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것을 침해하거나 자연을 훼손해서는 않다. 놀이는 공정해야 하며, 편애적이어서는 안된다. 놀이에 부정이나 반칙이 있어서는 않된다, 도박이나 난폭한 경기나 무차별 동물사냥도 정의롭지 못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놀이다. 객관적인 규칙과 합의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호적인 경쟁은 놀이를 향유하게 하며 공동체를 세우게 하며 화목을 가져온다.

둘째, 자존감을 세워야 한다. 이러한 놀이는 소박한 즐기고 긴장을 푸는 심리적이고 생리적 재생산에서 시작하여 심미적이고 지적 놀이에 이르는 포괄적인 것이어야 한다. 놀이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자존감을 세우는 데 기여해야 한다. 이기는 것이 놀이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운동경기에서도 그러하다. 놀이에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자신에 대한 신뢰와 자존감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수단과 방법을 가르지 않고 이김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서 공명정대하게 나의 최선을 다했을 때 나의 양심에서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것이다. 복권당첨이란 요행을 부추기는 것으로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는 권할만한 놀이라고 볼 수는 없다.

셋째, 사랑에 기초해야 한다. 놀이는 상대방을 굴복시킨다거나 상대방의 영역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공정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상대방의 처지와 형편까지 무시하는 것은 사랑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 놀이는 비인간적이 되어 상대방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전문성과 경쟁과 기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놀이에 있어서 중요한 화합과 화목과 공감을 깨뜨리는 것이 된다.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과는 동떨어진 자기중심의 삶의 태도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황금만능주의, 체면주의, 겉치레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청교도적인 근검절약과 자기절제의 삶이 요청된다.

넷째 인간됨에 기여해야 한다. 놀이는 정신과 몸을 건강하게 하고 재충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놀이는 건강과 복지와 노동에 기여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풍요하게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 자기몰입적인 놀이는 이기적이 되고, 자기선양적인 놀이는 교만하도록 며, 자기학대적인 놀이는 자존감을 상실하도록 한다. 포르노 비디오, 영화나 연극은 인간을 성의 상품화 하므로 인간됨에 기여하지 못한다. 프로 권투, 레슬링이나 격투기 경기도 인간을 폭력화 대상으로 물상(物象)화 시킨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로마인들의 검투사 경기를 반대했으며, 그 후의 기독교회도 난폭한 스포츠나 결투나 자기학대적인 게임을 반대하였다. 오늘날 농촌에서 벌어지는 소싸움이나 닭싸움, 도시에서 벌어지는 개싸움 등은 동물학대적이며 그것은 비인간화를 초래하는 놀이들이다. 놀이는 거북한 마음과 정신의 긴장을 풀어주고 함께 함을 향유하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놀이는 혼자만의 놀이가 아니라 사회적 놀이여야 한다, 혼자만의 놀이는 자기도취적이며 공동체를 세우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에 기초한 구속함을 받은 성도 모두의 공동체이다. 성공지상주의는 성공자의 자기과시에 머물고 실패한 자들은 언권을 박탈당하기 때문에 공동체를 깨뜨린다. 올바른 놀이는 협동과 자기지속과 자기부인을 가능케 하여 공동체를 세운다. 가족 구성원과 더불어 즐기는 영화 연극이나 스포츠, 등산, 친구나 친지와 더불어 즐기는 놀이는 공동의 실존감을 진작시켜준다. “즐기는 가족은 함께 거하며, 즐기는 친구들은 항상 연대 속에 있다.

여섯째, 자연보존적이어야 한다. 마구잡이 사냥, 희귀종 사냥, 생태계를 파괴하는 몰지각한 놀이 등은 자연의 청지기로서의 인간의 역할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오늘날 각종 유락시설이 북한강과 남한강 주변에 들어서면서 강변을 오염시키고 주변산하를 갉아 먹고 있다. 무지각한 등산객이 버리고 간 쓰레기더미로 인하여 자연에 오염되고 악취가 진동하는 곳이 적지 않다. 인간의 놀이도 자연과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개발(노동)이 “유지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이어야 하는 것처럼 놀이(휴식)도 바로 유지가능한 놀이(sustainable play)가 되어야 한다. 모든 노동이란 인간이 자연을 침범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안식일의 휴식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평화상태”를 의미한다.

일곱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놀이는 단순히 놀고 즐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놀이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즐거워하며 궁극적으로 그것을 보시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며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려야 한다. 놀이란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면전에서 삶을 즐기는 것이다. 노동을 즐기며 휴식과 놀이를 즐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의 되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휴식과 놀이를 통하여 이러한 분복을 인간에게 삶의 중요한 계기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바울이 제시한 일의 윤리(labor ethics)는 놀이의 윤리에 그대로 적용된다: “먹고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삶의 윤리(life ethics)도 바로 놀이의 윤리의 이념이 된다: “무엇보다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놀이의 동기와 목적은 인간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에 놀이는 덕을 세우며 이기적이 아니라 이타적이며 공동체를 세우는데 이바지해야 한다.

 

맺음말

 

주말 연휴와 여가를 어떻게 보낼까? 우리 현대인에게 다가온 더 많은 시간과 여유를 놀자판이 아닌 재충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명예퇴직이 제도화 되면서 남성들의 사회적 수명이 점차 짧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후를 대비하는 노(老)테크는 절실한 고민거리다. 노후를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는 돈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평소에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21세기 키워드는 휴테크(휴식의 활용)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가를 단지 남는 한가한 시간이 아니라 놀이와 축제, 자기수양의 과정,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놀이는 일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일과 더불어 우리의 삶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놀이(휴식) 없이는 노동은 노역(勞役)이 되고 비인간화된다. 놀이 역시 일을 위한 창조적인 재충전의 계기이며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중지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위한 상상력과 자기집중의 계기이기도 하다.

놀이를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향락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책임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놀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며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즐거움을 선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정의와 사랑이 입 맞추는 살롬의 왕국이라면 우리의 놀이는 이러한 살롬을 선취하는 행위여야 한다. 이러한 즐거움은 세속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거룩한 즐거움이요 승화된 즐거움이며 놀이 자체가 세속적인 놀이가 아니라 거룩한 놀이가 된다.

 

 

 

 

 

 

 

 

 

 

 

 

 

 

 

 

 

 

 

 

 

 

참고문헌

 

김정운, “21세기가 원하는 경쟁력은 휴식에서 창조되고 놀이에서 발견된다”, in: BI (Befrienders International) vol. 141, August 2003, 9

Arthur F. Holmes, Contours of a World View, Grand Rapids: Eerdmans, 1983, 이승구 옮김, 기독교세계관, 엠마오

M. Heidegger, Sein und Zeit, 10. Aufl. 1963

김영한, 하이데거에서 리꾀르까지, 전정판, 박영사, 2003,

Robert Lee, Religion & Leisure in America (Nashville: Abingdon, 1964)

Sam Keen, Apology for Wonder (New York: Harper and Row, 1969)

Richard Foster, Celebration of Discipline, 1978, San Francisco: Harper & Row, 생명의 말씀사 역, 영적 훈련과 성장, 2000

Thomas Merton, Spiritual Direction and Meditation, Collegeville, MN: Liturgical Press, 1960

Nicholas Wolterstorff, Art in Action, Grand Rapids: Eerdmans, 1980

J?rgen Moltmann, Theology of Play (New York: Harper and Row, 1972),

Lewis Smedes, "Theology and Playful Life", in: Orlebeke and L. Smedes, God and the Good (Grand Rapids: Eerdmans, 1975)

Hugh Rahner, Man at Paly (London: Herder and Row, 1972),

Herman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II, The Doctrine of God, 이승구 역, 기독교문서 선교회, 1988

Stanley J. Grenz, The Theology of the Community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신옥수 역, 조직신학.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3

J?rgen Moltmann, Neuer Lebenstil. Schritte zur Gemeinde, M?nchen: Chr. Kaiser Verlag, 1977, 김균진 역, 새로운 삶을 위하여, 현대사상사

김영한, “한국기독교와 레저문화”, 한국기독교문화신학, 성광문화사, 1995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