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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질투가 미움으로 바뀔 때 (삼상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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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가 미움으로 바뀔 때 (삼상 18:1-9)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울은 왕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움 속에 떨었습니다. 자기의 자존감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의 실패로도 나타납니다. 도대체 이 실패는 어디서부터 생긴 걸까요? 마음속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질투를 스스로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질투가 생기면 남을 과대포장하면서 나와는 비교가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지닌 소중한 것은 보지 못하고 자기를 스스로 내리쳤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다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유라고 하는 인물은 오나라의 지략이 있는 장군으로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군대와 전투하면서 필연적으로 화공을 펼쳐야했습니다. 그때 촉나라의 군사책략가인 제갈공명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화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남풍이 필요한데 동남풍이 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갈공명이 천지기후를 예측하면서 몇 날 며칠에 동남풍이 불 테니 그 때에 조조의 군대를 공격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유는 자신의 전략이 제갈공명의 지혜보다 한 수 떨어진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질투심과 시기심이 불붙듯 솟아올랐습니다. 그는 하늘을 보면서 탄식합니다. “하늘은 이 시대에 주유를 내셨는데 왜 제갈량까지 내셨습니까? 한 사람이면 족할 것을 나보다 더 나은 인물을 이 시대에 내셔서 내 가슴에 질투의 불을 지피십니까?” 이렇게 신을 원망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데우스>라고 하는 모차르트에 관한 영화가 있습니다. 당시 궁정 음악가인 살리에르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모차르트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모차르트가 지닌 음악적 천재성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그 순간 내게는 그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질투심이 솟구치게 됩니다. 그는 질투심으로 불타오르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합니다. “저렇게 천박하고, 저렇게 낄낄거리고, 저렇게 유치한 모차르트에게 어떻게 그렇게 비범한 음악적인 재능을 주셨습니까? 당신은 내게 다른 사람의 탁월성을 보는 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 자신은 너무나 평범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셨지요.”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가슴으로부터 통탄합니다. 

여러분은 주유나 살리에르와 같은 경험을 해보시진 않았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수없이 만나지 않습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자신과 비교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가슴 아파합니다. 질투가 생깁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게 공평한 것입니까?”라며 비교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비교는 중요한 인식능력이지만 내가 비교대상이 될 때는 고통스럽습니다 

비교하는 것은 사람에게 중요한 인식능력입니다. 비교하는 것의 긍정적인 면은 무엇일까요? 비교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비교해야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소중한 것과 덜 소중한 것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이 비교하는 능력입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은 물건을 살 때 상품을 비교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확인을 합니다. 상품명을 쓰면 그 상품에 대한 비교가 일목요연하게 뜹니다. 똑같은 상품이라도 어떤 상품을 어디에서 싸게 파는지도 뜹니다. 그렇게 해서 가장 적절한 가격에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홈쇼핑 채널을 보다가 충동구매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에도 이 사이트에서 가격을 비교하게 되면 ‘더 싸게 파는 곳이 있구나.’하면서 충동구매가 자제되기도 합니다. 

상품에 관한 비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한 비교도 매일 경험합니다. 직장에서 좋은 사람을 뽑으려면 이력서를 받고 면접을 합니다. 이 사람이 적합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묻습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우리는 사람을 비교합니다. ‘어떤 사람이 국민의 마음을 깊이 아는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 국정을 운영하기에 적합한 사람일까?’ 잘 아시다시피 어제부터 대구에서 세계육상선수권 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누가 철저한 비교우위를 차지하는가를 결정하는 경기입니다. 누가 더 멀리 뛰는가, 누가 더 높이 뛰는가, 누가 더 빨리 뛰는가를 겨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메달을 딴 사람, 특별히 금메달을 딴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치고 환호하며 칭찬합니다. 이 땅에 비교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비교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남을 비교할 때는 객관화가 되지만 비교대상에 내가 포함되면 문제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육상트랙에서 잘 뛴 선수에게 박수치는 관중은 편안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은 초긴장 상태입니다. 조금만 늦어지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과 훈련이 다 무산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체험입니다. 아무 메달도 못 땄을 때 마치 죽을 것 같은 절망감이 몰려오는 것은 비교대상에 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베이징 올림픽 수영에서 메달을 딴 박태환 선수가 이런 엄청난 비교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자기 훈련을 잘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이기는 수영에서 즐기는 수영으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훈련하는 것이 재미있어졌고 수영하는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비교대상 속에 나 자신이 포함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나보다 잘난 사람들, 나보다 더 뛰어나고 탁월한 사람들을 수없이 만납니다. 그때에 그 사람들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4가지 보기를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입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은 외면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만 찾아다녔다. 두 번째,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만나면 몰래 그를 흉보고 그의 잘남을 별 것 아니라고 깎아내렸다. 세 번째,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만나면 그를 부러워하고 나도 언젠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 훈련하며 다짐해보았다. 네 번째,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만나면 내게는 저 사람과는 다른 나만의 매력과 나만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자부심을 가졌다. 

여러분은 이 4가지 중에서 어떤 인생을 사셨습니까? 아마 4가지가 모두 있었을 것입니다. 어떨 땐 열불이 나고, 어떨 땐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흉보기도 하고, 어떨 땐 나도 노력하면 언젠가 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해보기도 하고, 어떨 땐 나는 저 사람과는 다른 나만의 개성이 있다고 자기 자존감을 새롭게 꾸려나간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는 가급적이면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네 번째처럼 나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달려 나가는 것은 필요합니다. 

사울 왕은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바로 가장 최악인 두 번째 모습이 나옵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을 흉보고 끌어내리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울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본래 잘난 사람이었습니다.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탁월한 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9장 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사무엘상 9:2上) 

NIV 영어성경을 보니까 “an impressive young man”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딱 보면 ‘이야, 멋진 놈이네! 참 잘난 사람이구만! 참 매력적인 청년이네!’ 이렇게 볼 수 있는 강력한 모습, 요새 말로 말하면 얼짱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컸더라.” (사무엘상 9:2下) 

이스라엘 백성의 평균 키보다 어깨 위, 즉 목이 하나가 더 있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건장한 청년이었겠습니까? 요새 말로 말하면 몸짱인 청년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왕이 되기 전에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던 아주 겸손한 인물, 마음짱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주 탁월한 사람 중에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보며 질투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윗이라는 인물이 나타나면서부터 자존감이 쪼그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자꾸만 좁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위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모습을 의존하다보니까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났을 때 어찌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에게 들린 소리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아니라 여기저기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였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들려왔습니다. 자기 아들 요나단도 다윗 없이는 죽고 못 사는 죽마고우 같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울 왕에게 아주 놀랍게 다가왔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사무엘상 18:1)

사울 왕이 다윗을 아들 요나단의 친구로 생각하고 질투하기를 멈추었으면 되었습니다. “내 아들의 친구지. 내 아들보다 더 멋지군.” 그 정도만 이야기하고 끝났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하고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흔들림이 옵니다. 그리고 자기의 아들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딸까지도 다윗을 연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 모습에 사울 왕이 얼마나 머리가 빙빙 돌고 미칠 것 같았는가를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사무엘상 18:20上) 

그래서 자기 딸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면 줄수록 질투와 시기심이 사울 왕을 붙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 백성들이 자기보다 다윗을 더 좋아하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아니, 자기의 신하들인데 다윗을 더 가까이 따르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사무엘상 18:5) 

백성들도 다윗을 보고 “지혜롭구나!”하고 기뻐했습니다. 아니, 사울의 신하들까지도 다윗을 따르고 좋아했습니다. 인기가 자꾸만 올라가고 있습니다. 자기 인기는 무너지는 것 같이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마음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7절에 나오는 여인들의 노래 소리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마음을 아주 뒤틀리게 만들었습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무엘상 18:7)

그는 이 노래 소리를 들으며 분노했습니다. 화가 치밀었습니다. 불쾌해졌습니다. 다윗을 주목하여 보면서 ‘이제 내 자리를 빼앗겠군! 이제 다윗을 제거해야하겠다!’라고 다짐하게 됩니다. 

교만은 질투를 낳고 질투는 미움을 낳습니다

질투를 안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질투가 지속되면 미움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미움으로 바뀌면 그 마음을 버리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질투할 때는 쉽게 내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질투가 미움으로 바뀌면 머릿속에 꽉 차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질투가 미움으로 바뀌기 전에 빨리 지나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울 왕은 거기서 그냥 멈추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질투하면 할수록 사울 왕은 고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외로워집니다. 병적인 강박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놀랍게도 성경에는 그런 사울 왕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도 사울 왕을 떠나셨다”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사울아, 이제는 네 마음대로 해라. 네가 왜 내게 오지 않고 자꾸만 스스로 위축이 되느냐?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을 떠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로 갑니까? 다윗에게로 갑니다. 이것은 사울에게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질투를 느낄 때에는 너를 성숙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경고로 들으시면 좋습니다. 나 자신을 한번 돌아보는 것입니다. 질투를 그냥 놔두면 미움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또한 질투는 교만의 뒷면이기도 합니다. 교만이란 나 스스로를 우월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멸시합니다. 

그런데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만나면 갑자기 질투로 바뀝니다. 그리고 나는 쪼그라듭니다. 열등감을 느낍니다. 나보다 잘 나가는 사람을 끌어내리기 시작합니다.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너도 그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릴 수가 없다면 너도 누리면 안 된다고 그를 훼방합니다. 이것이 질투입니다. 이것이 시기심입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나는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 내가 누릴 권리를 다른 사람이 누리고 있다. 내가 가지지 않은 것을 가진 사람을 보면 내가 그대로 보고 내버려 둘 수 없다.” 이러한 질투와 시기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질투는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슬퍼합니다

질투만큼 인간의 마음을 기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요? 질투가 나오고 시기심이 생기면 반드시 먼저 사라지는 것이 기쁨이고 먼저 없어지는 것이 평안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나보다 더 예쁜 사람, 더 멋있는 사람은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인기 있는 사람은 놔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잘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부자인 사람들은 못 봐주겠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능력이 많은 사람들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적인 질투에서 때로는 집단적인 질투와 시기심으로 바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시대에 팽배한 집단이기주의입니다. 집단이기주의에 조금만 더 들어가게 되면 바로 그것이 있습니다. “왜 너 혼자 잘나가? 왜 너 혼자 잘 먹어? 왜 너 혼자 그 자리를 차지해?” 우리는 지금 그 속에서 아파하고 있습니다.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 사회 전체가 앓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이 신앙생활 하는 것에 대해서도 질투를 합니다. “너는 나보다 더 영적이어서는 안 돼! 더 신앙적이어서는 안 돼!” 그 속에 어떻게 마음의 평안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질투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질투란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슬퍼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즐거우면 슬퍼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면 속이 마구 쓰린 것입니다. 이게 질투란 것입니다. 

질투는 인간적인 악덕목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죄입니다. 제일 처음에는 상대방에게 화를 내다가, 다음에는 나 자신에게 화를 내고, 다음에는 하나님을 향해서 화를 내는 것이 질투입니다. ‘하나님, 나를 왜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나는 부족하게 만들고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풍족하게 만드셨습니까? 나는 하나님이 선하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공평하다는 말을 거절합니다. 왜 이렇게 질투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그대로 놔두고 있으십니까? 나는 하나님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질투심과 시기심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서 형은 동생을 보면서 화를 냅니다. 동생 때문에 화를 낸 것이 아니라 아버지 때문에 화를 낸 것입니다. “아버지, 왜 사랑을 그렇게 전해주세요? 왜 그렇게 못된 놈에게 잔치를 베푸세요? 나는 아무 것도 안 해주고!” 그러면서 아버지를 거절하고 있는 것이 탕자의 형이었습니다. 사탄의 마음입니다. 사탄이 인간에게 처음 가르쳐준 것이 질투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듣지 마라! 내 말을 들어라!” 하나님을 질투하면서 인간을 유혹한 것이 바로 질투의 죄악인 것입니다. 

질투를 차단하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내 속에 질투가 있습니까? 이것이 미움으로 가기 전에 차단시키셔야 합니다. 그리고 선언해야 합니다. “질투는 악이다! 시기심은 불의한 것이다!” 마음속에 작정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복을 다시금 세우셔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일으켜 세워주신 것 감사합니다.” 

60억 인구 중에 나를 독특하게 세워주신 것, 하나님이 주신 특권으로 세워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질투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깨닫고 “하나님, 내 인생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처음부터 하나하나 시작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잘 나고 인기 있는 사람이 많습니까? 그냥 존중해 주세요. 그냥 귀하게 여기세요. 그리고 나 자신도 귀하게 여기세요. 내가 하나님의 귀한 자녀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하나하나 다시금 기억하면서 내게 주신 복을 세우고 주님과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새롭게 열어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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