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칼을 가지는 자 (마 26:47-56)

첨부 1


칼을 가지는 자 (마 26:47-56)

1.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 직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는 것이 너무나 혹독한 것이기 때문에 “(마26: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에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서, 힘을 북돋우어 드렸습니다. 예수께서는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습니다.(눅22:42-44) 기도를 마치시고 일어나, 제자들에게로 와서 보시니, 그들은 몹시 피곤에 지쳐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26:45-46)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산에서 내려가자 한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앞장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하러 그들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께서 주로 어떤 곳을 자주 찾으시는지를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곧장 체포조를 이끌고 왔던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이끌고 온 ‘큰 무리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 다시 말해 유대 종교 최고 지도자들이 파송한 무리들로 ‘성전 경비대원들’과 고용된 폭력배, 그리고 일부 로마 병사들로 구성되었습니다.(눅 22:52,요 18:3,12) 이들 무리가 소지한 것들이 ‘칼’과 ‘몽치’(곤봉)라고 했습니다. ‘칼’은 로마 군인들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몽치’는 성전 경비대원과 폭력배들이 소지한 무기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큰 무리들’이라는 표현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파견된 자들이 무려 200명 정도에 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일찍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없애려고 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어둠을 틈타 가롯 유다의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완벽하게 체포하고자 최강의 무력을 행사는 대규모 체포조를 파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럴 필요까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며 십자가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결심을 하고, 자원해서 하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계신 곳을 정확히 파악하고 찾아온 유다는 그 ‘큰 무리들’과 미리 신호를 맞추어 손쉽게 체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가롯 유다가 찾아가 ‘입맞추는 자’가 체포할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호였습니다. ‘입맞춤’은 당시 유대인들이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는 일반적인 인사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이러한 존경과 사랑의 인사법을 이용해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의 등에 비수를 꽂는 비열한 짓을 행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가롯 유다가 다가와 인사할 때, “(마26:50)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며 배신자인 가롯 유다를 향해 ‘친구여’라고 부르고 ‘네가 온 목적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의 이 말씀은 자신에게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알고 계셨고 또한 의연히 그 일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즉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服從)시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유다의 신호에 따라 체포조들이 들이닥쳐 이내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했습니다. 


2. 예수께서 체포되시자 바로 그 때 베드로가 단검을 꺼내 휘둘렀는데 그 칼에 체포조 중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주 수난받으시리라는 말씀을 하실 때부터 스승의 신변을 보호할 목적으로 칼을 준비해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리라는 말씀을 하실 때,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26:31)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고 하실 때, 베드로는 “(마26:33-34)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호언장담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으로 베드로의 변절을 경고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말씀을 들었던 베드로인지라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아 칼을 휘둘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곧장 “(마26:52)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말고’의 떨어진 귀를 만져 낫게 해주셨습니다. 떨어져나간 귀가 금새 원상회복되었습니다. 

누가복음22:51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신의 폭력행위를 제지시키고, 또 순순히 결박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 칼을 칼집에 꽂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폭력을 당한 ‘말고’를 치유하신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뜻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후에 모든 살아 있는 동물을 식물(食物)로 취할 수 있지만 그 고기를 피채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9:3-6)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비록 식물(食物)로 동물을 먹을 수 있지만 그 생명을 소중히 여겨 피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거는 ‘모든 생물의 피를 생명’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레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 17:14)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그래서 무릇 폭력을 휘둘러 생명의 상징인 피를 흘리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5:38-39)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칼을 쓰는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하기 때문입니다.

(계13: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칼’은 세상 국가들의 통치력 기반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칼’을 앞세워 고귀한 생명을 좌지우지하려 할지라도 칼을 앞세운 자들은 반드시 그 칼 앞에 엎드러질 것임을 깨달아 길이 참고 용서와 사랑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빌라도 총독 앞으로 인도되어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께 “네가 유대 사람의 왕이냐?”고 심문하자 예수께서 “네가 하는 그 말은 네 생각에서 나온 말이냐? 그렇지 않으면, 나를 두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여 준 것이냐?”고 되물었습니다. 

빌라도가 “내가 유대인이란 말이냐? 네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다. 너는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는 말씀으로 칼이 지배하는 세상 나라가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가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요18:33-36) 그래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칼을 거두게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53절을 보시겠습니다.

(마26:53-54)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예수께서 ‘큰 무리들’에게 체포된 것은 자기 자신이 무력해서, 막아낼 힘과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곁에 세워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고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인류 구원을 위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발적으로, 스스로 잡혀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 일어나는 일련의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뜻이며, 구약시대에 예언하신 바가 다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배신과 체포, 그리고 그가 당해야 할 고난과 죽음은 결코 단순히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인 것입니다. 가롯 유다의 배신은 

시편41: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는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은 삼십에 팔리신 것은 스가랴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이사야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손과 발이 찔리신 것 역시 스가랴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예수께서 체포당하시는 장면은 이사야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는 예언 그대로입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대로 세상에 오셔서, 성경대로 사시고, 성경대로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고, 성경대로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성경대로, 예수께서 약속하신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고전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성경대로 사는 것이 인생을 가장 지혜롭고 정확하게 사는 길입니다.(전12:13) 


3. 예수께서 단검을 빼들었던 베드로에게 “(마26:52)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22:34을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눅22:34)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고 말씀하신 후, 제자들에게 “(눅22:36) 이제는 전대(돈지갑)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칼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칼’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칼’을 사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돈 지갑에 돈이 있다면 ‘칼’을 살 수 있겠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눅22:38) 주여 보소서. 여기 칼 두 자루가 있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의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은밀히 단검을 준비해 소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대답은 ‘칼’로 무장해서 예수의 체포를 막아보자는 제자들의 굳은 의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께서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말씀하신 것을 실제 무기를 구입해 무장하라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제 곧 예수께서 체포되어 십자가에 죽게 될텐데, 그 이후에 닥쳐올 환난에 대비하여 영적 무장하라는 뜻입니다. 영적 무장하라는 것은 우리 싸움의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 하늘과 이 어두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인 마귀들을 대항하여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싸움은 눈에 보이는 무력으로 무장해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길은 “하나님의 무기”로 완전 무장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6:12-17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6:12-17) 우리는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이 어두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인 마귀들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원수를 대항하여 싸워 이기고 모든 일을 완성한 후에 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 무장하십시오. 여러분은 굳게 서서 진리로 허리띠를 두르고 의의 가슴막이를 붙이고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할 태세로 신발을 신고 이 모든 것 외에 마귀의 불화살을 막을 수 있는 믿음의 방패를 가지십시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칼을 가지십시오. 

결정적으로 마귀와 이 세상 어둠의 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는 성령의 칼(the sword of the Spirit),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라는 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벧후 1:21)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 성령의 칼로 무장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라는 것은 성전, 교회 중심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성전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언약궤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도브슨 박사가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한 학교에서 운동장 둘레의 울타리를 철거했습니다. 울타리가 아이들에게 정신적으로 구속감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울타리 철거 후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울타리가 있을 때는 아이들이 운동장 전체에 흩어져서 놀았는데 울타리를 철거한 뒤에는 운동장 한 가운데에 모여 노는 것이었습니다. 

이 실험으로 아이들에게 있어서 울타리는 구속감이 아니라,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울타리가 없어지자 아이들은 오히려 운동장의 활동 범위를 좁혀 자기들끼리 모여 서로 의지한 것입니다. 도브슨 박사는 “아이들에게는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자신의 명제를 실험을 통하여 증명하였던 것입니다. 아이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며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좋은 교육이나 사랑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가정의 규율, 부모의 훈계와 징계, 사회 공중도덕 등의 울타리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채찍’이란 말은 교육학적으로도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에 울타리가 되어 그 인간의 삶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정과 사회 등 삶의 전반에 걸쳐 인간의 충분한 울타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중심, 하나님 말씀 중심, 그 말씀이 중심이 되는 성전을 중심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죽자, 하나님께서 새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세웠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동안 모세의 부관으로 임무를 잘 수행했었지만 정작 그가 지도자가 된 후 정국은 혼란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이 팽배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새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은 “모세에게 약속한대로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라”는 약속에 대한 재확인과 이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기 위해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1-8)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가운데 강하고 담대하여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며 평탄케 되기 위해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신앙생활할 때 세상에 한 눈팔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지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한 눈 팔았다면 그는 감옥에서 인생이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간직하고 그 꿈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형통했던 것 역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한가롭게 옥상을 거닐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목욕하는 아리따운 여인에게 홀딱 빠지고 말았습니다. 

잠시 한 눈 팔았던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한가롭게 하게 되면 병들거나 세상 유혹에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발등에 불붙은 것처럼 가정에도 충실하고 교회생활에도 열심을 다 할 때 건강하고 세상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다윗이 이처럼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에 눈이 돌아가니까 나라의 충신이었던 그 여인의 남편까지도 죽이는데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같은 다윗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냥 놔둘리 없으셨습니다. 선지자 나단을 불러 다윗을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삼하12:11-12) ...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이같이 준엄한 하나님 말씀앞에 다윗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참회했습니다.

(시6:1-6)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다윗은 수척하며 뼈가 떨리는 회개와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시는 참회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버리지 아니하시므로 마침내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하는데 세상에 한 눈 팔지 마시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므로 형통하시며 평탄케 하시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의학저널에 실린 글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환자 하나가 정서불안으로 앉기만 하면 항상 종이를 찢는다고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여러 병원을 전전했습니다. 어떤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과거의 상처를 중심으로 질문했습니다. “혹시 어렸을 때, 종이 뭉치로 뒤통수 맞은 적 있나요?” “없는데요” 또 다른 병원에 갔습니다. 

그 의사는 환경적인 요인이 문제인지 알아보려고 애썼습니다. “혹시 어렸을 때, 종이공장 근처에 살지 않았나요?” “아니오.” 이렇게 여러 정신병원을 찾았다가 마지막으로 한 정신병원에 갔습니다. 의사가 물었습니다. “왜 오셨나요?” “저는 앉기만 하면 종이를 찢습니다.” 이에 의사가 단호한 어조로 “종이 찢지 마!” 라고 말하자 그 다음부터 그는 절대로 종이를 찢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제의 해결은 복잡한 데 있지 않습니다. 형통하게 사는 길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단순합니다. 그 말씀을 단순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형통하는 삶을 위해, 그리고 영적 전쟁에서 항상 승리하는 삶이 되도록 성령의 칼,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