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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앞에서 (느 12:27-43)

첨부 1


하나님 앞에서 (느 12:27-43)
  

들어가는 말

엊저녁 우리교회는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류태영 박사가 오셔서 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분의 어린 시절 얼마나 가난했는가 하면, 나무기둥이 없는 움막집에서 살았답니다.
아버지는 머슴살이, 어머니는 식모살이.
그는 5남매 중 셋째인데 초등학교에 들어간 것이 그 집안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4촌 ,6촌 중에 아무도 초등학교에 입학해본 사람이 없었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5년 동안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18살 때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덴마크, 이스라엘에 유학한 후 약관 36살에 대통령 보좌관으로 새마을운동을 기획하고, 추진하였습니다.
그는 건국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는 말끝마다 ‘하나님이 하셨어요.’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입니다.
수많은 방해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의 성벽은 완공되었습니다. 
자원하는 사람들로 그 성 안에 살 사람도 결정되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내용이지요?
이제 남은 것은 봉헌입니다. 
여기저기서 예루살렘 성벽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느헤미야 12장 27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여러분은 예루살렘 성벽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어떻게 지은 성벽입니까?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의 위협과 방해를 아시잖아요?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리라.’고 한 암몬 사람 도비야의 저주를 들었잖아요? 
무거운 돌을 기중기도 없던 시대에 사람들이 들어 올린 것입니다. 

바닥이 평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기드론 골짜기에는 가파른 절벽 위에 성벽을 쌓았습니다. 
52일 만에 성벽을 완공했습니다.
그 성벽을 하나님께 봉헌하기 위해 백성들이 모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사글세와 전세살이로 전전하다가 각고의 노력 끝에 자기 집을 마련했습니다.
그 입택의 기쁨을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그 기쁨이 지금 성벽봉헌을 하는 이스라엘백성의 기쁨이라고 할까요?

본문을 읽으며 성벽봉헌에서 인상적인 단어 세 가지를 별견했습니다.
‘감사’, ‘정결’, ‘즐거움’이란 단어입니다.
이제 그 단어들이 주는 의미를 새겨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감사 찬송’

31절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성벽봉헌에 ‘감사 찬송’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31절 외에 ‘감사 찬송’이란 단어가 몇 군데 더 나옵니다.
38절 “감사 찬송하는 다른 무리는 왼쪽으로 행진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과 더불어 그 뒤를 따라 성벽 위로 가서 화덕 망대 윗길로 성벽 넓은 곳에 이르고”
40절 “이에 감사 찬송하는 두 무리가 하나님의 전에 섰고 또 나와 민장의 절반도 함께 하였고”

그들이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예루살렘 성벽을 쌓았습니까? 
느헤미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입니까? 
누가 느헤미야의 마음에 무너져 들짐승의 소굴이 된 예루살렘을 향한 아픔을 느끼게 했습니까? 
누가 굳은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였습니까? 
누가 백성들의 마음에 예루살렘을 향한 애틋한 마음으로 적극 협력하게 했습니까? 
누가 산발랏, 도비야의 악한 음모를 극복하게 했습니까? 

누가 백성들을 감동시켜 수문 앞 광장 앞에서 회개하게 했으며, 누가 그들로 하여금 말씀 앞에서 옷을 찢게 했습니까? 
누가 위험하고 불편한 예루살렘에서 살기로 자원하게 했습니까? 
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린 것입니다.
느헤미야 6장 16절은 느헤미야서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바로 그런 이유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얘기 하나 하지요.
아빠가 쉬는 날을 이용하여 정원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돌을 움직여 계단을 만들고 그 사이에 꽃을 심었습니다. 
돌멩이 하나만 해도 무게가 상당하기에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빠를 신경 쓰게 한 것은 다섯 살 먹은 딸이 자기도 무엇인가 하겠다고 덤비는 것이었습니다. 
아빠는 딸이 위험하기도 하고, 거치적거리기 때문에 엄마에게 가라고 말했지만 딸은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도 뭔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빠는 할 수 없이 아빠가 돌을 옮길 때 손만 살짝 올려놓으라고 말했습니다. 
하루 내내 아빠는 돌을 옮겨 계단을 만들었고, 딸은 옆에서 따라다니며 손을 올려놓았습니다. 

드디어 일이 끝났습니다.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딸이 엄마에게 뛰어가더니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엄마, 내가 정원 만들었어요.” 
그때 아빠가 옆에서 웃으며 말했습니다. 
“맞아, 여보, 우리 딸이 큰일을 했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역하는 이치입니다.
우리는 다만 순종할 뿐입니다.
일은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빚진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롬1:14절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다 내가 빚진 자라.”
사람들은 두 종류의 삶의 자세를 갖습니다.
빚진 자의 자세와 빚 준 자의 자세입니다.
빚진 자의 자세란 ‘나는 과분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그는 나라에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그는 교회에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그는 이웃에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그는 가정에 빚진 자로 살아갑니다.
그는 말끝마다 “많은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참 많은 은혜를 받았지요. 이 빚을 언제나 다 갚을 수 있을지........”
그는 감사함, 고마움, 미안함, 죄송스러움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반면 빚 준 자의 자세란, ‘나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도 봉사한 만큼 축복하시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직장도 자기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교회도 자기 은사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웃도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가족들도 자기희생만 요구하고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피해의식, 섭섭함, 불만, 불평, 원망으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요?
여러분은 어떤 태도로 인생을 살아갑니까?
빚진 자로 감사하면서 살아갑니까 아니면 빚 준 자로 불만으로 살아갑니까?

그렇습니다.
삶을 뒤돌아보니 우리의 지식으로, 경험으로, 능력으로 한 일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삼상7:12절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에벤에셀!
바로 우리의 고백입니다.

2. ‘정결’

30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벽을 봉헌하면서 갑자기 자기 몸을 정결케 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섰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드러나는 것이 죄요, 그것 때문에 생기는 것이 죄책감입니다. 
죄책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자연스럽게 느끼는 피조물의 감정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죄인은 죄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나아올 때마다 ‘아하, 내가 죄인이구!’하고 자신의 죄인 됨을 통절히 느끼십니까? 

한번은 테레사 수녀를 매일 욕하고 다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실도 아닌 이야기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퍼뜨리고 다녔습니다. 
제자 중의 하나가 보다 못해 말했습니다. 
“수녀님, 험담을 하고 다닌 그 사람을 불러 나무라세요.” 
테레사가 말했습니다. 
“나는 내 죄가 하도 많아 다른 사람의 죄를 바라볼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뢰셀이란 사람이 말했습니다.
“성인은 우리보다 더욱 자주 회개하는 죄인이다.”

‘은혜’라는 말을 한 번 생각해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어떤 행위로 인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의 실수, 죄, 실패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또 미래에 죄지을 가능성 때문에 자기 구원을 불안해합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근거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믿느냐? 안 믿느냐?’라는 믿음에 근거되어 있다고 하지 ‘선하냐? 악하냐?’는 행위에 근거되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는 언제였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는 죄인이었을 때였습니다.
의인이었을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떳떳하게 나설 때가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스톰스( storms)박사라는 분은 은혜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은혜란 당신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당신의 무 공로로 잃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우리의 선함과 ‘자랑할 것’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것이 건강이든 장수든 부귀든 구원이든 간에 은혜일 수 없다. 은혜는 우리의 잘 잘못을 따지지 않고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놀라운 은혜 주심을 감사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무공로로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에베소서 2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본래 ‘왕이 계신 어전으로 데리고 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데리고 하나님께로 데리고 갑니다. 
우리는 오로지 그로 말미암아, 그로 인하여, 그와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저 가는 것입니다. 
큰 죄를 졌지만 거저 가는 것입니다.
어제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282장이 생각나서 혼자 여러 번 불렀습니다.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주 보혈 흘려주시고 또 나를 오라하시니 주께로 거저 갑니다.” 

3. ‘즐거움’

43절 “이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즐거움’을 영어로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하나는, 'pleasure'입니다.
다른 하나는, ‘rejoice'입니다.
‘pleasure'는 바깥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입니다.
대학에 합격했다거나, 진급했다거나, 집을 샀다거나, 결혼을 했다거나, 돈을 벌었다거나, 당선되었다거나..........

아무튼 바깥으로부터 오는 어떤 조건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즐거움은 일시적입니다.
조건이 사라지면 없어지는 즐거움입니다. 
반면 ‘rejoice'는 성경이 말하는 즐거움입니다. 
성경의 즐거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만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을 아홉 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옥중 서신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는 ‘기쁨’이란 단어를 아홉 번이나 썼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 기쁨은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즐거움은 상황에 관계없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출처가 다릅니다. 
이런 기쁨을 누리길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지난주에 ‘아직도 살기에 불안하고 불편한 예루살렘에 누가 살 것인가?’라고 자원자를 모집하는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헌신적인 사람들이 자원하여 예루살렘에 살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불안과 불편을 감수하고 자원한 사람들이 11장에서 12장 한 장이 지나자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43절에만 ‘즐거워했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크게 즐거워하게”,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받는 축복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현재의 아픔은 미래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은 성벽봉헌에 나타난 인상적인 세 단어를 통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가 고백할 때 여러분은 아멘으로 화답해 주십시오.
‘우리는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갑니다!’ 아멘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죄인 됨을 통절히 느끼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거저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아멘. 
‘우리 마음에는 이 세상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참 기쁨이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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