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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라에서 엘림으로 (출 15:22- 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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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에서 엘림으로 (출 15:22- 출 16:1)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죄와 사탄의 지배에서 건져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늘에 속한 자이고,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그 결과 성도는 이 세상을 나그네요 순례자로서 살게 됩니다(벧전 2:11). 이러한 성도의 삶은 주님 앞에 갈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을 힘입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때 비로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성도의 삶의 과정을 매우 실감나게 보여주는 장면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40년간의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일 것입니다. 험한 광야에서 시련을 당하고 울부짖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고 함께 찬양하는 여러 가지 모습은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넌 후 그곳을 떠나 시내반도 초입의 수르 광야에 이르렀으나 물이 없어 곤욕을 치르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광야 생활 내내 드러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상호 관계의 기본 패턴을 발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소하고도 일시적인 고통에 연연하여 출애굽의 근본 목적 자체를 아예 원천적으로 거부하였지만, 하나님은 끝없이 그들에게 인내하시며 그들이 필요한 것을 넘치게 공급하심으로써 그들을 계속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가나안으로 가는 중입니다. 가나안은 일찍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단련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도들에게 시련과 단련을 통하여 하늘 백성으로 성숙시키십니다. 

마라에서 엘림으로!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교훈의 말씀, 위로의 말씀을 받기 바랍니다. 

1. 마라의 쓴 물을 만남 (= 성도의 시련) 

22절=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절=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간 이스라엘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시련은 목마름의 고통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었지만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라까지는 53km 정도의 거리인데, 노인과 어린이들이 포함된 약 200만 명의 무리가 많은 가축들을 거느리고 식량과 가재도구를 가지고 거칠고 험한 광야 길을 여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지고 있던 물은 모두 고갈되었는데, 겨우 도착한 곳에는 너무 써서 마실 수 없는 물밖에 없었습니다.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 홍해를 갈라주신 하나님 -- 그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왔는데도, 그들 앞에는 뜻밖에 마라의 쓴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성도들의 삶에 시련이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마라의 쓴 물은 성도 앞에 놓여 있는 시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마라의 시련은 홍해의 성공 직후에 찾아왔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공한 인생에도 마라가 찾아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에서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의 애굽 군사들을 모두 바다에 수장(水葬)시키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삼일 길을 헤매어도 물을 얻지 못하는 매우 원초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걸어가야 하는 길에는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시련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의 쓴 물을 만난 것은 백성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라로 가는 길에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고 모세와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의 인도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모든 환경 속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신앙적으로 더욱 성숙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 40년 동안 시련을 주신 목적 중 하나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왜 자기 백성에게 어려운 시험을 주시고 연단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성화(聖化)의 주체가 되신다고 교훈합니다(고후 7:1, 살전 5:23). 따라서 성경은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고난과 역경을 견뎌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롬 5:1-4).

그러므로 성도는 구원받은 자신에게는 시련과 어려움이 없을 것이란 안일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오히려 닥치는 시련을 통해서 더욱 더 온전한 자로 성숙될 수 있음을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2. 쓴 물을 달게 하심 (= 승리의 비결) 

25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광야에서 삼 일을 헤맨 이스라엘은 마라에 이르러 물을 찾았으나 써서 마시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달게 하여 마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 가운데 당하는 어려움, 슬픔을 기쁨으로 변하게 하는 비결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백성들이 당시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4절=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시점이 홍해의 기적으로 인한 찬양의 감격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들은 3일 전만해도 하나님을 경외했고 모세를 믿었고 사기 충천했습니다. 그런데 환경이 조금 변하여 갈증이 나고 육체가 피로해지자 곧 불평과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여기 ‘원망’(룬)은 ‘고집세다’ ‘밤새워 머물다‘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백성들은 밤을 새워가며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물론 갈증의 고통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아직 노예근성이 남아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평은 단순한 투정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 이것은 백성들 사이에 모세의 권위에 대한 반역적 상황이 연출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출애굽 직후부터 노예적 삶과는 비교도 안 될 풍요롭고 자유로운 상황이 연출될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물조차 온전히 마시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모세의 지도자로서의 역량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회의(懷疑)를 갖게 되었고, 대적하듯이 그를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능력을 경험하면서도 조그마한 역경에 부딪칠 때마다 불평과 원망을 쉽게 터뜨리고마는, 간교하고 변덕스러운 인간의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정말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이처럼 모자란 백성들을 위하여 그는 지극히 괴롭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지도자답게 불평하는 백성들과는 달리 인간적인 감정과 행동으로 대처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지혜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날 때 문제의 해결 방법은 모세처럼 먼저 여호와께 아뢰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에 즉시 응답하셨습니다.

25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나무를 쓴 물에 던지니 놀랍게도 물이 달아졌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 쓴 물을 달게 할 방법을 준비하고 계셨으며 언제든지 그들이 기도하기만 하면 달게 하실 수 있으셨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를 시험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피할 길도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 ‘한 나무’ 는 나무 자체에 무슨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기적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고, 그 기적을 일으키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왕하 2:19-22). 그리고 이같은 이적(異蹟)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고난과 아픔을 치료하시는 유일한 치료자가 되심을 계시하셨습니다. 

26절=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우리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종 모세를 원망할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까지 원망한 어이없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로 묘사하면서, 자기 백성들을 모든 질병에서 자유케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실로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구약 내내 계속 지켜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약속대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여러 가지 육체적인 질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마 8장, 막 7장, 요 5장). 그리고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사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심으로 우리의 영적 질병까지도 고쳐주셨습니다(요일 4:20).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당신의 자녀로 부름받은 성도의 아픔을 치료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의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켜 줄 한 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나아가 이 나무는 만국을 치료하며 죽은 생명을 소생시키는 하늘나라의 생명나무를 예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쓴 물이 있습니다. 인생에 찾아오는 온갖 슬픔과 근심과 고통과 죽음 등은 모두 우리 인생을 괴롭게 하는 쓴 물들입니다. 불가에서는 이것을 ‘백팔번뇌’라고 하는데, 인생은 결코 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에게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죄로 오염되어 선한 것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인생이 과연 어디에서 안식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인생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 인생의 쓴 물을 단물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우리의 죄 문제의 해결책이 되었고, 하나님과의 화목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생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줍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고, 근심이 변하여 찬송이, 고통이 변하여 희락이 되게 하는 능력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쓴 물로 인해 고통 중에 있다면 주님의 십자가를 받으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순간 여러분은 달고도 시원한 구원의 생수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3. 엘림의 오아시스를 준비하심 (= 시련후의 위로) 

27절=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가나안으로 향한 멀고도 험한 여정에 오른 이스라엘 백성은 마라의 쓴 물을 만나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했고, 이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오아시스인 엘림에 당도했습니다. 엘림에는 물샘 12개와 종려나무 70그루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엘림이 12지파와 70장로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곳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시련을 당한 백성을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엘림은 마라 남쪽 10km 지점에 있는 오아시스인데,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지역은 어느 지역에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엘림은 과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비참한 삶을 보낸 것과 대조적으로 장차 그들이 영원히 머물게 될 언약의 땅 가나안을 예견케 합니다.

성도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이스라엘이 여행하던 광야와 같이 거칠고 험합니다. 하나님은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을 위해 많은 것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뿐입니까? 주님은 우리의 하늘 처소를 준비하고 계시며(요 14:2), 선한 싸움울 싸우는 성도들을 위해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두셨습니다(딤후 4:8).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이 사실을 확실히 믿고 소망할 때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을 능히 견디며 이길 수 있습니다. 굳건한 천국 소망으로 무장한 성도는 마라의 쓴 물 정도는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엘림이 좋았지만 거기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약속의 땅 가나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림을 떠나자마자 신광야로 나왔는데, 그곳은 그들의 입에서 또 불평불만이 터져나올 만큼 거칠고 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엘림을 떠나야 했습니다. 

여러분이 가야할 가나안은 어디입니까? 혹 가나안을 잊고 엘림에 주저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가야 합니다. 엘림이 좋아도 엘림에 머물면 안 됩니다. 12샘이 있고 70그루 종려나무가 있는 오아시스라 하더라도 꿈의 가나안을 향하여 떠나야 합니다. 이것이 꿈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미사일은 비행기에서 나온 가스를 따라 움직이며 드디어는 그 비행기를 폭파시키고 맙니다. 
벌은 꿀만 따라 움직이면서 마침내는 그 꽃 속에 들어 있는 꿀을 따내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생활에 오직 가나안을 향하여 움직였습니다. 그들의 오직 하나의 꿈은 가나안이었습니다. 

키엘케골의 철새 비유를 아십니까? 겨울이 되자 철새들은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한참 날다 보니 배가 고팠습니다. 철새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땅에 있는 옥수수 밭에 앉아 옥수수를 맛있게 배불리 먹었습니다. 

새들은 다시 남쪽으로 날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새 하나는 떠나지 않으며 말합니다. “이 맛있는 옥수수를 두고 어찌 오늘 떠나랴. 좀 더 먹고 내일 떠나리라.” 

이튿날이 되었습니다. 그 철새는 똑같은 소리를 하였습니다. “이 맛있는 옥수수를 두고 어찌 오늘 떠나랴. 좀 더 먹고 내일 떠나리라.” 자꾸만 내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첫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정말 떠나리라.” 철새가 외치며 날개를 힘차게 저었을 때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맛있는 옥수수를 먹으며 놀기만 하여 날개에 살이 너무 많이 붙어 날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그 철새는 눈 속에 파묻혀 죽고 말았습니다.

좋은 곳에 주저앉아 목적을 잃어버리고 만 인생은 이 철새와 같습니다. 엘림이 아무리 좋아도 약속의 땅을 향하여 움직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새하늘과 새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천국 비전을 견고히 붙들어야 합니다. 

교육자이며 철학자인 죤 듀이박사가 90세를 맞는 날 한 청년기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같이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좋겠습니까?” 

“산에 오르게.” “산에 올라가 무엇을 합니까?” “다시 오를 산을 보기 위해서라네.” 듀이 옹은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산에 오를 흥미가 없어지면 자네도 죽을 날이 가까워 온 거야.” 

비전이 없으면 산송장이라는 충고였습니다. 믿음과 비전 속에 사는 사람은 힘이 솟구치게 되어 있습니다. 비록 우리 앞에 험한 신 광야가 가로놓여 있더라도 우리는 지금 이곳, 엘림을 떠나야 합니다. 그래야 가나안까지 갈 수 있습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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