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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명령 (엡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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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명령 (엡 4:1-6)


‘목회자의 목회자’라고 불리는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The Unnecessary Pastor’라는 책을 쓰셨는데, 우리말로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 라는 좀 과격한 제목으로 출간하였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에 의하면 껍데기 목회자란 어떤 목회자냐면 열심히 설교하고 심방하고 상담하고 교인 훈련시키고 교회를 성장시키려하는 목회자입니다. 저를 포함한 한국의 대부분 목회자들은 이런 유형에 속해 있습니다. 

이런 목회자가 왜 껍데기 목회자입니까? 목사가 예수님을 대신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목회자일수록 목회자 자신이 교인들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스스로 교회 안에서 자신이 상당히 중요한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목사 자신이 교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말하는 좋은 목회자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잘 처리하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사람입니다. 교인들의 아픔을 다 알아 주고 자신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중보기도해서 평안한 길로 인도하는 목회자를 말합니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신령한 목회자를 만나 그를 통해 대리 만족을 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성숙한 신앙생활을 목회자를 통해서 위안을 받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성장과 경험을 외부의 힘과 사람을 통해서 얻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의지합니다. 외적인 어떤 신앙의 경험에 의존합니다. 어디에서 신령한 말씀이 있다고 하면 쭈르르 몰려 다닙니다. 어디에 능력이 나타난다고 하면 머리가 터지도록 달려듭니다. 그러나 보름이 못가서 다시 허전한 모습으로 제자리 걸음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무익함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좋은 목회자라고 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정말 필요한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필요한 일이란 목회자 자신도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교인들도 목회자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경험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에게 집중하고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가장 놀라운 축복은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 부분에 있어서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1-3장의 내용입니다. 지난주까지 우리들이 살펴 본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고 그 분을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부분입니다. 4-6장의 내용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면 1-3장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장 1절의 첫 단어가 ‘그러므로’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말하면서 3절에서 그 합당한 일이 ‘평안의 매를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하며 ‘하나 되는 것’ 임을 말합니다. 

사단을 헬라어로 ‘디아볼로스’라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디아’ 우리말로는 ‘사이’라는 헬라 단어와 ‘발로우’ 우리말로 ‘던진다’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즉 사단이라는 말은 ‘둘 사이를 갈라 놓는다. 사이에 틈을 낸다’ 는 뜻입니다. 사단은 하나가 되고, 통일이 되어 있는 상태를 갈라 놓습니다. 좋은 관계를 분열 시킵니다. 사단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 선악과를 따 먹게 한 이후에 나타난 현상은 분열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분열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열입니다. 사람과 자연 사이의 분열입니다. 세계 역사와 어느 공동체, 가정, 개인의 삶 안에 일어나는 분열의 배경에는 어김없이 사단의 영적인 흐름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하게 행해야 할 것에 대해 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 될 것을 강조하기 위해 4-6절에서 성령님, 성자님, 성부님이 하나 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라는 말을 일곱 번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 됨의 근거를 일곱 개나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분열시키려고 하는 사단의 유혹을 극복하고 하나 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네 가지 성품을 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관계와 교제가 깨지는 아픔을 겪을 때마다 반드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네 가지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중에 누군가가 겸손하지 못했고, 누군가가 온유하지 못했고,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오래 참지 못했고, 더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자신의 몸을 낮추는 것입니다. 온유가 무엇입니까? 온유는 유약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세는 강한 사람이었지만 온유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성경적으로 온유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통제하는 힘입니다. 겸손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자세라면 온유는 내적인 상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 예수님의 성품이 학습되면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 됨을 위해 학습해야 할 또 다른 예수님의 성품은 오래 참음 즉 인내와 용납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평화가 깨어지는 가장 큰 원인은 참지 못하고 서로를 수용하지 못하는 급한 마음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우리 사회 속에서도 소통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생각과 선택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통이 되지 못하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을 때 우리에게 진정한 ‘하나 됨’의 상태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 됨의 은혜가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이뤄지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요한복음 9장과 마가복음 8장에 각각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치유를 경험합니다. 두 사람이 만나 대화 하는 장면을 가상해 봅시다. 요한복음 9장에서 치유 받는 사람은 예수님은 내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고 그 결과로 나는 빛을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물로 씻으심으로 소경을 치유하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8장에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은 그렇게 치유하실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 경우에는 진흙이 아닌 내 눈에 침을 바르시고 내게 광명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치유 경험을 두고 두 사람은 분열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을 동일한 주님이 치유하셨다는 것입니다. 치유의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치유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치유 방법을 기준으로 이야기를 하면 다른 방식이 중심이 됩니다. 자신의 경험이 최고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을 통해 두 사람을 치유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선택한 방법을 가지고 두 사람을 각각 치유하셨다는 사실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치유자 되시는 예수님께 시선이 모아질 때 두 사람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비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논쟁하게 하고 분열하게 합니다. 내가 경험해서 알고 있는 내용만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무엇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생각하면 생각이 하나로 모아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를 하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분열되고, 논쟁 하고 다투는 것은 쉽습니다. 내 생각을 중심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하고 싶은 행동을 다 하면 어김없이 다툼이 일어나고 분열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하나가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영의 욕구와 육의 욕구를 하나로 만들어 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가족 간의 갈등과 아픔을 서로가 품는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 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교회도 다른 생각들을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만들어 같은 방향을 향해 힘을 모아 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3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합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 ‘힘쓰라’ 고 말합니다. ‘힘써’라는 말의 원어는 ‘속히 무엇인가를 위해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평화가 올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본성을 바뀌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유전자적인 문제이고 어렸을 때부터 이미 몸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 안에서 그 본성이 바뀔 수 있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뀌어야 한다고 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본성은 안 바뀐다는 말에는 그것을 바꾸려 하니 너무나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그냥 이대로 살고 싶다는 바램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육체의 체질을 바꾸기도 어려운데 마음의 뿌리를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너무나 어려우니까 본성은 안 바뀐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가 되는 것보다 분열되게 하는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의 속성이고 이것은 사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분열과 다툼을 극복하고 하나로 만들어 가려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힘써’야 됩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성품을 중심으로 나를 다듬고, 가정을 다듬고, 교회를 다듬는 것입니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힘쓰는 것입니다. 

평안은 하나 되게 하기 위해 매는 줄입니다. 하나 되게 만드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될 때 평안합니다. 마음이 나누어지면 염려, 근심, 걱정이 찾아옵니다. 가정의 평안도, 교회의 평안도 마음이 하나가 될 때 이루어집니다. 고 한경직 목사님은 ‘교회는 싸우지만 않으면 부흥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싸우고 갈라지게 하는 것은 마귀의 전략입니다. 따라서 부름 받은 자들은 평안으로 하나 되기에 오로지 힘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의 줄로 하나가 되는 일에 부름을 받은 우리들이 우리 삶의 영역을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로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복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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