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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십자가의 도의 능력 (고전 0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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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나 전도의 핵심 내용도 십자가의 도가 그 중심이 되어야 합니 다.
제이 스디로우 박스터는 "교회가 도덕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설교할 때 우리 사회의 도덕은 회복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복음을 증거한 아테네에서는 교회를 설립하는데 실패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교회 설립에 실패한 이유가 복음전파의 내용이 너무 철학적이고 고도의 학문 지향적인 것이었기 때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고린도와 다른 곳에서는 복음전파의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그때부터 바울 사도는 설교할 때나 무엇을 전할 때에는 자신의 철학이나 생각을 섞지 않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 만으로 전하기로 결심하고 일평생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십자가의 의미1) 헬라어
히스테미-(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붙잡다, 거하다, 지적하다, 가져오다, 이룩하다.
스타우로스-막대기, 기둥 십자가(최고형을 집행하는 도구로서), 죽음의 위험에 노출 됨, 즉 자기 부인;함축적으로 그리스도의 속죄.

2. 영어 Cross. 옛날 서양에서 죄인을 사형하던 십자가 형틀.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케 하실 때 달리신 형틀.
3)기독교적 의미:기독교의 상징, 예수께서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신 고난의 십자가.
이 십자가에 깊은 도가 들어 있다.
십자가의 도는 인생을 구원하는 복음의 진리요,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로 십자가의 능력을 따라 살도록 가르쳐 주신 사실을 전하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로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그 하나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여기 미련하게 보는 사람들 중에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유대인들의 착각 입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거리끼는 것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고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1:23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고 한 말씀에 근거를 두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당시 많이 있었던 사형 제도였는데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방법이었습니다.
로마의 씨세로는 "십자가라는 이름 조차도 로마 시민의 몸에서 멀어지게 하라. 심지어 그의 생각, 그의 시야, 그의 청각으로부터도 멀어지게 하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데 무참히 십자가에서 죽어 버린 예수를 하나님의 택하신 자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적인 기적으로 민족 구원을 이루는 묵시 문학적인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헬라인들의 착각 입니다.
그들 역시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게 보여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헬라인의 철학으로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은 감각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헬라인들은 지혜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아름다운 궤변론자들의 말에 취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조잡하고 교양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들렸던 것입니다.그러니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습니다. 결국 멸망의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유대인이나 헬라인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자신의 구원의 도구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도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1.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입니다.
영국 스코트랜드의 수호 성자로 존경받는 까알스는 원래 아덴의 한 왕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는 모든 부귀 영화를 버리고 깊은 산 속으로 가서 수도 생활을 했습니다. 까알스가 왕궁을 떠날 때 한 마리의 암사슴이 그를 따라갔습니다. 까알스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던 옛정을 생각해서 함께 데리고 갔던 것입다다.
어느날 까알스가 수도 생활을 하고 있는 산으로 불란서의 왕이 사냥을 나왔습니다. 마침 왕의 눈에는 까알스가 애지중지하며 키우던 암사슴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순간 왕은 재빨리 암스삼을 향해 활 시위를 당겼습니다. 기도하던 까알스는 화살이 자기의 암사슴에게로 날라오는 것을 손으로 막았습니다. 왕은 까알스의 손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는 순간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후로 왕은 동물을 죽이게 되는 사냥하는 습관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화가 스턴벅이 한 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는 모습을 그리기로 결심하고 성경을 언구했다 절반쯤 그린 후 한 번은 거리에 나가 다니다가 어떤 여자를 만나는 순간 그 여자를 그릴 생각이 났다. 그녀에게 허락을 받고 자기 방에 데리고 와서 그리기 시작했는데 잠시후 이 여자가 "저 사람은 저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을 보니 필경 죄를 많이 지은 모양이군요."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화가는 깜짝 놀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분은 죄가 없으신데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못박힌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여자가 듣더니 "정망 그렇다면 그 분이 당신의 죄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스턴벅은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후 간절히 기도를 시작했고 마칠 때까지 눈물로 그림을 완성했다.

십자가는 죄된 생활을 깨닫게 합니다.
아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려고 자기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는 아버지의 방법이 십자가입니다. 여기서 깨닫고 죄를 회개하여 돌이키는 것은 자기가 벌을받을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얼아마 불효임을 깨닫는 근본적인 자각인 것입니다.

2.죄를 씻어버리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의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보혈로 인하여 우리의 죄는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십자가는 죄사함을 의미합니다.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도말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이 의인의 반열로 들어가게 된 위대한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성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신 사랑의 증표요 싸인 입니다. 십자가가 우리 곁에 있는 한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거듭났다는 구원의 확신과 죄책감에서 해방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죄악를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어떻게 다시 죄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려서 피와 땀을 흘리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어떻게 예수님을 배반할 수가 있겠습니까
죄악을 저지르는 것은 마귀의 유혹에 내가 동의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과 시련이 너무 크고 심해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는 조용히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의 이 고통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당한 고통보다는 크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을 갖고 새로운 능력으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원천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죄를 지을 때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또 다시 못박히게 하는 것입니다.

4. 고통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 시험과 고난을 참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세번 씩이나 넘어지셨습니다. 바로 그때 이방인 시몬이 주님을 도와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감당할 만큼의 시험한 허락하십니다. 우리의 힘으로 안될 때에는 도움의 손길을 빌어서라도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그 힘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믿음의 힘을 전심을 다해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약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멋대로 살고자 하는 충동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고 손해보는 희생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결단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역사가 없이는 이 세상의 문제는 해결되지 아니합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설적인 진리요 지혜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죽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지혜에 의한 것입니다.
어떤 분이 십자가는 얼마의 거리를 두고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멀리 두고 볼 때는 흉하고 부끄럽고 천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는 흉하고 천한 것이 아니고 속죄와 화해를 이루는 은혜롭고 사랑스러운 십자가로 보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그 십자가를 지게 될 때는 내게 고통이 아니라 승리를 주는 영광의 십자가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사랑하고, 자랑하고, 기쁘게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 저 천국을 향하여 날마다 걸어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두 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고 가야 할 십자가요 또 하나는 날마다 안고 가야할 십자가입니다. 1) 내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신 것처럼 하나님과 교회가 여러분에게 주시는 십자가입니다.
교회에서 주는 직분도 우리가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힘들지만 땀을 흘리면서 감당할 때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칭찬과 상급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내게 지워진 십자가가 너무 힘이 들어서 내가 감당할 능력이 부족하여서 넘어지고 쓰러지려 할 때에 분명히 우리는 곁에서 도와 주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손길을 만날 수 있기 될 것입니다.
S.러더프드-영국의 신학자
새에게 그 날개는 무거운 것이나 그것 때문이 날아가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간다.
신자는 그 십자가가 짐이 되나 그것이 그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여 전진케 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읍니다.
2)또 하나의 십자가는 우리가 안고 있는 십자가입니다.
안고 가는 십자가는 내가 스스로 만들어 가는 내가 만든 십자가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내가 스스로 선택할 길에서 생기는 부스러기 십자가입니다.
가정 주부로서 집안에서 해야 할 일, 남편으로서 가족을 위해서 땀을 흘리면서 부양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안고 가야할 십자가가 마치 하나님께서 주신 지고 가야할 십자가로 착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내 남편을 만난 것이, 내가 내 아내를 만난 것이, 내가 우리 자녀들을 만난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억지로 지워 주신 것들이 아닙니다. 내가 원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들입니다.
안고 가는 십자가도 지고 가는 십자가만큼 귀중한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예화:무겁다고 불평함
어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한 성도가 항상 심중에 `내가 진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 하는 불평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을 올라갔는데 얼마를 힘겹게 가다보니 한 곳에 여러개의 십자가가 있었다.
어디서 음성이 들려오길 "네가 진 십자가가 무겁다고 불평만 하지 말고 여기 많은 십자가 중에서 하나 골라 지라."고 하였다. 그는 이것 저것 살펴보니 번쩍 번쩍 빛나는 조그만 금빛 십자가가 있어 그것을 골라서 등에 졌다. 이 황금으로 된 십자가는 일어서기 조차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 다시 소리가 들리길 "다시 골라 보라"고 했다. 이번에는 역시 조그만 십자가인데 아름다운 장미꽃이 활짝 피어있는 십자가였다. 아름다운 향기도 나고 해서 골라서 등에 졌다. 이 십작가는 무겁지는 않는데 지고 갈 수가 없었다. 가시가 등을 어찌나 찌르는지 할 수 없이 다시 내려 놓았다. 자기의 십자가가 가장 가볍고 좋더란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지고가는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를 지고 고린도를 방문했습니다. 아테네와 같이 자기 학식이 아닌 오직 십자가만을 의지하면서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볼로가 온 후에 고린도가 변했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숭상했습니다. 분열이 생기고 교회 내부가 타락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약화될 때에 교회도 약해졌습니다.
그일이 있고 난 뒤에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만을 믿고 따라 새 삶을 살라고 간곡히 부탁한 말씀이 서신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심벌이며 핵심입니다.
어떤신학자 롱숀은 "십자가 없는 종교는 헛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윌리암 이라는 사람은 “고통이 없다면 승리도 없고, 가시관이 없다면 왕좌도 없고, 신 포도주가 없다면 영광도 없고, 십자가가 없다면 면류관도 없다.”고 했다.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르는 십자가의 사람이 디고 십자가의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고, 안고 가야할 십자가를 끌어 안고 땀을 흘릴 때 위로자이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중심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될 때 참된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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