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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증인들 (고전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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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부활절 주일입니다. 부활절은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기쁜 날이고 소망의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단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으로 멈춰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부활을 친히 새롭게 체험하며,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과 함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기독교 신앙에 중심이 되는 두 기둥입니다. 기독교는 빈 무덤의 종교, 즉 부활의 종교입니다. 약2000년전 예수님께서는 당시 대제사장들을 포함한 악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신을 경건한 사람인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그런데 삼일이 지난 후 이른 새벽 미명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곳은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에덴 동산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고난과 죽음은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은 증거 하기를 롬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바로 그 순간부터 고통과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거주하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죽음만은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아무리 위대한 위인들도, 제아무리 큰 권력을 가지고 세상에 있는 모든 영화를 다 누렸던 사람일지라도 죽음이 찾아오면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돈도, 학식도, 사람도, 권력도 필요 없습니다. 따라서 사망 앞에서는 누구나 약하고 비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나약하며 이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죽음 뒤에 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증거 하기를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또 증거 하기를 (요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있어서 모두들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모든 것이 소멸되고 영원히 살아지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또한 부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도 있습니다.

부활이란 헬라어로 “아니스데미”라고 발음하는데 그 뜻은 잠에서나 죽음에서 ‘다시 일으키다’ ‘다시 살아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활을 믿으려 하지를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후 세계인 내세도 부정합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메뚜기와 하루살이가 하루 종일 논에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날이 저물자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이젠 저녁이 다 되었어.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 이 말을 들은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습니다. "메뚜기야, 내일이 뭐니 어떻게 내일 또 놀자고 하니" 메뚜기는 잠시 후면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모든 동물이 다 잠을 자게 되는데 잠자는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살이는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메뚜기를 향하여 날씨가 무더워져서 메뚜기가 정신이 나갔나 보다고 놀렸습니다. 그 후 메뚜기는 개구리와 온 여름을 함께 놀았습니다. 가을이 오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뚝아, 내년에 만나 다시 놀자." 메뚜기는 내년이 뭐냐고 개구리에게 물었습니다. 개구리는 흰눈이 천지를 뒤덮고 얼음이 얼고 몹시 추워서 모든 개구리가 땅 속에 들어가서 오래 오래 겨울 잠을 자고 나면 다시 따뜻한 봄이 오는데 그 때가 내년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개구리를 보고 날씨가 서늘해지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라고 놀렸습니다. 하루살이나 메뚜기는 내일 혹은 내년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일이나 내년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내일이나 내년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이나 내년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세나 하나님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해서 그 세계를 쉽게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과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세가 있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증거 하기를 (고전15:12-13)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여러 차례 나타나셨습니다. 그 첫 번째가 안 식후 첫날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그후 베드로에게, 그리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와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 그리고 도마와 갈릴리의 제자들 순으로 나타나셔서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계시다가 감란산에서 500여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고전15:3-8에서 증거 하기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 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라고 증거 했습니다.

그럼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역사적인 사실과 또한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고 우리에게는 어떠한 소망을 주는지를 부활의 증인들을 통해서 이 시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째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의 증인을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막15:47에 보면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라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모습만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곳까지 와서 그 마지막 장사지내는 장면까지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요20:1에 보면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에 안치되는가를 확인하는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다시 찾아 왔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그녀가 예수님의 무덤을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찾아 왔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막16:1에 보면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 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막달라 마리아와 그 밖에 여인들이 안 식후 첫날에 예수님의 시신에다가 향유를 바루기 위해서 향품을 사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물론 여인들이 다 같이함께 가서 주님의 시신에다가 향유를 바르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향품을 가지고 혼자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주님의 시신에 발라 드리기 위해서 해가 뜨기전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빈 무덤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입니다.

그녀는 이 사실을 베드로와 요한 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빈 무덤 가에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그가 동산 지기인 줄로 알고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보고 동산 지기가 어디로 옮겨 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다정하게 불렀습니다. 그때 다시 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 막달라 마리아는 너무나 기쁘고 감격했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주님의 시신에 향료를 발라 드리려고 무덤에 왔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묻혀 있다고 생각했던 무덤은 텅 비어 있었고 부활하신 주님은 그 동산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를 찾으셨고 그녀를 향해 “마리아야”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불신의 미몽에서 해맬 때, 무지의 늪에서 좌절할 때, 주님은 고요히 다가 오셔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신 것처럼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거센 세파에 밀려 낙담하거나 절망할 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마리아에게 부활의 신앙을 확실하게 심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부활의 신앙은 초대 교회에 곧 이어 불어닥친 극심한 환난과 핍박을 이겨내게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부활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에게는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리라“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환난과 고난을 인내하게 하고 믿음으로 승리하게 합니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뭐라고 증거 했습니까 요20장 18절을 보세요.“내가 주를 보았다, 내가 다시 사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라고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했고 최초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은 제자들과 도마입니다. 주님은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과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요20:19에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이었습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처음에는 놀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붙잡혀 가실 때 뿔뿔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자기들도 스승처럼 끌려가 처형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더라면 그 두려움에서 해방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안타깝게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 전까지는 세상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을 닫고 숨어 있어도 이들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안히 있을 지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흑시 제자들이 유령이 나타나 착각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목 박혀 상처받은 손을 내미시고 시퍼런 창날에 찔리셨던 역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후에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 사회로부터 받아야 할 수모와 조롱과 박해에 대한 두려움 속에 빠져 있어 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 가운데 갑자기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 제자들은 얼마나 놀랬고 한편으로는 얼마나 기뻐하였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는 없었습니다. 도마가 왜 그 순간 그 자리에 없었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도마가 돌아오자 제자들은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말을 들은 도마는 말하기를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도마의 이 말의 뜻은 “믿을 수 없다”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불 신앙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부정했습니다. 도마가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강력하게 불신한 것은 도마는 다른 제자들보다 그 성격이 대단히 냉철하고 이성적이어서 자기의 눈으로 보지 않고 자기 손으로 만져 보지 않으면 수락할 수 없다고 하는 경험적이고 이성적인 자신의 깊은 철학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20:26-27에 보면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했던 도마는 예수님의 손과 역구리에 손을 넣어 보거나 만져 보지도 아니하고 곧바로 주님 앞에 엎드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도마는 주님이 나타나신 그 사실만으로도 또한 그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도마의 모든 의심은 사라졌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실 도마는 의심이 많은 제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살펴보아도 도마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도마의 신앙을 살펴보면 그는 솔직한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구체적으로 알려고 했었고, 그 자신도 보다 정확하게 알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의심을 하고 질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검증에 검증을 통하여 자기 믿는 바를 확증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믿음은 맹목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맹신하고 맹종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보다 정확하게 알고, 바르게 믿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에게 주님은 확실한 부활의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눅24장 13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신뢰하고 사랑하던 그 주님이 대제사장들에 의하여 체포되어 빌라도에 의해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광경을 목격하자 이들은 깊은 절망 속에서 납심에 잠겨 엠마오 고향 집을 향하여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눈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어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눅24:17)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슬픈 빛을 띠고 그중 한 사람인 글로바라 라고 하는 제자가 “당신은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무슨 일이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사렛 예수의 일이요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고 합니다.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들 두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감히 그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일 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소망을 잃어버린 체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 신앙의 상태에 있는 두 제자에게 주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아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이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함께 동행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큰 기쁨으로 부활하신 주님께 경배하고 다시 그들은 제자들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갔습니다. 이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 감격을 나누기 위하여, 이 위대한 소식을 그들과 더불어 나누기 위하여,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영적인 의미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은 모든 꿈과 소망이 상실된 길입니다.
그 길에는 깊은 슬품과 허무와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성도된 우리들도 종종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을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사업을 위해서 모든 정열을 받쳐 희생을 각오하며 노력은 했지만 불의한 세력을 만나 허사가 될 때, 또한 진실함과 희생으로 수고하고 봉사를 했는데 뜻하지 않는 오해와 배신으로 갚음을 받을 때 우리는 이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동행하여 주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일로 인하여 불의한 세력들에게 밀려 낙심하는 길에, 절망하는 길에, 슬 품으로 눈물 흘리는 길에서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키시고 나를 축복하시며 내 곁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동행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수제자이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 부인했던 베드로가 부활의 증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부활하신 예수님과 시몬 베드로의 만남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 만남의 현장은 디베랴 바다가 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이 만남이 있기 전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과 함께 보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때마다 예수님께 말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기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깊은 죄 의식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의 곁을 떠나 옛날에 하던 대로 고기를 잡기 위해 디베랴 바다로 갔습니다. 그는 어느 제자들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의 얼굴을 빕울 면목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제자들과 함께한 만찬의 자리에서 사랑했던 제자 베드로에게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호언 장담하기를 눅22:33에서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막14:31에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마26:33에서도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눅22:54이하에 보면 예수님을 잡아 대제사장 집으로 끌고 갈 때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 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뜰 가운데서 불을 피우고 있는 곳에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그런데 한 계집이 베드로를 주목하여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라고 하니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너도 그 당이라’ 라고 하자 ‘이 사람아 나는 아니다’ 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말하기를 ‘이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노라’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라고 하자 닭이 곧 울었습니다. 그리고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을 했습니다.

제자 중의 수제자인 그는 누구보다도 주님의 남다른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가 없었고, 주님의 시선을 감히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의식적으로 주님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하던 대로 고기 잡으로 바다로 갔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디베랴의 이른 새벽에 그를 찾아오신 주님은 한 마디도 이 제자를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책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배신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주님은 베드로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요한 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씩 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옛날처럼 장담하지 못하고 “주여 모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내 양을 먹이고 치라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의 사실을 모든 제자들에게 증명하셨고, 직접 찾아가서 사명을 주셨으며, 말씀을 깨닫게 하셨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을 위로하셨고, 사십일 동안 계시다가 오백여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란산에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어서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었다는 사실이 증명이 된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또한 그 분 자신이 피조물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면 절대로 장사지낸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역사적인 사건은 예수님 자신에게 있어서도 참 하나님이 되심을 피조물들에게 증거 하는 것이므로 영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영생의 신념을 확고하게 하는 증거적 가치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곧 우리의 부활이 된다는 것입니다. 롬6:4-5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또한 골2:12에서도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했으며, 그리고 마지막 때 우리가 다함께 무덤에서 일어난다고 살전4:14-17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부활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이고, 또한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영생의 부활의 소망과 속죄함에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있어서 부정과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은 마치 하루살이처럼 내일을 모르고, 메뚜기처럼 내년을 모르고 있는 인생들입니다.

인간에게는 부활체가 있고 그리고 그 부활체가 영생할 내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영생의 축복과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소망의 기쁜 날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과 여러분들 가정과 우리 교회가 부활의 신앙으로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는 진정한 하늘의 백성과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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