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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을 듣고(1) (느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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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에스라와 느헤미야 두 지도자를 가리켜 “그들은 왕관을 쓴 사람들도 아니었고 군대를 지휘하거나 어느 나라를 정복한 사람들도 아니었다.그리고 철학이나 웅변으로 명성이 높은 자들도 아니었다.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기 시대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었다.그러나 그들은 그 당시 헬라를 빛냈던 크세노폰(Xenophon)이나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나 또 플라톤(Platon)보다 훨씬 훌륭하고 영예로운 지도자들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활동하던 시기는 바벨론을 멸망시킨 신흥 국가 페르시아의 전성기였던 때였고 헬라와 로마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적인 지도자로서 활동했고,느헤미야는 행정적인 지도자로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들이었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신앙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 만에 해방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긴 했습니다만 어려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적으로는 예루살렘을 너무나 오래 떠나 있었기 때문에 신앙이 해이해져 있었고,정치적으로는 지도 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데서 오는 불안정과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을 재건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긴장하고 방해 공작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이 성을 재건하고 전열을 정비하게 되면 중동의 세력 판도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에스라는 신앙적으로 이스라엘을 결속시키고 무장시켰으며,느헤미야는 백성을 총지휘하며 한 손에는 무기를 들고 다른 손에는 연장을 들고서 싸우며 공사하는 총력 체제로 성을 재건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에스라가 백성들이 모인 가운데 모세의 율법책을 백성들이 들을 수 있도록 낭독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9절 말씀을 보면 백성이 그 말씀을 듣고 다 울었다고 했습니다.
우린 이 이야기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1.백성들의 자발적인 요청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1절을 보면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라고 했습니다.
그날은 7월 초하루로서 이스라엘이 성회로 모이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날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 생활중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 남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배하고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모든 백성은 드넓은 수문 앞 광장에 자발적으로 모여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고 요청을 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태도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억지로 마지못해 듣는 태도이고,다른 하나는 자원해서 듣는 태도입니다.다시 말하면 경청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건성으로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은혜받고 변화받고 축복받는 태도는 사모하고 경청하는 태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문 앞 광장에 “일제히”모였다고 했습니다.일제히 모였다는 것은 빠짐없이 모였다는 것이고 모두가 한결같이 말씀을 그리워하고 듣기를 사모하는 심정으로 모였다는 것입니다.
내내 말똥말똥하다가도 기도 시간만 되면 하품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내 정신이 또렷또렷하다가도 설교 시간만 되면 졸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받는 비결이나 태도는 수문 앞 광장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원해서 모이고 사모하고 요청해야 합니다.억지로 먹는 밥은 별로 맛이 없습니다.억지로 따라가는 길은 재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합시다.자원해서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2.그들은 알아들을 만한 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절을 보면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라고 했습니다.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이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목청이 터지도록 큰소리로 외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그리고 딴 소리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그런 사람은 바로 귀머거리입니다.
그러나 귀가 밝은 사람은 소근거려도 금방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알아들을 만한”사람이라는 것은 단순히 청력이 정상인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제대로 듣고 깨닫고 그리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고,요한계시록에서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외신에 의하면,미국의 젊은이들은 90초마다 한 사람꼴로 자살을 기도하고 있으며 60건의 자살 기도 중 한 건 비율로 성공하고 있다고 미국 정부가 밝혔다고 합니다.
1950년도에는 미국 젊은이 10만 명당 4,5명꼴로 자살자가 발생했으나 1986년도에는 10만 명당 13명으로 늘어났고,매년 약 3만 명에 이르는 자살자 가운데 5천 명이 15-24세의 젊은이들이라는 것입니다.
1950년대의 미국과 1980년대의 미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1950년대의 미국은 세계의 최강국으로서 그 영향력도 컸고 그야말로 세계의 미국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미국은 주일이면 모든 상가가 철시했고 정장을 한 가족들이 교회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그리고 국공립 학교에서는 아침 조회 때마다 기도를 했고,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전세계로 미국 선교사들이 줄을 지어 나갔습니다.
그 당시의 미국 경제는 든든하기 이를 데 없었고 도덕성도 건전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의 미국은 옛날의 미국이 아닙니다.세계 도처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고,도덕적으로는 범죄 소굴이 되어가고 있으며,경제적으로는 불황과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선교사는 거의 다 철수해 버렸으며,텅텅 빈 예배당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미국이 물질 문명의 파도에 휩쓸렸기 때문이고 신앙을 외면하고 황금 문명만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 위에 건국된 나라답지 않게 말씀을 멀리하고 인본주의에 기울어져 인간 왕국을 건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성경을 케케묵은 골동품으로 취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기 시작한다면 그 영혼은 그때부터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문 앞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처럼 들을 만한 귀와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그들이 듣는 말씀 때문에 엄청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무릇 알아들을 만한 사람들,그들이 복 있는 사람들이고 소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3.에스라가 책을 펴 읽기를 시작하자 그들은 일제히 일어섰습니다.
일어섰다는 것은 공감과 동의와 찬양을 의미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라를 통해 낭독되고 있는데 멍청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됩니다.
수문 앞 광장에 새까맣게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습니다.
제사장의 예복을 입은 에스라가 두 손으로 모세의 율법책을 받쳐 들고 나타나자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높다랗게 만든 나무 강단에 에스라가 올라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씀을 낭독하기 시작하자 모든 백성은 약속이나 한 듯 조용하게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서 있습니다.
이것이 그날 수문 앞 광장의 스케치입니다.
말씀의 낭독 소리가 울려 퍼지자 일제히 일어서는 백성들…….그것은 말씀을 사랑한다는 표시이며 존경한다는 표시이며 순종하겠다는 표시이며 행동을 함께 하겠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일어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 L.A.에 나성 한인 교회가 있습니다.그 교회가 교회 건축을 놓고 기도하고 있던 5년 전의 어느 날,부동산업을 하는 소니아 석이라는 사람한테서 김의환 목사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좋은 땅이 한 군데 나온 것이 있는데 가서 살펴보지 않겠느냐는 전화였습니다.함께 가서 본 땅은 15,000평이나 되는 땅이었고,그 당시로 150만불을 주어야 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땅을 둘러본 김 목사님은 “바로 이 땅이다”라는 확신과 함께 그 자리에서 우선 구두로 살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돈은 10만 불도 없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교회로 돌아와 당회를 소집해 의논했습니다.결론은 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5년이 지난 지금 그 땅 값은 900만 불을 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지금 그 대지 위에 800만 불에 해당하는 교회를 신축하고 있습니다.
교회 건축을 시작하기 전인 3년 전에 우체국으로부터 제안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3,000평 정도만 땅을 준다면 그 땅에 우체국을 짓고,그 대신 교회가 원하는 대로 교회를 지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회를 열고 목사님이 그 조건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장로님들 모두가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교회는 우리 힘으로 기도하고 땀 흘리고 헌금해서 건축해야지 남이 쉽게 그의 돈으로 지어 준다면 그것은 우리 교회가 못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한한 감동을 받았습니다.그리고 함께 일어서고 함께 걸어가는 그 분들의 멋진 신앙과 생각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
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에도 필요합니다.
가정이 무엇입니까 피를 나눈 사람들이 함께 모여 뜻을 나누고 정을 나누고 대화를 나누는 곳입니다.
그리고 일어설 일이 있을 때 함께 일어서고 앉아 쉴 때 함께 쉬는 곳입니다.
함께 일어서고 함께 앉고 함께 먹고 함께 쉬어야 고독하지 않고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즐거움도,어려움도 함께 나누는 곳이 교회입니다.홀로 서면 외롭습니다.혼자서 걸어가면 고독합니다.그러나 함께 일어서고 함께 걸어가고 함께 쉬면 고독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는 동역자만 있으면 외롭거나 힘들지 않은 법입니다.
우린 지금 미증유의 국가적 시련과 혼란에 직면해 있습니다.
함께 합시다.서로 나누고 찢지 말고 하나가 됩시다.
그러려면 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그 소리는 TV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닙니다.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도 아닙니다.정치권의 성명서도 담화문도 아닙니다.
수문 앞 광장의 나무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소리여야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일어서고 하나 되고 거듭나면 우리 사회가 새롭게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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