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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을 받았느냐? (행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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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주님의 백성들은 신앙의 성장과 주님의 일의 헌신을 위하여 여러가지 형태의 은사들을 받습니다.

 은사에는 여러 형태가 있으며 이 은사들은 사람의 뜻을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 니다.

 이 은사들에 대하여 다음 기회에 더 자세한 것을 말씀들이기로 하고 오늘은 오늘 본문과 함게 주어진 문제들을 함께 상고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방언에 대하여 6절에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라고 했읍니다.

 예나 오늘이나 이 방언 문제때문에 교회 안에 많은 문제가 있어 왔읍니다.

 지금 이자리에도 방언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방언을 하지 못하는 분들 도 계십니다.

 흔히 이 방언의 문제로 야기가 되는 문제는 방언을 하시는 분들은 방언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앝잡아 보기가 쉽고 또 방언을 못하시는 분들은 방언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잘 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방언 문제를 먼저 집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1),복음서에 나타난 방언-----------------------복음서에는 방언에대한 뚜렸한 언급이 없읍니다.

그러나 방언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의 약속들 중에 하나입니다.

 막16;17절에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라고 했읍니다.

 이 주님의 약속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때 분명히 이루어졌읍니다.

그래서 이 방언은 그리스도의 약속의 성취임에 틀림이 없읍니다.

이는 너무나도 확실한 약속의 성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에서 방언이 은사로 표현되지 않고 표적으로 사용 되었음을 생각해 보실 필요가 있읍니다.

 표적은 은사가 아닙니다.

그러니 마가복음에 나타난 새 방언은 표적으로써 옛 시대가 끝이 나고 새 시대가 시작된자는 하나님의 선포인 것입니다.

 그리고 표적은 언제나 일시적인 것을 말합니다.

즉 당시에만 독특한 시간적 제약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2),사도 시대의 방언-------------------사도행전에 처음 방언의 역사가 기록된 곳은 2장입니다.

그런데 행2장의 방언은 고전 12장-14장에 나타나는 방언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1),사도행전에서의 방언 이 때에 어떤 방언이기에 그 날 15개국의 사람들이 다 알아 들을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로 인하여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읍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사도들이 방언을 할때에 듣고 있는 사람들이 다 자기의 말로 알아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어떤 영적이고 특수한 것이라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여러 나라 말로 들렸읍니다.

 (2),고전12-14장의 방언 여기에 나타난 방언은 행2장에 나타난 방언과는 차이가 있읍니다.

여기에 나타난 것은 표적이 아니라 은사로 등장을 하고 있다는 것과 아울러 이 방언의 은사에는 통역의 은사가 따라야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 니다.

 이 방언은 말하고 있는 사람자의 인격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을 말하고 있읍니다.

 고전14;14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읍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 했읍니다.

 그렇습니다.

방언의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영이 하는 것이기에 내 인격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읍니다.

 그래서 방언은 어디가지나 영적인 활동입니다.

 그러나 행2장의 방언은 많은 사람들의 귀에 정확하게 전달되었음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방언은 고전14;2-5절에 보면 비밀이라고 했읍니다.

이 비밀이라함은 그만큼 영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 하나님의 비밀스런 은사를 사람들이 가르쳐주고 또 그것을 학습과정으로 배워서 습득하는 어리석음이 자행되고 있으니 참 방언이 있는가하면 또 사이비 방언도 있어서 영계를 더 어지럽히고 있는 실정입니다.

 2,세례 요한의 세례

2절에 "바울이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말은 너희가 예수를 믿고난 후에 성령을 받았느냐가 아닙니다.

 이 말을 어떤 분들은 오해를 해서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성령은 후에 받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분들이 있어서 말슴을 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에수를 그리스도라 믿을 수 없기 문입니다.

성령이 내 속에 역사하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나의 구주라고 믿을 수가 있겠읍니까

우리가 예수를 나의 주주라고 믿고 고백케 된것은 내 속에 성령이 이미 들어 와 역사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 저들은 무었이라고 대답을 했읍니까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을 하였읍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성령에 대하여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이 성령에 대하여 약속을 했는데 우리는 그 약속의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 졌는지에 대하여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저들은 아볼로로부터 요한의 가르침만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세례에 관하여는 아무것도 아는게 없었읍니가.

 그러나 세례 요한은 분명히 말했읍니다.

자기는 쇠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하여야하겠다고 했읍니다.

 이는 세례 요한에게 머므르지 말고 요한을 넘어서 예수에게까지 가야한다는 것을 말함입니다.

 그런데 아보로가 이를 다 알지 못해서 세례 요한에 관한 것만 가르쳤기 때문에 성령의 세례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읍니다.

 요한의 세례라는 것은 율법을 범한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3,성령 세례

성령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의 죄속의 십자가에 함께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나도 거기에 달려 주님과 더부러 죽고 그리고 성령을 받아 예수님이 다시 사셨던 것과 같이 나도 다시 살아 하나님의 백성된 인치심을 말함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과 함게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사심의 영적인 체험이 없고 단지 율법에서 도리키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만 있었읍니다.

 이런 현상이 에베소 교회에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이런 현상이 오늘에도 비일비재하고 있읍니다.

 이 시간에 제가 묻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드이여! "여러분들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읍니까"

어떤 분들은 오늘의 말씀을 외곡해서 방언 못하면 성령 받지 못했다고 오해를 하고 있는 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읍니다.

 그 결과 성령 받지 못했으니 구원도 받지 못했다는 말들을 서슴 없이 하고 있음을 봅니다

한때 그렇게 가르쳐 왔고 또 요즘도 그렇게 가르치는 단체들이 상당히 많이 있읍니다.

 성경의 근거도 없는 것입니다.

매우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문자 그대로 성령행전이라고도 합니다.

사도들이 가는 곳 마다 복음을 전파했고 전파되는 곳 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의 세례가 있었읍니다/.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믿는 자들이 많이 생겼읍니다.

 예를 들면 도르가가 믿었읍니다.

루디아가 믿었읍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믿었읍니다.

베레아 사람들이 믿었읍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믿었읍니다.

 그런데 이들이 방언을 하더라고 말하지 않고 있읍니다.

 이는 방언이 성령 세례라고 할 수 없음을 말함입니다.

더우기 은사가 구원 받았음의 증명은 더더욱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묻겠읍니다.

여러분은 믿을 때 성령을 받았읍니까

눅6;43-44절에 주님은 이런 말슴을 하셨읍니다.

"그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고 하셨읍니다.

 사과가 열면 그 나무는 사과 나무이고 매가 열면 그 나무는 배 나무라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의 사람은 무었을 보아서 알 수 있겠읍니까 성령의 사람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그가 성령의 사람이면 그 사람이 맺는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그게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사과 나무가 아닌데도 사과를 맺을 수 있읍니까 감나무도 아닌데 감이 열릴 수 있읍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사람이 아니고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 있읍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재니라"

저는 성령을 받았다는 대답을 듣기 위하여 묻지 않았읍니다.

 여러분에게서 이런 성령의 열매가 맺고 있는가를 물었읍니다.

 오늘 날 한국 교회가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은 부지기 수로 많은데 경상도 사투리도 말하면 성령 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억씨기 많은데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이는 한국 교회가 농사를 잘못 짖고 있음이 틀림 없읍니다.

 나무는 많이 심었는데 열매 없는 잎사귀 농사를 하고 있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추수때입니다.

열매를 거두는 시기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성령의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사랑에서 절제까지의 열매가 주렁 주렁 맺히고 있읍니까

찔려와 엉컹귀가 사과를 맺을 수 없읍니다.

사과나무는 절대로 엉컹퀴를 맺을 수 없읍니다.

사과 나무는 필연코 사과를 맺게 되 있읍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 나무를 잘 관리를 했을 때의 이야기 입니다.

비배 관리를 소흘리 하고서는 아무런 결실을 기대하지 못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의 사람임을 체험하시고 십습니까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요.

말씀 사모하는 사람이 되십시요.

온전한 도구로 쓰임 받기를 원하는 헌신의 사람이 되십시요.

그리고 성령님께 여러분을 들리십시요.

 틀림없이 성령의 열매가 열릴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임을 열매로 증명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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