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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와 도전 (행 19: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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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교회(the English Church)는 Elizabeth 여왕의 보호 아래 있었을 때 보다는 Merry 여왕의 박해와 학정 아래 있었을 때 교회는 더 정상적인 성장의 길을 걸었읍니다.

 초대 교회가 그랬읍니다.

 로마의 모진 박해가 있었을 때 기독교는 건전하게 성장을 했었고 복음의 전파도 전 세계를 향하여 소속도 있게 전파되었읍니다.

 그러던 것이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을 하고 부터 교회는 타락의 길을 걸어 왔읍니다.

 그 타락의 결정체가 바로 Roman Catolic 입니다.

 중세시대에 교회라는 이름 아래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던 것입니다.

 교회 역사상 가장 위태했을 때는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가 아니고 교회가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거나 보호를 받을 때였읍니다.

 반대로 교회가 가장 교회 다웠을 때는 교회가 나라의 보호를 받을 때가 아니고 교회가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고 있을 때였읍니다.

 오늘 본문이 그 역사적인 실례를 잘 말해주고 있읍니다.

 1,물질적인 도전

23절에 "그때즘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바울이 복음을 신나게 전파하고 있을 때 에베소시엔 큰 소동이 일어 났읍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에베소는 Diana 여신 즉 Artemis를 유별나게 숭배를 했읍니다.

 더욱기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던 때가 바로 Diana 신을 숭배하는 달 즉 5월 이었읍니다.

 그래서 매년 5월이면 아시아에 있는 많은 숭배객들이 몰려 오곤 했읍니다.

 그 외지에서 몰려 오는 사람들과 지방의 사람들을 합하면 대단한 수치입니다.

 그로 인하여 이 에베소엔 이 우상신을 위하여 은장색이 매우 성행을 했고 그것으로 인하여 벌어 들이는 수입 또한 대단했읍니다.

 다시 말하면 즉 Diana 여신을 숭배하러 오는 사람들은 의례히 은으로 만든 우상들을 많이 사가곤 했는데 바울이 이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난 후 부터는 이 은장색의 판매고가 급격히 줄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시민들은 교회를 향하여 반기를 들고 요세 말로 말하면 데모를 하게된 것입니다.

 우상을 섬겨야할 사람들이 복된 복음의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 옮으로 말미암아 우상판매업은 현저하게 그 수입이 줄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은 엣날에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도 직접 부딛히고 있는 문제 입니다.

 이 때 교회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이 문제를 냉정히 따져 보아야합니다.

 실지로 교회는 시민의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시민의 해악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짐으로 인하여 담배나 술 판매의 실적이 부진하다고 시민들이 교회를 향하여 떼를 쓴다면 말이 되겠읍니까

또 교회가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사창가가 문을 닫게 되고 점장이들이 살아지게 되었다고 교회를 향하여 데모를 할 수 있읍니까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지만 세상은 능히 그런 짓들을 하고도 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분명히 어느누구에게도 물질적인 손해를 입혀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때문에 이 말씀에 위배되는 것으로 인하여 어떤 물질적인 손해가 발생한다면 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신앙과 관계된 것이라면 교회는 하나님을 포기할 수 없는것처럼 물러설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과 과계된 것이 니라면 가능한 양보의 미덕을 쌓아야 마땅합니다.

 2,대인적인 도전 그리스도인의 대인 관계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을 살아하듯 하라"(례19;18)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빌2;3)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롬12;10) "너를 송사하여 속 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것 옷까지도 가지게하며"(마5;40)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5;41)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사랑하며.."마5;43,44) "나 자신의 유익보다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10;33)

그리스도인은 상대의 기쁨의 대상이 되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참예해야합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과 그의 일행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읍니다.

우상을 만드어서 업으로 하는 사람들과의 대인 관계입니다.

저들에게 유익은 커녕 오히려 생계에 위협을 한다고 난리가 난 때문입니다.

 25-27절입니다.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유족한 새활이 이 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흘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업도 떨어질까 하노라"

이러고도 어찌 저들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하는 물음이 오늘 주위에도 수도 없이 발생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나 한사람이야 예수 믿고 구원의 감격속에 살고 있으니 관계가 없지만 내가 예수 믿는 일때문에 부모님들의 심기가 불편하다는지 내가 예수 믿기 때문에 남펴이 또는 아내가 언짠아 한다면 이 때 대인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참으로 난처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럴때 문제의 해답을 내 머리에서 찾지 말고 성경이 무어 라고 말하는가를 찾아야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불편하게하지 않을려고 마음에도 없는 일에 동참하는 사례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술친구를 위하여 주색잡기에 빠질수는 없으며 친구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하여 회령을 함께할 수는 없으며 상사의 비위를 맞춘다고 신앙의 진리를 역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시에 에베소에는 2,3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극장이 있었읍니다.

 이 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 모여 들었읍니다.

 이때 바울은 어떻게 했는가 타협 포기 아닙니다/.

 타협할 수 없읍니다.

포기할 수 없읍니다.

 극장에 소동을 일삼아 모인 수자도 많았지만

18-20절에서 우리가 살펴본대로 예수 믿고 회개하고 돌아 온 사람들 또한 많았읍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반대를 일삼는 저들의 입으로 이미 자신들의 패배를 실질적으로 시인을 하고 있읍니다.

 25절에 "...여러분도 알거니와 .." 복음이 가져온 변화를 이미 저들은 알고 있었읍니다.

거리의 깡패가 술망난이가 온전한 사람이 된 것을 보아 알았읍니다.

그러면 할말이 없는 것인데....

 26절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에베소엔 많은 회심잘을 통하여 신앙의 간증을 들었읍니다.

그리고 회심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거룩한 모습을 보았읍니다.

그러면 할 말이 없는 것인데.....

 26절에 또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이미 복음의 역사는 에베소 이 작은 도시에 국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역서적 사실임이 들어나고 있었읍니다.

 오늘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세계의 내용이 무었입니까

많이들 왜곡을 해서 가르쳐 옵니다만 세계사에서 교회의 역사를 뺀다면 아무 것도 배울게 없는 것입니다.

 역사가 곧 교회이고 교회가 곧 역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는 역사의 흐름을 순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결코 대인 관계를 파괴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원대한 앞을 내다 보시면서 힘찬 믿음의 행진을 해야합니다.

 3,사회적인 도전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많은 경우 이유 없는 미움을 교회가 사회로부터 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는 사돈 논 사면 배가 앞은 심리의 작용일 것입니다.

 교회의 건물들이그리고 십자가 탑이 숨가쁘게 우후 죽순마냥 세워지는 것을 볼때 괸스리 시기심이 작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우리들이 천성을 향하여 진리의 행진을 하고 있음을 명심해야합니다.

 오늘 에베소에서 일언난 이 난동의 사건은 인간의 영혼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에 의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진정 사회가 영혼의 귀중함과 인생의 의미를 바로만 알 수 있다면 결코 교회를 향하여 사회적인 문제는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읍니다.

마8;28-34절의 내용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을 지나고 있을 때 무덤 사이에 살고 있는 귀신들린 사람 하나를 만났읍니다.

 그때 그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가 누구신줄 알아보고 자기를 무저갱에 던지지 말고 되지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읍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귀신을 명하여 되지떼에게 들어가게 했더니 그 많은 되지떼들이 곁에 바다에 내리달아 몰사했읍니다.

 그때 이를 지켜 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거기 있지 말고 떠나기를 원했읍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영혼보다 그들에겐 되지떼가 더 소중했기 때문이었읍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멸시를 당하고 있읍니까 사람 죽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회에 오늘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들이 해야할 일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들이 교회를 알 수 있게 하느냐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하면 저 사람들이 영혼의 귀중함을 알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좀더 잘살아야합니다.

그리고 좀더 거룩하게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좀더 진실해 질려고 노력을 해야합니다.

 본문으로 돌아 갑니다.

32절입니다.

"사람들이 외쳐 혹은 이 말을 혹은 저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32절을 보니 극장에 많은 사람들이 뭐나 있나해서 모여들기는 들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자기들이 외 왔는지조차도 알지 못하더라고 했읍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서기장이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오늘의 형편을 잘 설명했읍니다.

 35-41절입니다.

 이 사람들이 불법 집회를 한것도 아니고 남의 물건을 도적질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읍니다.

 서기장의 말은 너무나도 훌륭했읍니다.

그의 말한마디에 모든 소요가 해결된 셈입니다.

 아마 이런 것들이 시발점이 되어서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기에 이르지 않았나하고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기독교가 국교가 될 수 있는 형편이 아닙니다.

마치 불교가 대한민국의 국교인듯한 인상을 짙게하는 것을 보게합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하면 교회가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을 때 그때가 좋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들이기 위함입니다.

 가능한한 교회가 사회나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토록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믿음의 행진을 해야되겠읍니다만 만약의 경우 신앙의 문제로 어떤 제약을 받는다면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 야 합니다.

 교회는 데메드로오를 두려워하지 말아야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산성이기에 대적의 무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온 에베소 시민이 들고 일어나 떠들석하게 야단 법석이었으나 진리의 강물은 도도히 흘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라의 요직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퍽이나 요행한 일처럼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는 분명한 착각입니다.

매우 잘못된 환상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신앙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신앙은 오로지 내가 관리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서기장과 같은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합니다.

 "우리를 위험에서 구해달라고...."

말씀을 맷습니다.

열매맺은 나무가 사람들의 돌팔매를 당하듯이 진리는 도전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어떠한 도전이 있다할지라도 조금도 신앙에는 양보가 있을 수 없읍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가 아니거든 많이들 양보하면서 교회에게만 주신 진리를 잘 지켜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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