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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의 하나님 (고후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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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위로의 하나님
성경본문 : 고후 1:3-4ㅁ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해 줍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을 창조주시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과 우리 인생들을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이 물질세계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작과 끝이 없으신 영원하신 신이십니다. 상천하지에 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존재는 성경에 계시하신 창조주 하나님밖에 없으십니다. 반면에, 하나님 이외의 신들은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것들로서 우상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주시라는 이 사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우주만상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무한하심을 보여줍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신으로 계시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속된 것이나 죄를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에덴에서 쫓아내셨고, 노아 당시 사람들이 타락했을 때 홍수로 세상을 멸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심판자이십니다.

이와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이 무한하신 분으로 계시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그 앞에 설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가 한량없으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용서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으며 우리가 지은 죄의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짊어지시고 심판을 당케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화해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 이르기를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보니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원하시고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보니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신약성경에 수록되어 있는 사도들의 서신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특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내용을 올바로 알기만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실에 대하여 감격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도 또 듣고 싶어 합니다. 그야말로 이 말씀을 듣기를 목말라 사모합니다. 그러나 이 같이 은혜로운 심령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는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행하신 놀라운 이적을 많이 보았습니다. 나일 강이 피로 변하는 것도 보았고, 유월절 밤에 애굽인의 장자들이 모두 다 죽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져서 그 사이에 난 길로 애굽 땅을 탈출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을 호위했습니다. 시내산이 맹렬한 화염에 휩싸인 가운데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광경도 보았습니다. 매일같이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고, 반석에서 터져 나온 생수를 마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광야생활은 매일같이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일 세대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40년 광야생활이 끝나갈 즈음에, 모세는 온 이스라엘 자손을 모으고 이 같이 말씀합니다. “2)…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 목전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3)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4)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

아무리 기상천외한 기적을 수없이 경험할지라도 깨닫는 마음이 없으면 그 기적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구원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여전히 믿음이 없이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신자들을 위해서 이 같은 기도를 올렸습니다.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

오늘 설교 제목이 “위로의 하나님”인데, 설교의 서론 부분을 이처럼 길게 언급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올바로 알고 믿으며, 깨닫는 마음을 가진 성도라야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자비의 아버지십니다.

본문에 보니 하나님을 일컬어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말해 주듯이,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와 관련을 맺으십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자비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압니다.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기 위해 땀 흘려 수고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아버지는 자질과 능력 면에서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의 감정에 따라서 자녀들을 대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분이 아니시고 불변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변함없으신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하나님을 비교해서 말씀하시기를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고 하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 보면, 아버지가 둘째 아들의 요구대로 재산을 나누어 주었더니, 그 아들은 곧바로 그 재물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다 허비했습니다. 그러고 나자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무일푼이 된 이 아들은 그만 돼지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보수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였으나 그나마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에 이 아들은 비로소 뉘우쳤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그러고는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하였으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자비로운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상징합니다.

다윗은 시편 103편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이 같이 진술했습니다.

“8)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11)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4)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다윗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므로 우리 각 사람의 사정과 형편을 속속들이 아시고 이해해 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고 자주 시험에 넘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본성적인 연약함을 아시므로 우리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때 용서를 베풀어주십니다. 혹 하나님을 멀리 떠나 세상길을 방황하는 자라도 회개하고 돌아올 때 죄를 사하시며 자녀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또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십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10)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은 갈수록 경쟁이 심해져 가고,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해 갑니다. 비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적인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서 생존경쟁에 임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려면 신앙양심에 따라서 법과 질서를 지키고 남을 배려해야 합니다. 자, 그러고서도 낙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우리가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그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셔서 힘과 지혜를 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본문에 보니 하나님을 일컬어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 세상 살아가노라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사람에 따라서 겪는 어려움의 종류나 정도에 차이가 나긴 하지만,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욥기 5장 7절에 보니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가벼운 불티가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듯이, 인생에 고난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도무지 혼자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으리만치 엄청난 시련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 없고, 고립무원의 형편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낙심하지 말고 믿음의 눈을 들어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잊고 계시다고 불평하는 유다 백성에게 이 같이 말했습니다. “27)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28)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

지금 유다 백성이 주저앉아서 불평을 토로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피곤하고 낙심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는 문제인데도 도전해 볼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현실도 어렵지만, 더 큰 위기는 그들의 마음이 절망하고 있었다는데 있습니다. 그러한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앙망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앙망할 때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속에 소망을 부어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힘을 더해 주신다고 격려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본문은 유다 백성을 위로하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 어떤 결과가 생겨날까요? 첫째로, 모든 환난을 능히 이겨냅니다. 둘째로, 환난 중에 있으면서 또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능히 위로할 수 있게 됩니다.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위로가 넘쳐흘러서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나누어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내 코가 석자인데 어떻게 남을 위로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몰라도, 사도 바울은 실제로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 사도 바울은 늙고 병든 몸으로 로마 감옥에 갇혀서 아무런 기쁨도 없어 보였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충만했으므로 오히려 자유롭게 지내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아 공회에 붙잡혀 갔습니다. 거기서 스데반 집사는 거짓 증인들에 의해 신성 모독죄로 고발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공회에 모인 사람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그 절박한 순간에도 스데반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이 보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순교를 앞둔 스데반 집사에게 넘치는 위로를 부어 주셨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났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무슨 시련을 만났습니까? 그리하여 마음이 불안하고 낙심이 되십니까? 스데반처럼 마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을 우러러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넘치는 위로를 성도님들의 마음속에 부어주셔서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도 남음이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잠언 16장에 보니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5)고 하였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고 했습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자가 되었으니 어찌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교만한 사람은 환난을 만날수록 더욱 완악해져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환난을 만나면 더욱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시련을 능히 이겨냅니다.

성경에 보니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시 147:6),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다’(사 29:19)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 늘 겸손한 성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려면 죄를 통탄이 여기고 회개해야 합니다. 산상보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애통 곧 슬퍼하고 가슴 아파할 이유는 많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가족이 병들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실직하거나 사업에 실패했을 때, 희망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을 때, 등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란 그러한 일로 슬퍼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자기의 죄로 인해 애통해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지만 자주 실패하고 넘어지는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애통하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위로를 베풀어 주시고 그의 속사람을 강건케 하셔서 죄의 유혹을 이기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의 일에 힘쓸 때 위로를 베풀어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일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고후 1:8-9). 얼마나 고생이 심했으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했을까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생이 너무 심해서 사명을 포기하거나 태만하게 한 적이 없이 변함없는 열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위로가 그의 마음속에 차고 넘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는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에도 적용해야 하는 비결입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의 경우에, 때로 반 아이들이 신앙생활을 태만하게 하거나 시험에 들어서 선생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낙심해서 교사의 사명을 감당할 용기를 잃으면 안 됩니다. 또는 사람들에게서 위로 받기를 기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위로를 기대했다가 기대대로 되지 않으면 더 큰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구역장님들은 구역을 돌보면서 구역식구들의 믿음이 향상되면 힘이 나지만, 구역식구들이 신앙생활에 나태하고 긍정적인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 구역장 직분에 회의를 느끼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한 때 사람들을 바라보지 마시고 위로의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손에 구역식구들을 내어 맡기며 부르짖어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여 모든 시험을 너끈히 이기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위로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초월해서 역사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도 베드로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때는 무교 절기였는데, 헤롯은 절기가 끝나는 대로 사도 베드로를 처형할 작정이었습니다. 처형일 전날 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이제 그 밤이 지나면 목이 잘려 죽을 것인데도 사도 베드로는 얼마나 마음이 평안했든지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를 구출하러 온 주의 사자가 그의 옆구리를 쳐 깨워야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하신 대로, 사도 베드로의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가 충만했음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누리기 원하십니까?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죄를 애통하고 충성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십시오. 주님의 일을 위해 관심을 갖고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마음속에 모든 위로를 차고 넘치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과 같이 경쟁이 심하고 인정이 메마른 세상에서 사람들의 심령이 황폐해져 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과 오락과 같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마음의 위로를 얻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더 심한 갈증에 시달리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서 모든 환난과 시련을 이길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는 삶을 영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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