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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사로는 죽어서 말한다 (요 11:32-44)

첨부 1


병든 나사로에게는 마르다와 마리아라고 하는 두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부모가 안계시는 그들 집에서 오라비는 부모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장이요 대들보입니다. 그런데 그 대들보가 무너지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부모상을 당하는 것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슬픔이라고 했습니다. 바다가 거꾸로 뒤집히는 것과 같은 슬픔입니다.
몇일전 유도 국가대표 선발전이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국가대표가 되기위해 채중을 줄이기 위해 사우나에 가서 5Kg을 빼려다가 심장마비로 사망을 했습니다. 모든 희망을 그 아들에게 두었던 집안이요, 또한 유도 관계자들이었기에 그의 죽은 은 우리 모두의 슬픔이요, 아픔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대부분 경험한 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슬픔이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 두 처녀에게 내리 닥친 것입니다. 예고도 없이 나이에도 관계없이 내리 닥칩니다.
두 자매가 마지막 희망을 걸 수 있는 분은 나사렛 예수 뿐이었습니다. 그분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했습니다.

1. 병들어 죽어가는 나사로를 봅니다.
1) 주님을 사랑하는 자 였습니다.(3,4절)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예수님과 이 삼남매와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남매들의 집에서 편히 쉬어가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2)주님이 친구라 부르는 사람이었습니다.(19절) 예수는 그를 "우리의 친구 나사로"라고 부르십니다.
3) 주님도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5절) "예수께서는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합니다. 사랑하시되 아가페적으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관계를 보아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예수께서 곧장 만사제쳐 놓고 달려가실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태연자약하십니다.
4) 예수님을 울린 사람들이었습니다.(33-38절)
5) 이웃에게 진심어린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12:33)
6) 병든 사람이었습니다.(11:1)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도 이렇게 죽어갑니다.

예수님이 안계신 곳에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 그렇다면 곧 일어나겠군요"
"아니 그가 정녕 죽었다. 그러나 내가 거기 있지 않았던 것을 내가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을 통하여 너희들이 나를 온전히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안이 벙벙한 제자들에게 이틀이 더 지난 후에야 베다니로 문상을 가자고 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저와 함께 여러분도 예수님을 따라서 나사로가 죽은 유대땅 베다니로 함께 문상을 가 보십시다. 참 가시기 전에 예수님이 지금 베다니로 문상가는 것이 굉장히 위험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가십니다. 앞에서 예수님을 싫어하는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던 곳이 바로 베다니 입니다. 그러므로 도마가 문상을 갈때 "자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로 가자"했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덩달아 돌맞을 각오가 되어 있으시다면 함께 가보십시다.
예수님이 상가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나사로는 장사된 뒤였고 나사로의 남매들을 사랑했던 많은 문상객들이 아직까지 가지 않고 자매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때 상황 끝입니다. 누군가가 황급히 달려가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동네에 들어 오고 계시다는 것을 알립니다. 마르다가 불이나케 달려나와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늑장부리며 뒤늦게 나타나신 예수님께 조금은 원망섞인 목소리로 말합니다.

2. 절망과 슬픔을 돌아보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죽은 사람도 다시 살려서 생명을 줄수 있는 사람이다. 네가 그것을 믿느냐"
"네 주님 부활 때 그리 될 줄 믿습니다."
"아니 지금 당장 그렇게 될 것이다. 그걸 믿느냐"
"네 믿습니다."

이번에는 마리아가 언니가 전해준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 달려나옵니다. 그를 위로하던 많은 문상객들고 마리아가 무덤에 곡하러 가나보다하고 따라 나섭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뵙자 마리아는 털썩 발믿에 꿇어 앉아 울며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슬피 울자 같이 따라 나온 동네 사람들도 울음을 터뜨립니다. 갑자기 온 동네가 울음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슬피우는 마리아와 문상객들을 보고 예수님 역시 분노와 슬픔이 복받쳐 올라 눈이 촉촉히 적셔 옵니다. 본문 말씀에 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며 문상하는 저와 여러분은 무리들과 함께 서서 눈물 짓는 주님의 슬픈 모습, 인간적이고 뜨거운 가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마리아와 문상온 무리들처럼 젊어서 죽은 나사로의 죽음이 슬퍼하는 눈물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삶의 현장으로 불러내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빠를 잃고 거친 세상을 살아갈 마리아와 마르다 두 자매가 불쌍해서 흘리는 동정의 눈물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나사로가 곧 살아날 것을 주님은 믿고 계시니까요
그럼 자신을 믿지 못하는 무리들에게 너무너무 화가가셔서 분노의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그들의 신앙을 중심에서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통분히 여기시며 민망히 여기시며 눈물짓는 까닭은 죽음의 권세에서 절망하며 한숨짓는 무리들의 비참한 가슴이 주님의 심장에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복되게 살아가야할 사람이 죄와 어둠의 권세에서 떨며 절망하는 모습을 주님은 보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마치 모든 희망이 끊어진 듯 슬퍼하고 절망하는 그들의 영적인 무지함, 그들의 죄성을 주님께서는 함께 느끼고 계십니다.

그들의 눈물속에서 젊은 아들을 먼저 보내고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의 눈물속에서 패기있고 유능한 아들을 먼제 보내고 가슴을 쥐어뜯어며 아파하는 어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기둥과 같은 남편을 먼저보내고 희망을 잃고 절망하는 병든 가슴을 보십니다.
암이라는 질병으로 인하여 아들을 앞서 보내고 자기 아내마져 먼저 하늘나라에 가버린 텅빈 집에서 마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여 술로 아픈 가슴을 달래보려는 모 가정의 응어리진 가슴을 봅니다.
이들의 슬픔이 곧 주님의 슬픔입니다.
이들의 절망이 곧 주님의 절망입니다.
이들의 공포가 곧 주님의 공포가 되어 주님의 가슴을 짓 누릅니다.
주님이 흘리시는 눈물은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굴복하여 인간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땅의 모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눈물입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까 이사야 53장에 그분 자신이 인간들이 겪는 질병과 멸시와 고통을 몸소 체험하여서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의 절망과 슬픔을 자신의 가슴에 안고 무리들과 함께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가 봅시다.
나사로는 바위동굴에 묻혀 있습니다. 큰 돌이 입구에 막혀있습니다. 무덤을 막은 그 돌을 치우라고 무리에게 분부하십니다. 사람들은 매우 미심쩍은 표정으로 무덤을 막은 돌을 굴려서 치웁니다. 순간 동굴안에서 시체 썩은 역겨운 냄새가 확 풍겨 나옵니다. 사람들이 모두 인상을 찌푸립니다. 방금까지 예수님을 철석같이 믿겠다고 하던 마르다의 중심이 다시한번 흔들립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그 뒷말은 저와 여러분이 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 사람이 다시 산다고 하더라도 시체가 성해야 살든지 하지 썩은 시체가 어떻게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 혹시 실수하면 주님 망신이니 다시한번 생각해 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마르다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3. 구원하시는 주님을 봅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현재적인 믿음입니다. 지금 믿으라는 것입니다.
숨을 길게한번 들이마시고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 주시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 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 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
이렇게 기도하시면서 벽력같이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순간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침을 삼키며 일이 어떻게 될른지 주목합니다. 놀랍게도 철저히 죽어서 썩어 문들어져가는 나사로가 벌떡일어나 온몸에 붕대를 칭칭감은 미이라 같은 모습으로 걸어나옵니다. 모든 사람들의 입이 벌어진채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이 바로 이 장면이 크라이막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 사건을 일주일동안 계속 묵상하고 음미하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살아난 나사로의 육신은 또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진정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과 관계가 서먹서먹해지고 영적인 감각이 둔하여 질때 아무 느낌 없이 성경을 읽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본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인격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어떤 마술적인 힘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보면 그분의 인격, 그분의 신앙이 영글어낸 열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시여 내가 진실로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아버지를 신뢰합니다.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것이 저의 삶의 목표입니다. 그러니 좋으신 아버지 제 인격을 걸고 지금 기도합니다. 이사람들의 신앙을 위하여 제 청을 들어 주십시오. 철저히 죽은 나사로에게 다시 숨결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나사로야 일어나라!"

히브리서 5장에 있는 말씀은 주님의 이런 기도를 설명하여 줍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히 5:7)
여러분이여 오늘도 죄와 사망의 권세에 짓눌려 인간답게 살지못하고 죽음의 공포에 떨고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하며 한숨 짓는 저와 여러분에게 눈물로 기도하시며 "나사로야 일어나거라! 김 아무개야 일어나거라!"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예수 믿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무런 수고 없이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는자들과 함께 울고 절망하는 사람들과 함께 절망하여 자신을 내어 던져 하나님께로 상한 영혼을 이끌어가시는 주님의 눈물과 땀과 피어린 기도의 열매입니다.
이제 주님의 이 상한 심령, 주님의 눈물을 저와 여러분이 이어가야 할차례입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포근히 감싸안아 주는 우리 모두가 경조부원이 되어야 겠습니다.

4. 부활의 신앙을 가집시다.
1)살았으나 묶인 신자들--현실의 고통에 묶여 삶, <거짓, 사치, 가음, 음란 등의 죄악으로 묶인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 이같이 죄에 묶여 살아가는 신자들은 끊임없이 양심의 고통을 받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한 발은 하늘 나라에 들여 놓고 한 발은 세상에 들여 놓기 때문에 하나님께 얻어 맞고 마귀에게 얻어 맞습니다.
2)살아난 것으로만 감격함
3)완전한 자유를 위해 너희가 풀어 주어라--그러므로 죄에서 풀려 나도록 거룩함으로 덧입고 옛 구습을 벗어 버릴 수 있도록 권면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풀린(놓여진) 나사로(새사람)
1)참된 자유를 얻은 자(새생활-새사람)
2)새 사람의 사명-사랑, 감사, 전도 <일하라!>
3)날마다 풀리도록 성령 충만하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죽은 사람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나사로의 죽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주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은 마술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주님은 나사로의 가족들을 무척 사랑하셨고 두 자매와 조문객들과 함께 애통해 하셨다.
죽은 사람을 향하여 일나나라고 외치시는 주님의 모습속에서 위대한 믿음을 본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아무도 이렇게 담대하게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땅에 어느 누구도 죽은 자에 대하여 다시 일어나라고 권위있게 말할 수 없다.
나사로를 살리신 권능의 예수께서 우리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사로의 사건때문에 사람들의 가슴속에 더욱더 인상깊에 심어졌던 것이다.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은 나사로 자신을 위한것이 아니었다. 그는 또 죽을 테니까. 둘러선 무리들 특별히 오라비의 죽음을 앞에 놓고 극도의 슬픔에 잠겨 울고있는 마르다, 마리아 두 자매의 영적 성장을 염두에 두고 계시고 더 나아가 제자들과 둘러선 무리들의 신앙을 위해서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시는 것이다.
나사로는 죽어 썩을 만큼 완전히 죽으므로써 주님을 영화롭게 하였다. 살아있을 때 그가 특별이 무슨 귀한 일을 했다거나 큰 일을 한 것 같지 않다. 그가 한 일은 두 여동생과 함께 주님을 소박하게 잔잔히 사랑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죽어서 더 큰 일을 했다. 주님의 사역을 빛나게 하였다. 굳이 전도하러 동네에 나가지 않아도 동네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보고 주님을 믿었다. 그는 온전히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통로가 되었을 뿐이다. 신앙 생활의 가장 기초는 무엇인고하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 누리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믿고 부모님의 사랑을 구김살 없이 받아 누리듯이 말이다. 이 은혜가 우리 생활 속에 흘러 넘칠 때에 우리는 진정한 주님의 자녀로 살 수 있다.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이다. 광야에서 엎드러진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불순종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교훈하신다. 에굽의 장자들의 죽음을 통하여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신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것이야말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을 통하여 성령을 속이는 것을 얼마나 하나님이 싫어하시는지 교훈하셨다.

우리는 슬픔 당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 죽음을 통해서 들려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깨우쳐 줄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문상이나 추도예배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유족들을 위해서 가는 것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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