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앙을 지키는길 (마 06:1-18)

첨부 1


오늘 말씀은 산상보훈 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원리에 입각한 그 생활내용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의 보상 동기에 관한 문제를 얘기하고 있기 도 합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 씀이:4,:6,:18에 세 번이나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서 우리의 선행에 대하여 갚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기 복사상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고, 또한 기독교의 근본 교리인 구속과 은혜의 교리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 상은 극히 회의적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복을 받을 것임을 성경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힘써 야 할 것 가운데 특별히 빠지기 쉬운, 아주 간교한 시험에 대해서 경 고하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우리 믿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힘써야 할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구제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의 말로 한다면 봉 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바른 의무인 것입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셋째는 금식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말로 한다면 보통 절제라고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절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인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이 세 가지를 우리가 꼭 힘써야 하는데 여기에 따르는 시 험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미리 알고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 첫째인 구제는 자선 사업과 봉사활동을 의미합니다.

먼저 우리 믿는 사람들의 봉사생활은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항상 강조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모든 계 명을 가장 간단하게 두 가지로 주님께서 요약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봉사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25:35에 주신 교훈을 보면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 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혹은 신명기 15:7,8 에는 이런 권면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 느 성읍이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뀌어주라 예수님께서도 그를 찾아 온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가 온전케 되고자 하거든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옛날 유대 사람들은 성경의 이 교훈을 말하는 그대로 실행하기를 힘썼습니다. 오늘늘날까지도 유대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고 힘쓴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이나 오늘이나 유대 사람들 가운데는 거 지가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생기면, 꼭 그 민족들이 피차에 상부상조해서 도와주어 같이 살도록 힘쓰기 때 문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성경의 교훈을 좀더 소중히 생각해서 믿는 사람들끼리라도 우선 서로 협력해서 상부상조하며 살아 가도록 힘써야 하겠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 전체가 이 원리를 배워서 한겨례 전체가 같이 살아 나아가도록 하여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 의 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봉사생활에는 시험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남 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허영심, 명예심이 움직여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돕기는 하되 어떻게든지 그 일을 알리 기 위해 힘쓰는 마음, 또 그런 것을 잘 알려 줄 만한 기관에 구제금을 내고자 하는 그런 마음, 이런 유혹과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교회에서는 헌금주머니에 헌금을 받다가 방법을 바꾸어 서 누구나 그 헌금 내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둥글고 넙적한 그릇에 받 아 보았더니 주머니에 받을 때 보다 헌금이 훨씬 더 많이 나왔다는 이 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분명히 헌금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 는 것이지마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심리가 많이 작용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옛 사람에 속하던 그 허영심, 그 교만, 그 명예심 같은 것들이 종교적이라는 탈을 쓰고 신앙생활 가운데 들어와 서 도사리고 있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것을 미 리 아시고 특별한 주의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구제할 때 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은밀하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네 영광을 위하여 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리기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지 키는 길입니다.

 물론 이 교훈을 오해해서는 아니됩니다. 구제하는 것, 남을 봉사 하는 것을 남이 보는데서 해서는절대로 안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마태복음 5: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빛 을 사람에게 비추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사람 보는데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마음은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 리는 개인으로 남을 돕는 것도 좋지만 언제든지 교회를 통해서 남을 도와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기도에 얼마나 힘써야 한다는 것은 여러 말로 권면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보훈 중 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라고 권면하신 것입니다.

일찍 제자들에게도 께어 기도하며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라고 권 면하며 경고하셨습니다. 또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어떤 때는 기도의 응답이 곧 오지 아니할찌라도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하셨 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보잘 것 없는 과부가 간절히 호소할 때 얼른 들 어주지 않았지마는 계속 끈질기게 호소하였더니 그 간구를 들어 주었 는데 하물며 사랑하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들이 간절히 기도할 때 에 응답지 아니하시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고 우리에 권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디리고 계시는데 내가 먼저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23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 으로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호 흡과 같아서 언제나 쉬면 안됩니다. 언제든지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으로도 기도에 힘 써야 하고, 가족으로도 기도에 힘써야 하고, 구역으로도 기도에 힘써 야 하고, 새벽에도 기도에 힘써야 하고, 저녁에도 기도에 힘써야 하 고, 온 교회가 기도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시험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인데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게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그 때의 유대사회 가운데는 다른 사람에게 나 타내길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길거리에서, 오래 서서 기도하는 사람들 이 꽤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일정한 기도 시간이 있어 서 어느 곳에 있든지 그 기도시간이 되면 길을 가던 사람도 멈추어서 기도를 잠깐 기도를 하곤 했는데, 그것이 다릎게 변질되어서 기도 시 간만 되면 집 안에 있다가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꼭 밖에 나와서 기 도하곤 하던 사람이 있었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골방에 들어가 기 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조금 잘못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사람들이 듣는다 는 것을 너무 의식해서 할 수만 있으면 미사여구(개갱거강)를 써서 하 려고 애를 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국문학 선생이 아닙니 다. 그런 심리가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기도가 아니라 사람을 상대로 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사람에게 하는 기도, 보이려고 하는 기도는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 이방 사람처럼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 당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도 다 기도를 향지만 우상에게 가서 기도를 하면서 한 말을 되풀이하고 쓸데 없이 보태어 뜻 없이 중언부 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전에 언젠가 TV.를 보니까 히말라야 산 아래에 네팔이라는 나라에 많은 절들이 있는데, 그 절들 은 힌두교와 혼합된 이상한 불교로서 그 곳에 가면 절마다 둥그런 기 도하는 바퀴가 여러개 있는데, 그 바퀴에다 자기가 기도하려고 하는 내용을 다 써서 조각을 해 놓고는 그 바퀴를 한 번씩 돌리면 기도도 여러번 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뜻도 없이 공연하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방자하게 기도하지 마십 시다. 물론 어떠한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간절히 반복해서 기도하지 말라는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계속해서 3번 이나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면서 3번이나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 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내용을 이 시간,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간단하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보면, 하나는 기도의 내용을 보아 하나님께 대한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달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도 이루어지 게 해 달라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가 먼저 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 대한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도 다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조 금 잘못하면 내 기도만 하다 말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기도는 맨 마지막에 조금 하든지, 아주 잊어버리든지 하지는 않습니까 그것을 주의 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기도가 매우 간단하다는 것입 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어떻게 하셨는가 하는 관점을 가지고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예수님께서 혼자 기 도하실 때에는 아주 오랫 동안 기도하신 때가 많았습니다. 어떤 때는 밤을 새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실 때는 언제든지 간단하게 기도하셨 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기도할 수록 간단하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어떤 분이 혼자 있을 때는 간단하게 기도하는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괜히 길게 기도한다 고 하면 그 기도 생활에는 어떤 결함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내 죄를 자복하고 내 죄를 토로하는 것인데, 언제든지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 심정을 토로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생활에 있어서 시험이 들어서는 아니되겠습니 다. 특별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는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것 을 나타내고자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람은 벌 써 옳은 기도생활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 니다.

 이제 셋째로, 주시는 말씀으로 금식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절제의 원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요엘서 2:12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 오라하는 권면이 있습니다.

금식은 구약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힘썼습니다. 모세도 금식한 적 이 있습니다. 에스라도 금식했습니다. 다니엘도, 에스더를 비롯한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도 금식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금식을 하셨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봐도 흔히 주님께서 못 박히신 금요일에 일부 금식을 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가령 육식을 금한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분 금식이라고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금식에 대한 근본 뜻은 절제입니다. 우리 육 신을 근본으로 하는 모든 욕망을 제어하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육신을 근본으로 하는 모든 욕망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식욕입 니다. 그래서 식욕을 제어하는 정신력을 강화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려 고 금식하는 풍속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대부분 금주와 금연을 합니다. 이 금주와 금연도 금식과 같은 절제의 원리인 것입니다. 부분 금식입니 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식욕만 절제해서는 안됩 니다. 육신을 근본으로 하고 일어나는 모든 욕망, 모든 욕심, 정욕, 물질욕, 명예욕, 권세욕 등의 모든 욕심을 제어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 히 기도하는 생활을 힘쓸 때에, 우리 신앙생활의 옳은 방향을 바로 찾 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 신앙의 선배들과 같이 식음 전폐하지는 않지만, 언제든 지 절제가 없이는 바른 신앙생활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절제 는 또 하나의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귀 한 절제생활에 있어서도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유혹이 있었습니다.

반드시 시험이 따랐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은 금식할 때 에 일부러 슬픈 기색을 내고, 얼굴을 흉하게 하고, 심지어 얼굴을 씻 지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러고는 보라는 듯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오래 금식했다고 하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 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특별히 절제하는 것이 있다해도, 그것 가지고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벌써 그는 절제를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는 절제하는 것을 남에게 나타내고자 하는 것도 분명 잘 못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금식을 하면서도 머리에 기름을 바 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즉, 평상시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 다.

 금식이란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욕심을 제어 하는 것이니 만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지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 입니다.

 만약 아무리 봉사생활에 힘쓰고 절제하는 생활을 힘쓴다고 하지마 는 이런 시험에 빠지게 된다면, 즉,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다 른 사람보다 내가 낫다고 하는 시험에 빠지게 되면, 죽은 파리가 향수 에 빠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향수에 죽은 파리가 빠지면 그레 어디 향수의 역할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만 이런 시험으로 말미암아 옛 사람이 종교의 탈을 쓰고 다시 들어와서, 내가 옳다, 내가 낫다라고 하는 시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조심하라고 예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 앙을 지키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이십니 다.

 봉사는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겸손히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은 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 생활 전부를 그대로 내어 놓고 내 죄를 자복하고 내가 쓸 은혜와 능력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사 람에게 보이려는 심리가 작용해서는 아니됩니다.

 또 이 절제생활도 하나님 앞에서 내 이 육신을 근거로 하고 일어 나는 모든 욕심을 제어하고 이 음란하고 사악한 세상에서 깨끗한 생 활을 하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내가 다른 사람과 비교 하여 더 낫지 않나 하는 시험이 들어오게 되면 벌써 옛 사람이 새 탈 을 쓰고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은혜의 자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을 상대로 한다는 것 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보건 말건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어떤 위치에 서든지, 아무도 안 보든지, 누가 보든지, 알아 주던, 알아 주지 않던, 어떤 형편에서든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정직하고 성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대로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앞 에서 내가 옳은 생활을 하고, 내가 정직한 생활을 하고, 내가 부지런 히 봉사를 하고,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하고, 내가 온전히 절제를 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만 해야 참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이런 경건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 을 이루어 나아가며, 예수님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