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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감사 고백 (딤전 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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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감사 고백 (딤전 1:12-17)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서 찾아보고 싶어 하시는 덕성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는 은혜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성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진정한 감사의 사람을 봅니다. 사도 바울, 그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목회의 여러 면을 가르치며 권면하는 가운데, 본문에서 디모데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하여 자신의 신앙 간증을 담담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앞서 11절까지에서 자신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를 에베소에 체류시킨 목적이 유대 율법주의적인 이단을 경계시키기 위해서였음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 12~17절에서는 앞에서 언급되어진 유대 율법주의적 이단들과 자신이 구별됨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신의 신앙을 간증합니다. 이는 18~20절에 나오는 디모데를 향한 신앙의 권면이 보다 설득력을 갖게 하는 효과를 나타냅니다.

오늘 교회가 정한 추수감사절기를 맞이하여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 감사하는 老 사도의 모습을 살펴보고, 우리 자신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사도는 주님의 어떤 모습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큰 은혜를 받은 사도의 감사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감사 생활을 돌아보는 계기를 삼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감사 고백은, 

1. “나를 능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한다”  

12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바울 사도의 신앙 간증의 첫머리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로 시작됩니다. 원문으로 볼 때 ‘내가 감사함은’에 해당하는 ‘카린 에코’가 문장의 서두에 나와 그의 감사하는 마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사 ‘에코’는 현재 직설법 능동태로 나와 계속하여 감사하고 있음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 4:13에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한 바 있는데, 자신을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감사는 그로서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사도 자신을 능하게 하신 분이셨습니다. 여기 ‘능하게 하신’ 으로 번역된 동사가 부정과거형이란 점은 사도가 예수님으로부터 힘을 받은 사건은 이미 과거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줍니다. 

이것은 오래전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난 극적인 사건과 결부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바울은 회심과 동시에 소명을 부여받았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Bengel은 말하기를 “참된 회개와 소명은 능력을 가져다 준다” 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처럼 능력 있는 전도자로 세워주신 예수님께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끊임없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맥으로 보더라도 디모데를 격려하기 위한 목적에서 언급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사도의 말에서 어떤 교만함이나 독선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예수님” -- 이 표현은 사도 바울이 즐겨 사용하던 것으로 목회서신에 여러 번 반복되고 있을 뿐 아니라(딤후 2:1, 4:17),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 역시 사도 바울을 묘사할 때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곤 했습니다(행 9:22). 이는 곧 사도 바울에게 있어 모든 사역의 힘과 원천이 예수님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자신을 능력 있는 전도자로 세우신 예수님께 항상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가운데는 입으로는 주님의 종이요 사역자라고 말하면서 그 힘과 능력의 원천을 주님 외의 다른 곳에서 구하려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여러 학교의 졸업장이나 학위증을 걸어놓는가 하면, 심지어는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까지 외국의 무인가 신학교에서 발행한 박사 학위증을 얻으려는 자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자신의 위상과 권위를 높이기 위해 소위 사회 저명 인사들과 찍은 사진들을 크게 확대하여 이곳저곳에 걸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오순절 이후 참으로 놀라운 권세와 능력으로 복음을 선포하여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에게는 돈도, 학위도, 명예도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역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모든 어려운 환경 속에서 복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과 만왕의 왕이신 예수 이름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 모두는 영적 전투의 장에 군사로 불려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내 속에 있는 정욕과 싸워야 하고, 나아가 밖으로부터 오는 온갖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과거에 우리에게는 선을 행할 능력도 없었고, 정욕과 싸워 이길 힘도 없었습니다. 수시로 정욕에 사로잡혀 실패하고 해야 할 일에서 도망치기 일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모두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모든 약속과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능력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능력의 사람이 되었고, 열매 맺는 일군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우리를 능하게 하신 주님께 늘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나의 추악한 과거를 용서하신 주님께 감사한다” 

13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 사도의 감사하는 마음은 자신의 추악한 과거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 ‘비방자’였습니다. 이 말(블라스페몬)은 ‘상해를 입히는 말’ 이나 ‘모독하는 말’에서 왔습니다.

그는 과거에 ‘박해자’였습니다. 이 말(디옥텐)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추격하듯이 필사적으로 그 뒤를 좇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행 22:4에서,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보십시오. 그는 철저한 유대주의자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나아가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잔인하고 추악한 과거를 지닌 사람이었음을 단적으로 시사합니다.

그는 과거에 ‘폭행자’였습니다. 이 말(휘브리스텐)은 ‘오만 무례하고 모욕적으로 행동하다’ 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로서, ‘광포하고 무례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롬 1:30에서는 ‘능욕하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과거에 자신이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처럼 매우 강한 의미를 지닌 세 단어를 사용하여, 과거 자신은 도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구제불능의 사람이었음을 잘 드러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이런 바울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사도는 자신이 긍휼을 입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허물을 용서받고 이처럼 주님의 신임 받는 자가 된 것은 오로지 주님의 주권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것은 엄청난 죄입니다. 요즘 교회의 헌법에 의해서도 이것은 면직과 출교에 해당하는 범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용서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다시는 그의 죄에 대하여 묻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죄값을 다 치루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요일 1:8,9=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감사 고백 속에는 과거의 흉악한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묻어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용서함 받고 긍휼을 입었다는 확신은 그의 여러 서신서에서 계속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롬 11:30~31=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7: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고후 4: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자기가 긍휼을 입은 까닭이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사실 본절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구절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핍박하고 있을 때는 영적으로 눈이 먼 상태에 있었고, 알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한 고의적인 범죄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바울의 무지가 면책의 대상이 된다거나, 은혜 받을 자격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무지의 경우가 고의적인 경우보다 회개의 가능성이 큰 것은 사실이나,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 아니고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의 황제가 한 원로원의 집에 만찬을 위한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종들은 조금도 쉴틈없이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늙은 종이 정신없이 일하다가 응접실에 놓여 있는 값비싼 자기 하나를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끌어내어 악어가 살고 있는 연못 속에 집어 넣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종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용서를 구했으나 주인은 완강하였습니다. 그 가보를 깨뜨리는 사람은 악어의 밥이 되게 하는 것이 그 집에서 정해놓은 규례였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종을 용서해주라고 했지만, 원로원은 자기 집의 가율이라는 핑계로 황제의 부탁까지 거절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황제는 또 다른 가보인 자기를 일부러 깨뜨렸습니다. 그리고는 주인에게 말합니다. “나도 이 집의 가보를 깨뜨렸으니 저 종과 함께 연못 속에 던져 나를 죽이라!”  

아무리 그 집의 가보를 깨뜨렸다고 해도 황제를 죽일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원로원은 그 종을 용서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구약의 법대로 따져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되시고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바울 사도는 과거 자신의 추악한 모습과 현재의 사도된 자신을 비교·대조하면서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주님의 은혜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자신을 향한 주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다는 사도의 마음을 잘 드러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바울의 믿음과 사랑에도 불을 붙였습니다. 주님은 바울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세워 주셨습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도 능히 이길 수 있는 믿음의 힘이 바울 속에 자리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바울의 사랑을 더욱 불일 듯 하게 하셨습니다. 어떤 핍박이나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섬김의 삶을 살도록 사랑의 힘을 부여하셨습니다.  

주석가 헨드릭슨은 14절을 해석하면서, “바울 신학에 있어 은혜는 뿌리요 믿음과 사랑은 줄기요, 선한 행실들은 구원 나무의 열매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감사 생활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의 과거 불순종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베푸신 주님의 사랑 앞에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3. “자격없는 나에게 직분을 맡겨주신 주님께 감사한다” 

12절=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예수님께 대한 바울의 감사는 주님께서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주심과 자신에게 직분을 맡기신 것에서 기인합니다. ‘충성되이’(피스톤) 란 말은 ‘신실한’ ‘믿을 만한’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믿을 만한 존재로 여겨주셨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것이 바울에게는 감격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 속에서 사도가 될만한 어떤 자격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죄인이며, 얼마나 가증한 존재인가를 회심 후 수십년이 지나도록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15절=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여기 ‘괴수’(프로토스)라는 말은 ‘서열상으로 첫째’를 뜻합니다. 바울은 자신이야말로 죄인 중에 우두머리 죄인이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엡3:8) 라는 자기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연륜이 깊어질수록 그리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죄된 상태에 대한 자각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본문이 A.D.60년대 중반에 기록된 서신임을 감안한다면, 사도로서 오랜 세월 일하여 왔지만 지금도 자신의 그 무지하고 치욕스러웠던 과거를 후회하고 애통해하는 모습은 바울의 자기 인식이 얼마나 깊은 겸손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그는 여전히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헨드릭슨의 지적대로,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완전히 용서받은’ 죄인이라도 현재에 ‘여전히 용서받는’ 죄인임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같이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해 철저하게 인식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주체하기 어려운 큰 기쁨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그는 자격 없는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주신 하나님께 말할 수 없는 감사를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거기에 영광의 복음을 전하는 영예스러운 사도의 직분까지 주셨으니 바울의 감사와 감격이 어떠했겠습니까!

사냥군이 개 두 마리를 길렀습니다. 한 마리에게는 사냥을 가르치고 다른 한 마리는 집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냥군은 사냥해 온 것 중에서 한 몫을 언제나 집 지키는 개에게 주곤 하였습니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냥개가 집 지키는 개에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내가 고생 고생하여 잡아온 것을 아무 일도 안한 네가 먹다니 말이 되느냐?" 그러자 집 지키는 개가 대답합니다. “그 말은 나한테 하지 말고 주인한테 하렴. 나는 네 것을 먹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 것을 먹는 거란 말이야.”

우리 모두는 자격이 있어 직분을 맡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고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 직분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교부시대 탁월한 설교자로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크리소스톰이 기독교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당하여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게 전도하라고 이곳에 저를 파송해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도 쉬지 않고 전도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성도의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순교라고 했는데, 저같은 사람을 순교의 반열에 동참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결국 크리소스톰은 사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평온하였고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교수형이 집행되려고 할 때 갑자기 위에서부터 사형 집행 중지령이 내렸습니다. 그때도 크리소스톰은 눈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종에게 할 일이 더 남았다는 것입니까? 죽도록 충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여러분, 살아도, 옥에 갇혀도, 죽게 되어도 감사하는 마음 -- 이것이 성도의 마음이어야 하겠습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에게는 자신을 능하게 하시고 직분을 맡기신 주님의 의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16절=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께서 바울을 택하여 긍휼을 베푸셔서 직분을 맡기신 것은 후에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속에서 성취될 구원 사역의 실례요 모형이요 모델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런 자각이 있습니까? 주께서 내게 이 직분을 주신 것이 나보다 뒤에 따라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함이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러한 자기 인식이 있을 때 우리는 더욱 크게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사는 생활 속에 나타나는 표피적인 사건들에 좌우될 것이 아니라 바울처럼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도 바울처럼 세월이 주는 타성과 매너리즘에 빠져 처음의 신앙과 열정, 사명감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은 기도할 때 ‘주님, 제발 저를 아마추어 목사로 만들어주십시오’ 라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눈물겨운 호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목사님은 주님께서 우리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모습을 보며 판단하시는 분이심을 알고 있는 분임에 틀림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능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합시다.
우리의 과거 허물을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신 주님께 감사합시다.
우리의 부족함을 허물치 않으시고 직분을 맡기신 주님께 뜨거운 감사와 찬송을 올립시다. 

마라나타, 주님이 속히 오십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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