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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소서! (행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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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소서! (행 2:1-4)

: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 모두의 가정마다 함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여러분의 가정과 이 민족과 역사 위에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는 가정의 달, 5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아내와 남편의 관계, 자녀와 부모의 관계, 형제와 자매의 관계 등등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관계가 성령 안에서 서로 섬기는 관계라고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5장과 6장에 나오는 모든 관계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는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모든 관계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는 관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하심을 통하여(엡 5:18b)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통하여 아내와 남편이 서로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역시 성령의 충만을 통하여 자식과 부모가 서로에게 주신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도리이기에 지켜야 하고, 계명이기에 반드시 하여야 할 일이지만, 이 모든 것은 성령 충만을 통하여서만 온전히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모든 관계의 기초입니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교회에서도 성령으로 충만하여야 모든 관계를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 충만이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 지를 깨닫고 성령의 충만을 갈망하여야 합니다.
  
I. 갈망
  
교회가 성령 충만을 갈망하였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절 말씀입니다.

: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임하심으로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부활하셔서 사십 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다락방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대략 열흘 정도 계속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렀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을 기준으로 이후 오십 일째가 되는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유월절 전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과 함께 지내신 기간이 사십 일입니다. 오십 일에서 사십 일을 빼면 열흘입니다. 이 열흘 간 이 땅에 남은 제자들의 기도는 계속 되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을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1. 성령 충만은 사모하여야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바라고 기대하여야 할 것은 아주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를 잘 가르치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그래서 자녀의 뒷바라지를 하는데 온갖 희생을 다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에 성공하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업에 온 열정을 다 쏟습니다. 어떤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원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야망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건강에 좋다는 것을 찾아다니는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열과 성의를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바라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하여 열과 성의를 당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열과 성의를 다하여 사모하여야 할 것이 성령 충만함입니다. 처음 성령 충만을 경험하였던 사람들의 자세는 분명합니다. 사도행전 1:14 말씀입니다.

(행 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던 것이 바로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였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의자 옆에 앉아있던 개가 루터가 식사하는 모습을 열심히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루터의 손이 밥그릇으로 가면 개의 눈이 밥그릇으로, 루터의 손이 입으로 가면 또 개의 눈이 입으로 갑니다. 루터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개의 눈이 따라다녔습니다. 그 모습을 본 루터가 개에게 감동되었습니다. 개가 자신의 행동을 그렇게 열심히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에게 고기 한 점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정신없이 그것을 먹어치우고는 또 다시 와서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때 루터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개가 내 손을 쳐다보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만 바라보았더라면 하나님은 내게 더 크게 감동하셨을 것이다.”

비유가 좀 그렇습니다만, 주인이 먹을 것을 던져 주기를 바라는 개처럼 하나님의 손을 바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개는 밥 먹는 주인의 손을 쳐다보는 동안 일절 잡념이 없는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온갖 잡된 생각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바라고 원한다는 그것을 우리는 정말로 바라고 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정말로 바라고 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위하여 열과 성의를 다하여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원하고 바라야 할 것은 성령 충만함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공부 잘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돈 벌기를 원하는 사람은 돈을 버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원한다면 성령 충만하게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 충만을 위하여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성령 충만은 우리 힘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라고 원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지만 주시는 것은 주시는 분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주권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II. 주권
  
성령 충만함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우리가 노력하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하게 바라야 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시는 분께 달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여기에는 처음으로 성령님이 임하셨던 모습이 있습니다. 성령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 그곳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주목하려는 말은 ‘홀연히[a[fnw/압흐노]’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기대하지도 않는데 갑자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성령의 임재를 기대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들은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성령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기대하여야 하는 지도 모르는 형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바라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위로부터 주시는 능력을 사모하였지만 위로부터 주시는 능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의 생각과 경험으로는 불명확한 그 무엇인가가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1. 성령 충만은 홀연히 임하였습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그는 돈까지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윤리나, 권력이나,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 어떤 문제가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바람이 임의로 분다는 말은 ‘바람은 저 불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분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시간에, 성령님께서 기뻐하는 사람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 뒷동산에 올라가서 연을 날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아주 커다란 연을 날려보고 싶었습니다. 대나무를 쪼개고 창호지를 이어 붙어서 커다란 연을 만들었습니다. 욕심껏 아주 커더란 방패연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멋지게 띄워보려고 뒷동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연을 날려보려고 해도 연이 날지를 않습니다. 연이 날지 않으니 어떻게 합니까? 논바닥에 가서 연을 끌고 달려보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달리기는 쉽게 지치고 말았습니다. 연은 논바닥에 끌리면서 처박혀서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연을 만들 수 있지만 바람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열심히 연을 만드는 것은 바람이 불어 올 때 바람에 날리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은 연을 만들어 바람이 불면 날릴 뿐입니다. 우리가 바람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다만 바람이 불 때 그 바람에 날리기 위하여 열심히 연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바람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바람이 불어와서 그 능력으로 우리를 채워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2절 말씀에서 다음으로 주목하려는 말은 ‘하늘로부터’라는 말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성령의 강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늘[oujranov"/우라노스]은 땅과 구별되는 하늘이 아닙니다. 단지 위로부터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강림은 하나님께로부터 있었습니다.


2. 성령 충만은 하늘로부터 임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강림 또는 성령의 충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시는 은혜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5:8 말씀입니다.

(행 15: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기뻐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이것을 이처럼 강조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성령의 임재를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사모하고 간절하게 원하여한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허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 것도 반드시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성령을 조정하려는 듯한 태도를 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종이 아니라 우리가 순종하여야 할 주인입니다. 성령 충만함은 우리가 원하면 가질 수 있은 물건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이 원하시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사모하되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사모합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성령의 충만함은 달리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2절 말씀입니다.

: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이 말씀은 성령의 강림을 ‘급하고 강한 바람’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다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강한 바람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였지만 역시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어떤 소리였지만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다시 3절 말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여기에서도 성령의 강림은 ‘불의 혀’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것은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이것은 불길이 솟아오를 때 불꽃의 여러 갈래들이 넘실거리는 것과 같은 그 무엇이 있습니다. 

성령의 강림, 그것은 어떤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소리라고 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강림, 그것은 어떤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모습이라고 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신비였습니다. 무엇인가 분명히 있었지만 일반적인 이론이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신비입니다.


3. 성령 충만은 신비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신비를 가졌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는 분명한 실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힘이나 지혜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세계는 보통의 이론이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일이라면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신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 역시 신비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방언을 하게 될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저는 방언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교만하게도 “저는 방언을 안 해도 하나님을 믿을 사람이니 방언 같은 것은 안 주셔도 상관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중에 제 혀가 꼬이고 일본말 비슷한 소리가 나오자 저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방언을 주시더라도 제발 일본 말 비슷한 방언은 하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나타나심은 어떤 면에서 저의 생각을 훨씬 뛰어 넘는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모하고 바라되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떼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와 사랑과 긍휼을 베푸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해 주시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바라는 것입니다.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함이 우리 모두에게 더욱 간절하기를 소원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우리가 알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이기만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III. 체험
  
전혀 기도하기에 힘썼던 사람들이 홀연히 하늘로부터 오시는 것을 그들의 몸으로 경험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2절 말씀입니다.

: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그들이 모였던 온 집을 가득 채우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었을 소리가 있었습니다.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온 집에 가득한 소리라면 거기에 있는 사람이라면 다 들었습니다. 

1. 성령 충만은 온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종종 공동체적이십니다. 한 가정이, 한 교회가, 한 사회가 전체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라마나욧’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라마는 사무엘의 출생지이자 고향입니다. 사무엘은 선지자이자 사사로써 벧엘, 길갈, 미스바 등을 순회하면서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기름 부어 세운 사울 왕이 타락하자 고향 라마로 다시 돌아와 나욧을 세웠습니다. 나욧이라는 말은 ‘거주지, 거처’라는 말입니다. 이곳은 사무엘이 후진을 양성하였던 영적 훈련소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이곳 라마 나욧으로 온 적이 있습니다. 이에 사울은 다윗을 잡기 위하여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사울의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사울도 이곳에 왔다가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는 걸어가며 예언하였습니다(삼상 19:23). 라마 나욧은 구약에서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장소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특별히 거룩한 장소로 신성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가정이, 사회가, 민족이 공동체로 성령을 경험하기를 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라마 나욧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에게 공동체로 임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뜨거운 성령의 공동체가 되어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성령을 체험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공동체적이자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다시 3절 말씀입니다.

: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성령의 충만은 그 집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소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듣는 소리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이 한 사람 한 사람 위에 각각 임하였습니다. 각 사람 위에 임한 것입니다.


2. 성령 충만은 각 사람 위에 임하였습니다.

천지 창조 이전부터 성령이 역사하지 않은 시대와 지역은 없었습니다. 천지 창조 이전에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창 1:2)하셨습니다. 구약의 시대에도 성령은 역사하셨습니다. 라마 나욧에서처럼 사람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각 사람 위에 임하셔서 머물러 계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각 사람에게 머물러 계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임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6입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이제, 각 사람에게 임하여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시고 함께 계실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의 충만의 여러 증거들 중에 하나인 방언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은 체험되어 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원함은 있으나 역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것이 모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성령의 나타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지만, 성도는 마땅히 성령의 나타나심을 갈망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바람을 일으킬 수는 없지만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돛을 펼칠 수는 있습니다. 우리의 갈망은 바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맞을 돛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돛을 준비하고 하나님께서 활짝 펼쳐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으로 충만함을 허락하시기를 성령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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