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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절] 은혜로 말미암은 감사 (고전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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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말미암은 감사 (고전 1:4-7)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생각을 남의 머리에 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돈을 자기 주머니에 넣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일을 해내는 사람을 선생님이라 하고, 두 번째 일을 해내는 사람을 사장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의 생각을 남의 머리에 넣는 일과 남의 돈을 자기 주머니에 넣는 이 두 가지 일을 다 해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 이름은 마누라라고 합니다. 
여기에 더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생님과 싸우는 것은 배우기 싫은 것이요, 사장님과 싸우는 것은 돈 벌기 싫은 것이며, 마누라와 싸우는 것은 살기 싫은 것이라는 재밌는 이야기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며 살아가는 데는 별의 별 일이 다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순리대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아웅다웅하면서도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사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 나름의 감사의 모습이 있고, 행복과 즐거움이 있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신앙의 삶이란 더욱 그렇습니다. 복이 있는 삶에는 항상 감사가 따르며, 감사가 없는 복은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참 신앙이란 반드시 감사하는 마음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미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미신들에는 하나같이 간절한 기원만 있고 감사는 없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그것은 질병이나 실패나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믿어지지 않는 불신앙으로,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는 막힌 귀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 한량없는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마냥 울적해 하고 불평불만이나 원망으로 가득 찬 마음 때문에 추호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물질의 소유만이 복입니까? 아니면 내가 기뻐할 수 있고, 내가 감사할 수 있는 일이 복입니까? 진실한 의미에서 복이란 후자입니다. 

요즈음 언론에 연일 터져 나오는 소위 돈을 가진 대기업 오너들의 욕심이 결코 복이 아니라 얼마나 추잡한 인간의 모습인지를 볼 때 씁쓸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소유는 절대로 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에게 주신 복이라고 생각한다면 감사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복이 되는 것이지 감사하지 않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봅니다. 우리의 감사는 어떤 차원의 감사를 하고 있는지, 진정한 감사는 어떤 감사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먼저 우리는 때때로 얻었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사업에 성공했기 때문에, 건강을 되찾았기 때문에, 혹은 하는 일이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차원입니다. 이것도 귀중한 감사입니다. 그러나 받았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만이 감사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진실하지 못한 감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늘 자신의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평생에 소망했던 사람이 불명예스러운 행위로 거금을 모아서 부자가 되었다고 가정할 때 이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한 사람입니까? 실패한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속사람은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자기 소원과 생의 목표가 뚜렷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무작정 얻은 것 때문에 감사한다는 것은 이런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 20:35의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받아서 드리는 감사보다 줄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가 훨씬 더 복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받는 삶은 소극적인 삶입니다. 

하지만 주는 삶은 적극적인 삶입니다. 받는 자는 불평과 원망이 있을 수 있지만 주는 자의 마음은 즐거움과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삶이 복이고, 어디에 더 감사가 있겠습니까?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기를 원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나에게 남을 대접하고 도와줄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에게는 깨달음에서 얻어지는 감사도 있습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많은 은혜 가운데 살다가 은혜 중에 죽는다 할지라도 마지막까지 깨달음이 없으면 끝끝내 감사하지 못하고 죽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지는 이성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똑같이 먹고 마시고 살지만 음식을 만들어 준 사람의 정성과 사랑을 깨닫고 기쁨과 감사를 느끼는 것이 인간이라면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동물입니다. 그러니 깨닫지 못하는 인간, 즉 이성이 없는 존재를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항상 자신의 수고와 정비례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무 수고도 없이 얻은 부와 행복에 대한 가치를 느끼는 것과 와 그것을 얻기 위해 피땀을 흘리고 눈물로 기도한 사람이 느끼는 깨달음의 가치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전도를 열심히 해서 한 사람이라도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서 전도에 동참하지 않고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은 단순히 “참 좋다.” 라는 감정밖에는 느끼지 못한다면 그 한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며 더운 날씨에 길거리에 나가 전도하던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온 그 영혼을 보는 감격과 경건과 감사는 그 느끼는 것이 다르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루고자 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였는가가 하는 그 깊은 깨달음 속에서 감사도 커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감사하는 감사의 차원은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무엇입니까? 5절부터 7절입니다. “너희가 그 안에서 머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여기에 바울이 감사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언변이 풍족했다는 말은 세속적이고 부패한 도시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은 세상과 같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비이성적이거나, 불합리한 것이 아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서 체험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은 비합리적 이거나 비이성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지식에 풍족했다는 말도 세상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지식, 말씀에 대한 영적인 이해와 경험을 가지고 있을 만큼 성숙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성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에서 균형을 이루는 신앙인들이 되어 있음을 바울이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입니다. 신앙이란 이성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잘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그 신앙은 이단에 빠지거나 잘못된 신앙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성을 무시하는 신앙은 미신이요, 영성을 무시하는 신앙은 학문에 불과합니다. 

6절 말씀처럼 이성적인 판단과 영적인 지식이 견고한 믿음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믿음에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고린도에 처음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 고린도는 부패한 도시였습니다. 그들의 죄악상이 어찌나 심했든지 고전2:3절에서 밝히듯이 바울이 심히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2:2절의 말씀에 있듯이 예수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전하기로 결심하고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지금은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있고 에베소에 머물러 있는 가운데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면서 여전히 문제가 있고, 분쟁이 있지만 자신의 어떠한 영적인 충고도, 가르침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숙한 그들의 믿음이기에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게 부패하고 죄성이 가득했던 도시에 세워진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어느 새 바울이 인정할 만한 정도의 믿음이 있었다는 것과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음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맥추감사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풍족한 것을 누리며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여유를 가지고 산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감사도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은혜로 말미암은 감사가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완성되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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