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인생의 매듭을 풀어주시는 예수님 (요 4:13-27)

첨부 1


인생의 매듭을 풀어주시는 예수님 (요 4:13-27) 

지금은 건축 공사 현장에서 콘크리트를 칠 때 레미콘을 이용하기 때문에 참 편합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이 자갈과 모래, 시멘트와 물을 배합해 콘크리트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삽을 가지고 협동해서 콘크리트를 만들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숙련된 삽질은 예술이었습니다. 저도 노동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콘크리트 만드는 일을 도운 경험이 있습니다. 남들은 쉽게 하는데 저는 하기가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시멘트 부대를 푸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시멘트 부대의 끝에서 줄을 잡아당기면 부대를 봉합하고 있던 줄이 ‘트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풀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잘 되지를 않았습니다. 부대 끝에 있는 줄을 잡아당기면 도리어 더 엉켰습니다. 만약 제가 줄을 당기다가 엉키게 만들면 다른 사람이 엉킨 매듭을 이리저리 풀어 당기면 신기하게도 ‘트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풀렸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생의 줄을 잘못 풀어 인생이 꼬일 때로 꼬여 있는 한 여인을 만납니다. 여인은 인생의 줄이 꼬일 대로 꼬여 힘겹게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만나 그녀의 꼬여 있는 인생의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 결국은 ‘트르륵’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꼬여 있는 매듭을 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동네를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이 말라 우물가에 가셨습니다. 우물에는 물을 긷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본래 팔레스타인 지역은 햇볕이 너무 뜨거워 낮에는 사람들이 다니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가장 뜨거운 정오 시간에 물을 길러 우물에 나왔습니다. 그녀의 인생 줄이 꼬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녀가 물을 길러 나온 시간입니다. 6절에 보면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난 시간이 ‘여섯 시쯤 되었더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시간으로 계산하면 정오입니다. 그녀가 한 낮의 뜨거운 태양 빛을 감수하고 물을 길러 나온 것은 다른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리는 것은 그만큼 그녀의 삶이 처절한 현실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보면 그녀는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꿀 정도로 인생의 줄이 꼬인 여인이었습니다. 몸을 파는 창녀의 삶을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서 창녀의 삶을 살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녀의 인생의 줄은 스스로가 풀 수 없을 만큼 꼬일 대로 꼬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유대인 남자가 어떻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만약에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너는 나에게 도리어 물을 달라 했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그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주여, 그런 물이 있으면 내게 주셔서 목마르지 않고 또 여기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여인이 한 번 마심으로 영원이 목마르지 않는 물을 요청한 것은 자신이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난을 피해 물을 길러 오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여인은 인생의 줄이 꼬인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눈앞에 꼬여 있는 문제만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인생의 줄이 꼬이게 한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꼬여 있는 인생의 줄을 하나씩 풀어가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그녀가 요구하는 물과는 전혀 관계없는 남편을 데리고 오라하셨습니다.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몸을 파는 여인이었기 때문에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은 말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고 있고, 남편이 없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왜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여인이 대낮의 뜨거운 날씨에 우물에 물을 길러 나온 근본적인 원인이 그녀의 문란한 성 생활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인은 결과만을 가지고 한숨을 쉬며 신세를 타령했는데 예수님을 그런 삶을 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고쳐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문란한 사생활을 정확하게 꽤 뚫어 보시는 예수님에게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고는 자신의 삶의 정황을 이렇게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주제를 예배로 옮겨 갑니다. 아마 여인이 난대 없이 예배에 대해 말한 것은 비록 자신이 창녀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조상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이 산에서 드리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산은 그림신 산입니다. 수가 마을은 구약의 세겜을 말합니다. 세겜 마을의 양 옆에는 그림신 산과 에벨 산이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그림심 산은 축복의 산이고 에벨 산은 저주의 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림신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만을 진정한 예배라고 말하며 그림신 산에서 예배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배를 인정하지 않고 저주하며 비웃었습니다. 

여인은 이런 갈등의 분위기를 알고 있기에 예배는 그림심 산에서 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예루살렘 성에서 드려야 하는가? 라고 물은 것입니다. 이 질문에서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영적인 문제를 볼 수 있습니다. 여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였습니다. 그녀의 생각에 어느 특별한 장소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곳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신령한 곳입니까? 라고 질문했던 것입니다.      

그녀의 질문에 예수님은 21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또 23절의 말을 보면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여인은 예배하는 장소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여기에 가면 은혜가 있을까? 저곳에 가면 은혜가 있을까? 어느 곳이 신령한 곳인가? 를 찾았습니다. 그 장소에 가기만 하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신령한 장소가 아니라 신령한 마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장소가 있어도 예배하는 자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진실하지 못하면 그 거룩한 장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장소가 지하이든, 일을 하는 공장과 사무실이든, 냄새가 나는 창고이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의 마음이 영적으로 열려 있고 진실하면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그 예배를 받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마음과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을 솔로몬을 통해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임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곳은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는 기브온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솔로몬이 산당에서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정성을 다해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 솔로몬 왕은 진리와 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산당에 엎드린 솔로몬에게 임하셔서 예배를 기뻐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소원을 들어 주셨고 축복하셨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거룩한 예배는 그의 인생을 축복되게 만드는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솔로몬은 신령과 진정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거대한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습니다. 아버지 다윗 왕이 준비해 놓은 가장 좋은 재료를 가지고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시간에 예루살렘 성전에 나가 제물을 드리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마음에 신령과 진정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동시에 온갖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는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있었고 모든 제사 의식을 거창하게 지냈지만 그 제사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령한 마음과 진실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주셨던 복을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나라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있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부분은 23절 후반 절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을 향해 신령과 진정으로, 영과 진실함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찾는다’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가 잃어버린 아들을 찾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부모의 심정으로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간절히 예배하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배 순서 하나하나에 집중하여 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집중해서 예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배를 드리며 오만가지 생각을 다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왔지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사람들의 낯을 피해 뜨거운 대낮에 우물에 물을 길러 온 진정한 이유는 잘못된 영적인 문제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적으로 병들고 틀어지면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고,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바른 삶을 살 수 없으면 부끄러운 모습이 되고 사람을 피하고 하나님을 피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모든 삶의 중심입니다. 영적인 모습이 제대로 세워지려면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경배하는 예배가 진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는 신앙이 절대로 온전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배를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수가 성의 여인의 고통은 예배가 무너진 잘못된 영적인 부분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진리와 영으로 드리는 예배를 회복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이며 축복의 통로입니다. 저는 우리 행복한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예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배다운 예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배를 통해 깨닫고 얻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감사함으로 감당하며 살아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