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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해 (요 17: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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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신 자들을 위해 (요 17:4-10)


빌 브라이트 박사는 국제대학생선교회 창립자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크리스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그의 헌신을 통해 지난 시절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사영리 소책자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전도 소개서입니다. 사영리와 예수 영화 등을 통해 1억5000만 명 이상이 그리스도께 돌아왔다고 합니다.

어느 날 미국 새들백교회의 릭 워런 목사가 브라이트 박사에게 물었습니다. “빌, 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삶에 그렇게 많은 복을 주시는 걸까요.” 브라이트 박사가 대답했습니다.
“젊었을 때 나는 하나님과 계약을 했네. 나는 계약서를 쓰고 밑에 서명했네. 계약서에는 ‘오늘부터 나 빌 브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라고 썼지. 계약서에 사인한 이후로 나는 그 계약에 충실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어.”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계약서에 사인하고 그 계약에 충실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인한 그에게는 소유권과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 존재의 소유권자인 주님께서 삶 전체를 쓰실 수 있도록 드렸습니다. 주님의 통제에 온전히 순복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바로 주님의 종입니다. 
바울은 그처럼 가고 싶었던 로마교회였지만 주인 되는 주께서 막으셨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고린도에서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에는 주인 되는 주께서 새 일을 행하십니다. 바울은 기다리다가 당시 로마교회에서 추방되어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는 복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이 부부를 통해 자신이 가고자 한 로마교회의 상황을 소상히 알게 됐습니다.

만약 바울이 자기 고집대로 로마에 갔더라도 유대인들을 모두 로마에서 추방시키라는 글라디우스 황제의 명에 따라 사역은 고사하고 쫓겨오는 실패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막으심에 순종했기에 사도행전 후반부의 기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비록 죄수의 몸이긴 하였지만 로마에 가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고 성령님께 순종함으로 이러한 창조적인 역사가 따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종은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건과 사건 속에서 주님의 통제를 받는 인물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서 계약서를 쓰고 밑에 서명한 종들이 되십시오. 그 계약서에 사인한 대로 이 한 해를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위대한 역사는 바로 종들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창조될 것입니다.

먼저 주님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다 이루었다고 기도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하라고 하신 일을 이루고 그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위해 잡히시기 직전에 자기의 중심을 다하여 하나님께 드리시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왜 드리느냐 하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해 영생을 누리도록 하는 일을 다 이루었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우리들로 충만히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세상에서 얻는 기쁨도 많이 있습니다. 한데 문제는 그 기쁨이 잠시로 그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누리고 얻는 것으로 만족함을 얻고 기쁨을 누리기도 하지만 그 만족과 기쁨도 다시금 새로운 바람,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속에 묻혀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것으로도 흔들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 안에서 영생 얻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기쁨과 평안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뜻을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을 이루어나가는 것보다 더 큰 보람이 어디 있겠으며 때를 따라 이윽고 열매를 맺는 그 열매를 얻는 기쁨 또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그냥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쉬운 일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편하게 전기밥솥으로 맛 나는 밥을 하지만 그 전기밥솥이 그러한 역할을 하기까지 수고한 기술자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드디어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고 이윽고 소비자들을 통해 자기들의 수고가 평가를 받고 그 결과가 아주 좋을 때 기술자들은 마음이 아주 흡족합니다. 그런데 그게 한 사람만의 수고가 아닙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거 짜증스러움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중간에 포기해 버리면 보란 듯이 작품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족할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는 과정도 그렇습니다. 

요즘 메뉴엘이라는 말을 씁니다. 레시피라는 말도 씁니다. 어떤 제품들에는 사용 설명서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설명서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밥솥이라고 해도 사용 설명서대로 하지 않으면 좋은 밥이 되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사용 설명서대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용 설명서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말은 먼저 글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기계가 있어도 기계 작동법을 알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자동차만 하더라도 우리가 운전을 배웁니다. 

그런데 차를 어떻게 움직이면 어떻게 간다고 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여러 날 많은 돈을 들여서 우리가 배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베웠다고 해서 바로 운전을 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면허증도 따야 하는데 면허증이 있다고 운전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차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차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내 몸에 익혀야 운전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운전이 몸에 배도록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우리가 긴장을 하면서 많은 시간 연수도 받아야 하며 또 실제 운전을 하면서도 처음에는 얼마나 긴장을 합니까? 그렇게 몸에 익으면 운전 자체가 스트레스가 아닌 즐거움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했던 사람으로서 이제 신분이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세상 사람처럼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몸에 배여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도 그렇게 반응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새롭게 하늘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우리가 익혀나간다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이냐 하면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영어를 배웁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별로 영어를 쓸 일이 없습니다. 그냥 한 두 단어를 섞어서 쓰는 정도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막상 외국 사람 만나서 이야기를 할 경우가 있으면 당황부터 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외국에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말을 쓸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 나라 말을 해야 합니다. 그거 익혀 나가는 것이 쉽겠습니까? 엄청난 스트레스입니다. 머리에서는 뱅뱅 도는데 입으로 말이 되어 나오기까지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도 몇 번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한두 마디씩 말을 하게 되고 그렇게 그 사회에 적응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합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도 없고 어려움은 또 얼마나 많고 이런 저런 핍박과 고통도 따르고 왜 무슨 일을 하려면 그렇게 걸리는 일은 또 많은지 모릅니다. 거기다가 같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모릅니다.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어찌 보면 더 이악스럽게만 느껴집니다. 내가 말씀대로 바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안팎에서 주어지는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으면 그냥 조용히 손을 잡아주면 안 되는 것인가요? 왜 걷기도 힘든 사람에게 딴죽은 거냐고요? 그런데 그게 세상입니다. 있는 사람 앞에서는 한 없이 비굴해지면서도 약한 사람 없는 사람은 아주 깔아뭉개려고 합니다. 이제 걸음마 하는 사람에게 달리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고요? 
하지만 그럴 때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 기쁨과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우리들이 가야할 길은 십자가의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는데 주님은 그러한 우리에게 내 기쁨과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 말은 주님은 기쁨으로 하나님이 하라고 주신 일을 기쁨으로 이루어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정말로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주님에게는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언제 하나가 아니라 이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쉼을 얻을 수 있고 평안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받는 기쁨이 아니라 주는 기쁨이요 즐기는 기쁨입니다. 

보세요 주님은 알고 있단 말입니다. 자기 앞에 얼마나 험한 일이 놓여 있는지 이제 다락방을 나서게 되면 곧 로마 군병에게 잡힐 것입니다. 자기 제자 중 하나가 자기를 팔아먹는 것이 아닙니까? 배신의 아픔 가장 사랑하는 자가 자기를 떠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를 팔아먹는데 그것처럼 마음 아픈 일이 어디 있어요? 사랑하는 자녀 결혼 시켜서 분가하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처음에는 얼마나 섭섭해요? 그런데 그건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발전적인 나뉨이 아닙니까? 새로운 도약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라고 하는 것들이 자기가 고난을 당하게 되면 다 도망치게 될 것이고 그나마 한 녀석은 자기를 팔아먹을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이것처럼 힘든 것이 어디 있어요? 기껏 사랑을 주고 가르쳐 놨더니 이게 문제 저게 문제라고 하면서 이래서 힘들고 저래서 힘들다고 하면서 자기 곁을 떠날 것을 다 알고 있는데 거기다가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온갖 매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길을 기쁨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즐겁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일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셨기에 떠나실 때까지도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뻔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제자들 아닙니까? 그런데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어떠한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이루었더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로 올리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시지 않습니까? 그것을 알기에 예수님은 기쁨으로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면서 하라고 하신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필연적으로 핍박이 따르게 되어 있고 걸림돌이 놓이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생명을 주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자녀된 우리들에게 각각의 삶의 현장에서 나름대로 일을 맡겨주셔서 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은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소위 그 일에 달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쉽습니까? 그런데 사탄은 속삭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이 마땅히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고 했는데 복을 주사 누리게 하신다고 했는데 어째서 네게는 그토록 어려움만 있고 마음 상할 일만 있냐? 한번 너를 돌아봐라 그러면서도 네 믿음을 지킬 수가 있냐? 봐라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까지 왔지만 그 결과가 뭐냐? 왜 가뭄이 들어 먹고 살기도 힘들기만 한 건지 생각해 봐라. 하는 일도 마땅치 않은 것은 또 뭐냐?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지 않니? 

한데 여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손을 잡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버려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사랑하는 아들을 이처럼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버려주시는 줄 아십니까? 계속되는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빨리 말씀의 핸들을 잡아야 합니다. 내 방식대로가 아닙니다. 말씀대로 해야 사고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힘들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운동도요 처음 코치를 받아보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입니다. 그런데요 그걸 참고 견디고 코치의 가르침대로 따라가노라면 어느 때부터인가는 쑥쑥 자라는 겁니다. 

기억하세요.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를 주라고 부르면서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주신 그 일이 없다면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의 종도 자녀도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 일을 행할 때 핍박이 오면 그 일을 팽개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구원은 받을지 몰라도 첫째 부활에 동참하지도 못하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으며, 천년 왕국에도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하늘나라의 기업을 세세토록 물려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그 일을 이루며 사는 우리요 하나님이 이끌어주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든 일을 이루어나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이 기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발 사람들 보지 마십시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천사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실망할만한 모습들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거 가지고 말들 하지 마세요. 우리도 똑같아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우리 안에서도 사탄이라는 녀석이 속삭이고 있다니까요? 그런데 왜 거기에 귀를 기울여요? 사탄은 불평케 하는 영입니다. 판단하고 시비하는 영입니다. 보세요. 하나님 앞에서 욥을 참소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니까 그렇지 그 사랑이 거두어지면 똑같을 걸요. 그런 마음들 버리시길 바랍니다. 

마 25장에 천국의 비유 중에 달란트의 비유가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종들에게 각각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나눠주는데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당당하게 맞섰습니다. 왜 나한테는 이렇게 많이 맡기느냐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래서 힘들고 저래서 힘들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거 돈이라고 생각하니까 많은 돈 맡았으니 더 장사하기 쉽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만큼 더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를 맡은 자는 어땠습니까? 그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땅에 묻어두었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도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결국 피해 도망친 겁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회피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람을 불러서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아브람이 순종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나안 땅에 도착하고 나서 보니 이게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우르처럼 번화한 곳도 아닙니다. 하란처럼 풍요로운 곳도 아닙니다. 결국 그는 큰 어려움에 맞닥뜨리게 된 것입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과의 약속의 장소를 떠납니다. 그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신앙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살짝 하나님의 뜻에서 비켜선 것입니다. 왜요? 살고 봐야 하니까요. 가뭄에 용빼는 재주가 없으니까요. 그래 물 있는 곳을 찾아 애굽까지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다시 벧엘과 아이 사이 처음 하나님께 단을 쌓았던 곳으로 돌아오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 단을 쌓고 돌아섰던 바로 그 자리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살길을 찾아 떠났던 그 출발점으로 아브람을 돌아오게 만드십니다. 그리고는 거기서부터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만들어 가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달란트를 심어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물론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너희가 일한대로 갚아 주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십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자는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단순히 약속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과 함께 우리들에게 자녀 되는 권세를 주셨을 뿐 아니라 권능을 주셔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능히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을 할 때 많은 수모가 있었으며 많은 고통과 고난이 있었지만 끝까지 그 일을 이루려 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결국은 승리하셨고 지금은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 주님이 또한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성령께서 우리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모든 직분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맡겨 주신 일이기에 죽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그 일을 감당해 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을 내가 하여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제 창세전에 나에게 보여줬던 영화로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기도하시던 주님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을 것이요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곧 자녀의 삶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만 하면 됩니다. 그 일에는 어려움과 환난과 핍박이 따르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네가 내일을 한다면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요, 그 일이 어렵기 때문에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힘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감당해 나가노라면 내가 생각지도 못하던 역사가 나타나더란 말입니다. 

건강을 주시기도 하고 필요한 것으로 채우시기도 하고 자녀들의 길을 더욱 아름답게 여시기도 하고 좋은 조력자를 붙여 주시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만들어 가십니다. 누구에게 그렇게 이루시느냐 하면 기쁨과 감사함으로 따르는 자에게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하십시오. 

생각해 보세요. 불평이 듣기에 좋습니까 감사가 듣기에 좋습니까? 그러기에 불평할 수밖에 없는데도 감사하면 하나님이 보시고 그러십니다. 어 저 친구 봐라 불평할 만도 한데 오히려 감사하네 아주 기특하구만. 저 친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해주어야겠네, 지금 주님의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을 다 기쁨으로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이 나를 영화롭게 하실 차례입니다. 이주님이 기도처럼 당당하게 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심으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뿌리치지 아니하고 그 일을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므로 그 아버지께서 우리들의 삶을 영화롭게 하는 귀한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자신을 영화롭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1절부터 다시 보십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영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자기 혼자의 뜻과 계획대로 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셔도 그것을 받은 다음에 뭘 하고 싶다거나 그가 하신 일에 대하여 상급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고  아버지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왜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영광이 우리에게 소원이 되고 우리의 갈증이 나며 우리의 바라는 것이 되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께 요구하신 이 영광은 요한복음 17장의 모든 기도의 핵심이요, 초점입니다. 11절에서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으며, 21절에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하였으며 22절에서는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우리 안에 있어 다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는 것’이란 그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이 가까워지는 것으로서 곧 하나가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부부가 하나가 된다고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표현입니다. 이것을 영생이라고 그러며 하나가 된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가 되는 데는 어떤 의미에서 동등한 수준, 동등한 위치, 동등한 영광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영광을 요구하신 것은 우리 성도들도 그 영광의 자리에 가야 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하나됨으로써 되는 일입니다.
지금 주님은 기도를 통해 그런 의미에서 하나 되는 것과 그것이 영생이며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서 온 것이며, 저들을 아비지의 것인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 왔으며, 저들을 죄 중에서 꺼내 아버지의 것으로 하려고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뻔한 이야기를 왜 자꾸 반복해서 하시느냐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시켰으며 우리들에게 알게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우리를 자녀 삼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셨는지를 말하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이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가 누리게 된 하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우리가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바로 믿을 수 있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늘 영광을 그토록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대부분이 평준화가 되었습니다만 제가 자라던 시절에는 중학교도 시험을 통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름 있는 학교는요 그 교복을 입고 있는 자체로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요. 자식만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부모에게도 칭찬과 부러움이 섞인 말들이 주어집니다. 누구는 자식 농사 잘 지었다느니 자식이 공부 잘해서 참으로 좋겠다느니 말들을 하니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그게 영광인 거예요. 

우리는 몰라요 한국 사람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평화롭게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밖에 나가보면요 그게 눈이 보여요. 우리나라만큼 경치 좋은 곳 없습니다. 우리나라만큼 평화로운 곳 없습니다. 그런데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얼마나 이를 위해 우리가 피땀을 흘렸습니까? 대기업에 그냥 들어갑니까? 수고 없이 가능합니까? 그만큼 남들 놀 때 놀지 않고 매달린 결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평안이 주어집니까? 먼저 감사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수고는 하지 않고 열매만 따려고 하면 무엇을 거둘 수 있단 말입니까? 생각해 보세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얼마나 몸부림을 칩니까?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물론 그 수고를 억지로 하려고 하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즐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수고하는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심으면 감사함의 열매가 열립니다. 

그런데 수고는 죽도록 했는데 왜 고통만 거둡니까? 불평으로 심었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좋았는데 비료를 잘못 주었습니다. 좌절로 심으면 좌절의 열매만 걷힙니다. 보세요. 아브라함이 결국 애굽으로 도망쳤는데 그 결과가 어땠습니까? 망신만 당했습니다. 물론 사라 때문에 더욱 많은 재물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것이 화근이 되지 않습니까? 거기에 재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갈도 있었지 않아요. 결국 오늘날까지 역사를 이어오면서 부딪치는 문제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모든 특권들이 다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 것입니까?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씨를 뿌리심으로 우리가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처음부터 좋아서 허겁지겁 목마르게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 놓고도 하나님을 크게 봐주는 것인 양 믿다가 나중에 알고서 미안해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누구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다 나 때문입니다. 누구 핑계대지 마십시오. 주님은 몸소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보내신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그 결과 하늘 영광이 예수님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즐거움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공짜가 아닙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내게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훈련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이 우리들에게 고난의 과정을 거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는 금방 그 과정을 마치는데 누구는 평생을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지 못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처럼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불평으로는 얻는 것이 없습니다. 아니 있기는 있습니다. 그것 계속되는 불평거리입니다. 하지만 감사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사실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서 보지 못하고 불평만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미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이 나와 함께 걸으시며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땅히 구하지 아니하고 불평만 터뜨리고 있더란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요구하셨던 그 영광을 신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광이 우리들의 소원이 되고 소망이요 갈증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모든 신앙인들은 이같은 영광을 약속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이 말 뿐이지 실제 생활 속에서 살면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곁길로 빠지는 신앙이 되어 버리거나,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영광이라는 오해로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심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염려하십니까?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불평하고 감사할 수 있는데 왜 불평하십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환경과 조건을 바꾸어주신다는 것 이전에 우리가 그 상황에서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된다는 뜻입니다. 어렵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힘들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언가를 해 나갈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그래서 내 할 도리를 다 하는 것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없으면 없다고 짜증을 내기보다 없으면 없는대로 사는 것입니다. 왜요? 짜증을 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있다면 내 몸과 마음만 더 상하고 주위에 사람들만 더 멀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라도 먼저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시행하리라. 

그러니까 우리가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더 감사할 수밖에 없도록 우리의 환경과 조건을 바꾸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바꾸어주시는 것이 있다면 믿음 안에서의 우리의 신분의 변화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믿음 안에서 영생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따라서 감사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나가노라면 우리의 모든 삶이 자녀로서 합당한 삶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무엇입니까? 그건 우리가 너무 조급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즉각적인 응답만을 바랍니다. 하지만 보세요. 우리기 기도할 때 이미 하나님께서 움직이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열매로 나타나는 것은 때가 되어서입니다. 즉 우리들이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을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총을 다룰 줄 모르는 사람에게 총을 주면 어떻게 됩니까? 그거 사람 잡는 것 아닙니까? 

맞추라는 것은 안 맞추고 엉뚱한 것을 맞추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한강에 다리를 왜 놓았습니까? 뛰어내리기 좋으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죽을 곳이 마땅히 않아서 여기서 뛰어내려 죽으라고 만들어 놨습니까? 안전하게 건너라고 다리를 만들어놨더니 거꾸로 거기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하기야 죽으려고 빽을 쓰는 사람들이겠죠.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감사하지 않으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고통뿐이요 쓰레기뿐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감사함으로 심으렴 모든 것이 평안해집니다. 불평하지 않으니 감사하니 그저 감사할 일로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울한 노래만 부르면 내 마음도 우울해집니다. 그러나 신나는 노래를 불러보십시오. 내 마음도 신이 납니다.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능치 못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모든 필요를 따라 채우실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그렇게 하십니까? 주는 자에게입니다. 감사함으로 심는 자에게입니다. 그런데 불평불만으로만 심으면 어떻게 됩니까? 심는 그대로 거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주님의 품에서 벗어나지도 말아야 하고 주님으로부터 도망치지도 말아야 합니다. 

학교를 다니는 것과 다니지 않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영광입니까? 어느 쪽이 복입니까? 학교를 가는 쪽이 영광이요 복입니다. 그러나 학교를 가는 것만큼 희생과 제약이 많은 것도 없습니다. 시간에 맞추어 가야 되고 시험 공부도 해야 되고 숙제도 해야 되고 벌도 서고 하는 일이 매일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불행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복이라고 말합니다.

믿음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나이 백 살에 아들을 하나 낳았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아들이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하시자, 그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옛날 소풍 갈 때에 꼭두새벽부터 깨듯이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하여 산에 데려가 죽이려 하였습니다. 다니엘과 함께 포로로 잡혀 갔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유대 젊은이로서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치하에서 우상에게 절하는 것을 거절한 것 때문에 불에 타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들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풀무불인 용광로에 들어가 죽게 되는데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하시면 이 불에서도 건지실 것이요 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시길래 용광로를 가지고도 안 되었는가? 라고 물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믿음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성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받은 유산과 약속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없으며 또한 그것이 아무것도 귀하지 않아 보이는 풍토 속에 있으면서도 그 게으른 신앙을 당연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라는 것이 여러분에게 희생만 강요하거나 너 말 안 들으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강요하고 있는 정도가 결코 아닙니다. 그런 정도로 기독교가 가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 이상입니다. 여러분이 상상하고 맛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과 복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이 일을 위하여 죽음을 달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하여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 너무도 풍성하고 엄청난 것들입니다. 돌을 던지는 것으로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대단한 것입니다.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하거나 짐승의 가죽을 쓰고 죽은 정도로도 이 영광을 생각하면 그것이 아프다거나 고통스럽다거나 억울하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게으릅니까? 이것은 본성적으로 우리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경험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된 이 축복과 영광을 찾으며 확인하며 닦으면서 늘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말씀과 기도와 순종의 삶을 살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수영을 가장 빨리 배우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깊은 물 속에 데려다 집어넣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물을 먹고 허부적댑니다. 죽을 만큼 되면 건져 놓습니다. 정신 차리면 다시 집어 던집니다. 그렇게 몇 번 하면 자연스럽게 수영을 하더란 말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물속에 들어가야 수영을 배우지 땅에서 무슨 수영을 베웁니까? 

그러데 도망치면 어떻게 됩니까? 수영은 배울 생각도 못하는 것이죠. 그러니 물에 가도 그저 물에 몸만 담그다 오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신앙생활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불평하지 마십시오.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럴 정신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감사하면 불평거리가 사라집니다. 평안이 찾아옵니다. 안 된다고 하지 마세요. 못한다고 하지 마세요. 안 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더군다나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 안 되긴 뭐가 안 돼요? 내가 포기하니까 안 되고 내가 도망치니까 노상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이런 일을 반복하는 성도가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하시고 믿음으로 순종하시고 감사함으로 오늘을 살아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삼고 순간마다 의지하고 살면 천국을 누립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다”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으로서 지금도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돈 문제, 자식 문제, 결혼 문제, 직장 문제, 사업 문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문제 등으로 아무리 마음이 아프고, 아무리 가정이 깨어져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시고 우리에게 천국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매순간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천국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KTX가 레일 위를 달리는 것 같습니다. KTX는 레일 위에 있을 때 가장 부드럽고 가장 잘 달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면 가장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신앙의 가난함을 위하여 슬퍼하시고 안타까워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겉돌고 너무나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그저 불평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에 감사하십시오. 짜증나는 그 시간에 감사하시라니까요? 더 이상 도망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우리 눈에 애굽과 같고 천국과 같이 보이는 것에 홀리지 마십시오. 오히려 미련할 정도로 주님의 법칙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감사하며 사십시오. 그로인해 주님이 주시는 영광으로 풍성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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