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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음모자, 헌신자, 배신자 (마 26:1-16)

첨부 1


음모자, 헌신자, 배신자 (마 26:1-16)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교회력에 의하면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이란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부활절로 부터 46일 전-2013년은 2월 13일)을 말합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수난 주간 화요일과 수요일쯤에 있었던 일에 대한 기록으로, 세 부류의 인간 곧 음모자, 헌신자, 배신자가 등장하는데,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함께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음흉한 음모자 종교지도자들

1-2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네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수난을 네 번씩이나 거듭 예고하시고, 또 그 수난의 때와 방법까지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신 것은, 주님의 십자가 수난이 결코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온 인류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대할 때마다, 예수님이 무력해서나 무지해서 당하신 것이 아니라, 미리 아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당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수난 시점을 특별히 유월절과 결부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큰 축제일입니다. ‘유월’이라는 말은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장자 재앙시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의 집을 그냥 넘어간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일입니다. 

그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기 전날 밤에 일어났습니다. 그날 밤 애굽 사람들은 짐승이고 사람이고 처음 난 것들, 즉 장자들은 모주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재앙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문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의 집은 모두 안전했습니다. 그 결과 강퍅했던 애굽의 바로도 항복했고, 모든 애굽인들이 귀한 보물까지 내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떠나 주기를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국가 최대의 명절로 지켜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러한 유월절과, 자신의 십자가 수난을 결부시키는 것입니까? 그것은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재앙 시, 어린 양의 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이 되어 대속의 피를 흘리심으로, 죄인들이 구원받게 될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유월절 양’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유월절의 어린 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라고 했습니다. 이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흉계로 잡아 죽이고자 음모를 꾸미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5절에 보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말하기를 민란이 일어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로마에 대한 민란이 자주 일어났으며, 특히 예수님의 고향이자 공생애 기간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갈릴리 사람들이 주동이 된 반란이 성행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빌라도 때에는 그와 같은 반란이 일어나자, 빌라도 총독이 갈릴리인들을 살육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시기에는 먼 타국에 살던 유대인들은 물론, 갈릴리 지방 사람들도 함께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보통 유월절 때에는 예루살렘에 약 200만 명의 인파로 들끓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유월절 기간을 피하기로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들의 계획대로 되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갑작스런 가룟 유다의 배신은, 그들의 계획과는 반대로, 유월절에 맞추어 예수님을 죽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유월절 에, 그리스도를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 양으로 삼으시기로 작정하셨고, 결국 예수께서는 그 하나님의 섭리대로 인류의 구속을 위한 유월절 양으로 희생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죄 없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흉계를 꾸미되, 명절에는 말자 하면서 권모술수를 좋아하던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결국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승천 후에 일어난 로마에 대한 유대 민족의 반란 때에, 거의가 자기 동족들에게 살해당하고, 살아남은 자들도 로마 군대에 의해 무참히 살육 당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권모술수와 악한 음모를 일삼는 자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항상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악한 음모에 가담하거나, 동참하는 일을 절대로 피해야 합니다. 

2. 아름다운 헌신자 마리아

6-7절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이자 마르다의 동생이었던 베다니의 마리아로 보입니다. 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향유는, 요한복음에 보면 당시 가격으로 3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이란 노동자의 10개월 월급과 맞먹는 큰돈이었습니다. 이처럼 귀한 향유를 마리아는 아낌없이 주님께 부어드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이처럼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리아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연인들은 상대방에 대해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 합니다. 못주어서 안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마음도 동일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에게 주는 것이 아깝지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든 주님께 드리기를 기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자기의 재산도 포기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드려서라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주님께 드려도 아까워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주님께 드리는데 인색한 마음, 아까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억지로, 다른 사람의 눈 때문에, 형식적으로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와 같이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진정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뇨?”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8-9절에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주님께 향유를 부은 일에 대한 제자들의 비판입니다. 그들은 비싼 향유를 주님께 부은 일을 쓸데없는 허비라고 하였습니다. 허비 또는 낭비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에, 물질과 힘과 시간 등을 투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주님께 물질을 드리는 일이 허비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없는 것도 있게 하시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것을 드려도, 풍성하게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해 보십시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겨우 그 어린아이의 배만 채울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께 드렸더니, 오천 명이 실컷 먹고도 열두 바구니나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은 절대로 낭비되는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엄청난 것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자들처럼 단순한 경제 이론으로만, 우리의 봉헌 행위를 계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닌 것을 확신하고, 기쁨으로 즐겁게 드릴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행위를 비판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왜 그렇게 주님께 향유 부은 여인을 비난했을까요? 요한복음을 보면 돈 궤를 맡은 가룟 유다가 몹시 흥분하여, 그 여인의 행위를 먼저 비판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회계를 맡아 주님께 드려진 봉헌 금을 횡령하는 재미로, 주님을 따라다닌 자였음을 요한 사도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큰돈이 돈 궤로 들어오지 않고 직접 주님께 드려졌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졌겠습니까? 그 삼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를 팔아 가룟 유다에게 주었다면, 아마 그는 그 돈을 가지고 도망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그 불순한 가룟 유다의 선동에 휘말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그 여인의 행위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그때가 바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번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큰 권능으로 로마 총독과 군병들을 무찌르고, 주님의 왕국을 선포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도중에 감투싸움을 할 정도로, 동료 제자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주님께 큰 선물을 하는 여인이 등장했으니, 질투와 시기가 그들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들이 할 수 없는 큰 물질을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한 그 여인을 경쟁자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위를 쓸데없는 낭비로 몰아붙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자들의 행위가, 과연 그들만의 행위로 그치는 것일까요? 그들의 모습이 곧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여러분은 주님께 헌신하고 충성하는 성도를 시기한 적은 없습니까? 

그래서 그의 행위를 왜곡시키고, 뒤에서 깎아내린 일은 없습니까? 충성하는 성도를 격려하거나 본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의 흠을 잡고자 애를 쓴 적은 없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시기와 질투로 충성하는 성도를 괴롭히는 일은, 바로 사단의 행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성도들을 시기하여 괴롭게 만들고, 참소하는 것이 바로 사탄의 전매특허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이러한 유혹에 빠져, 다른 성도의 선한 행위를 시기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본받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1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자신께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의 아름다운 행위도 같이 전파되고 기념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마리아의 향유 부은 사건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오늘까지 그 아름다운 향기를 진하게 발하고 있음을 우리가 잘 압니다. 우리 모두가 마리아와 같은 아름다운 사랑의 헌신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추악한 배신자 가룟 유다

14-16절을 보면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고 했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신하는 장면입니다. 가룟 유다를 가리켜 ‘열둘 중에 하나’라고 했습니다. 열두 제자는 주님이 친히 선택하신 핵심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권능을 받아, 복음 사역을 행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주님과 동고동락하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신하는 근본적 동기는 사탄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사탄이 그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심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유혹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입니다.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사탄과 죄의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탄은 불의한 불신자들만 죄로 유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까지 유혹했습니다. 그러므로 열두 명의 핵심 제자 중에서, 추악한 배신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사탄은 남녀노소 신앙의 연륜 및 직분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역사하여 유혹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독실하고 경건한 성도라고 해도, 조금만 방심하고 깨어 있지 못하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실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앙 연륜이 오래되었을 때 ‘거짓말’이라는 죄로 실족했습니다. 모세도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때 ‘혈기’ 때문에 실족했습니다. 다윗도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을 때, 우리야의 아내로 실족을 했었고, 솔로몬도 말년에 이방 여인들로 인하여 우상 숭배자로 타락하는 실족을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교훈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실족은 직분의 경중은 물론이요, 신앙의 연륜과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죄의 유혹이 항상 우리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늘 깨어 죄를 대적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흥정을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추악한 행동입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 즉 자기의 스승이요 구원자를, 흥정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이기적 물질적 유익을 위한 상품이나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내어 주겠으니 또는 포기하겠으니 얼마나 주겠느냐?”는 행동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내어 주게 되면, 비록 온 천하를 얻을지라도, 그는 결국 어리석고 불행한 자가 되고 맙니다. 

오히려 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서라도, 예수님을 얻어야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 모든 보화와 지식과 생명과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라는 찬송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16절은 대제사장들에게 돈을 받은 가룟 유다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는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에서, 대제사장들을 위한 충복으로 변신한 것입니다. 돈을 받았으니 그 돈 값어치를 하려고 애쓴 것입니다. 빚을 졌으니 그것을 갚으려고 예수님을 팔 기회를 열심히 찾은 것입니다. 추악하고 불의한 돈을 빚진 가룟 유다도, 이렇게 그 빚을 갚고자 애씀으로 결국 그 약속을 이행하게 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에게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구원해주시고 사도로 삼아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전 생애를 다 바쳤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처럼 행동합니까? 어찌하든 그 은혜의 빚을 갚고자 애를 씁니까? 많은 성도들이 그러할 줄로 압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자신에게 빚진 자처럼 여기는 성도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크신 은혜의 빚을 갚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모든 기도가 자기의 소원을 들어달라는 것으로 그치는 성도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는 불의한 돈 은 삼십만 받고도, 그 빚을 갚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주려고 애썼는데, 우리는 주님께 그 큰 은혜를 받고도, 아직도 더 받을 것만을 생각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래 마귀와 죄와 사망의 종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피 값을 치르고, 자신의 소유로 산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한 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처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흉계를 꾸몄던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처럼, 악한 음모에 절대로 동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불과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먹었던 가룟 유다 같은 배신자도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마리아 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헌신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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