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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마땅한 자녀교육 (삼상 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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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한 자녀교육 (삼상 3:10-14)

어머니가 외출을 했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초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가 아주 두꺼운 책을 읽고 있더랍니다. 무슨 책을 보나 싶어서 곁에 가서 보았더니 <육아교육법> 이라는 책이더랍니다. 

어머니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네가 왜 그 책을 보느냐?” 하고 물었더니 딸아이가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응 내가 교육적으로 교육을 잘 받고 있는지 못 받고 있는지 그것을 살피는 거예요.” 하더랍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는 이야기입니까? 요새 아이들이 이렇습니다. 도덕성을 배우기 이전에 실리부터 배우고 자랍니다. 윤리를 배우기 이전에 자기이익을 먼저 배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문제점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기본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에도, 경제에도, 사회, 문화에도 그리고 가정의 기본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현대를 가리켜 <비혼 시대>, <불임시대> 라는 말을 합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또 결혼을 했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는 질문에 대부분이 거추장스럽고 귀찮다고 대답합니다. 아이는 평생에 짊어져야할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래도 세계도 하나님의 뜻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실리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미 낳아놓은 자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미 태어난 자녀를 내다버립니다. 버려지는 아이들이 해마다 늘어서 한해 버려지는 아이들이 8000여명이라고 합니다. 그중에서 법과 사회의 인식에 가로막혀 입양되는 아이들은 고작 2%이고 나머지 98%는 고아로 살아간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자녀교육의 문제입니다. 교육자 [루소] 는“교육이란 기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자녀를 사람으로 만들어야합니다. 

그것도 올바르고 필요한 사람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교육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한번 굽은 나무는 대들보가 될 수 없다.” 는 말이 있는 것처럼 부모의 품안에 있을 때 자녀교육을 바로 하지 못하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의 교육은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흔히 우리가 하는 말 중에 사람은 세 가지 복을 타고나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가 부모를 잘 만나야 되고, 둘째는 스승을 잘 만나야 하고, 셋째는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에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사항도 있고 배우자는 내가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사항입니다. 

하지만 세 경우 모두 잘 만나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는 일이든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경우라도 잘 만나야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영향을 미치는 만남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부모와의 만남입니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처음교육이 이루어져야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교육관이 유명한 민족이 유대민족입니다. 노벨상을 받은 사람의 60%가 유대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우수한 민족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비밀은 바로 자녀교육에 있다는 것입니다. 

막 10장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이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녀교육관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며 일일이 안수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교육을 우선으로 거주지 선택도 그에 기본을 두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사람들은 반드시 회당 옆에 삽니다. 회당에 걸어서 나올 수 있는 거리에서 삽니다. 우리처럼 이사할 때 공기 좋고, 교통 좋은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회당 중심으로 가까운 곳을 찾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회당을 허허벌판에 짓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 먼저 회당을 짓고 울타리 치듯이 자기들이 살 집을 돌아가면서 지으면서 삽니다. 

그 다음으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과 지혜서인 탈무드로 살아가도록 교육합니다. 학교교육 중 오전에는 율법과  탈무드만 가르치고 오후에 학과 공부를 할 정도로 유대인들의 교육은 철저히 말씀과 지혜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어렸을 때부터 존경할 사람을 가르칩니다. 회당에는 가르치는 랍비가 있고 부모들은 그 랍비를 존경하라고 가르칩니다. 랍비는 부자도 아니고 학자도 아닙니다. 히브리 성서와 탈무드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거쳐 유대인 사회와 회중의 영적 지도자나 종교적 교사가 된 사람입니다만 이 랍비를 향한 존경을 가르칩니다. 

막10장에 예수님께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무언의 교육이 담겨있습니다. “이런 분을 존경해야 된다. 이런 분을 우러러봐야 된다. 이런 분을 사랑해야 된다.” 이렇게 교육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뜻을 몰라서 막아섰지만 예수님은 용납하라고 하시고 안수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예수님의 교육이 여기에 있습니다. 존경하는 마음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교육에 가장 좋은 방법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가슴과 가슴을 맞대는 인격적 교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늘 곁에서 같이 호흡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목 놓아 웁니다. 왜 우는지 아십니까? 탯줄을 통해서 듣던 어머니의 맥박 소리가 단절됨으로써 엄습하는 인생 최초의 불안 때문에 운다고 합니다. 맥박소리를 들을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아이는 안정되고, 느끼고, 깨닫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녀의 교육은 가까워야 하고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 는 자식문제에 관심이 그리 깊지 않았고 그로 말미암아 자식 교육에 실패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엘리에게는 [홉니] 와 [비느하스] 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장차 아버지의 대를 이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해야할 막중한 위치에 있었으나 자신들의 행악으로 말미암아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선택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 선택을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가문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 명예를 버렸습니다. 

삼상2:12절에서 성경은 아주 명백하게 이들을 “행실이 나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 다음이 어떻게 됐겠습니까? 역시 삼상2:12에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고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결론적인 이야기입니다. 엘리가 아버지 된 입장에서 자식들의 신앙교육에 실패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지를 않았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교육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가르치지 않았는데 신앙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가문이 아무리 좋으면 무엇 합니까? 신앙이 없으면 망할 가문입니다. 명예가 아무리 빛나면 무엇 합니까? 신앙이 없는 명예란 허세에 불과합니다. [홉니 ]와 [비느하스] 는 하나님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그 분의 뜻을 행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업신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 행위가 어찌나 악했던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같을 정도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저주를 자청하는 어리석은 짓이었는데도 이를 훈계하지도 못하고 올바르게 이끌지도 못했던 부모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경험하면서 얻어지는 지식을 말합니다. 날마다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그 속에서 알아지고 깨달아지는 신앙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게 아니라 주일성수를 가르치고, 제대로 된 십일조의 신앙을 가르치고, 봉사와 섬김을 교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는 자식들에게 이런 신앙교육에 실패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부모들처럼 “교회에 나가 주는 것만 해도 어디야”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이제 후회해 봅니다만 너무 늦었습니다. 엘리의 나이가 98세나 되었고 눈이 어두워서 보지도 못하고, 책망하기에 너무 연로하여 영향력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뭐라고 한 마디해도 이제는 자식들에게 오히려 “늙은 노인네가 잔소리가 많다.” 고 핀잔이나 들을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나지금이나 못된 자식들의 공통적인 심사는 부모가 나이 들어 힘이 없어지면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엘리의 자녀교육에 대한 실패의 이유를 엄중히 평가하고 있습니다. 

삼상2:29입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겼다.” 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분명히 빗나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크면 잘 알아서 하겠지’ 하다가 이제는 늦었습니다. 

부모 된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자녀들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점검하십시오. 십일조는 제대로 하는지, 주일성수는 잘 하는지...‘알아서 잘 하겠지’ 하는 것은 무관심입니다. 이것은 자녀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지혜를 가지고 자녀들을 신앙 교육해야합니다. 적어도 기본적인 것만이라도 가르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문 자랑보다 신앙이 먼저입니다. 신앙의 교육이 없으면 하루아침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명예를 앞세워 그것에 목숨 걸지 마십시오. 자식들이 정말 잘 되는 길은 신앙인으로 부끄럽지 않게 서는 길입니다. 몰랐다면 오늘부터 지킬 것이요, 알면서도 실패의 길로 걸어왔다면 오늘 엘리의 가정의 몰락을 보면서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저주를 자청하는 자리에 이르지 않도록 부모 된 도리로서 마땅히 해야 할 교육을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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