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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 없는 자,지혜 있는 자 (엡 5: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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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없는 자,지혜 있는 자 (엡 5:15-18)


그리스에 애꾸눈 장군이 있었습니다. 장군은 죽기 전에 초상화를 남기고 싶어서 이름난 화가들을 불러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를 보고 장군은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떤 화가는 애꾸눈 그대로 그렸고, 어떤 화가는 장군의 속마음을 짐작해 양쪽 모두 성한 눈을 그린 것입니다. 장군은 애꾸눈의 초상화도 못마땅했지만 성한 눈을 그린 것은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화를 냈습니다. 고민하고 있는 장군 앞에 어느 이름 없는 화가가 초상화를 그려보겠다고 나타났습니다. 장군은 미심쩍었으나 그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매우 흡족해 했습니다. 그 화가는 장군의 성한 눈 쪽의 옆모습을 그렸던 것입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의술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여, 제 병을 낫게만 해 주신다면 집을 팔아서 바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 깨끗하게 치료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집을 팔아서 바치려니 너무 아까웠습니다. 궁리 끝에 집을 처분한다는 광고를 이렇게 냈습니다. “대지 200평, 건평 60평의 집의 대금은 10만원. 단, 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를 함께 구입해야 함. 그 대금은 5억” 약속대로 집을 판 돈 10만원은 하나님께 바치고, 은행나무를 판 돈 5억은 부자가 챙겼습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화가와 부자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두 사람 모두 자신에게 다가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화가는 지혜를 사용하여 애꾸눈 장군의 옆모습을 그려 장군을 만족하게 하였고, 부자는 지혜를 사용하여 약속을 지키면서 재산은 손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지혜를 사용하였지만 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화가는 지혜를 통하여 자신도 상대방도 만족을 누렸지만 부자는 지혜를 사용하여 양심과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의 이기심만 채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지혜 없는 자입니까? 누가 지혜 있는 자입니까?

본문 15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여기의‘어떻게’ 라는 말은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으로’라는 말입니다. 즉 살아가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걷는다. 돌아다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루를 살아도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느냐를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주의하라 하십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교훈하고 있습니다. 지혜 없는 자같이 되지 말고 지혜 있는 자같이 살아가라고 합니다. 자세히 주의하여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무작정 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정하고 주의 깊게 살아가는 자가 지혜로운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제시하는 지혜 있는 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첫째로 세월을 아끼는 자

미국의 헌팅턴 프레스(Huntington Herald Press) 신문사 건물입구에 3개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지구본을 껴안고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 지구본 위에 거만한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이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이 지구본 밑에 깔려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 동상 밑에는 설명이 있습니다. “지구본은 흘러가는 시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구본을 껴안고 있는 모습은 시간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표현 한 것이며 지구본 위에 거만하게 서 있는 모습은 시간의 귀중함을 비웃는 것이고 지구본 밑에 깔려 있는 모습은 시간을 무시하다 실패의 나락에 떨어져 고통당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헌팅턴 프레스 신문의 편집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신문사는 항상 흐르는 시간 속에서 최고의 신문을 만들고자 이 동상을 세웠습니다.” 시간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시간의 귀중함을 비웃고 무시하는 사람입니까? 시간을 무시하다 실패하여 후회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시간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대로 순간순간 자세히 주의하면서 시간을 사용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짧은 순간의 시간이라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여기의 ‘세월을 아끼라’는 ‘값을 지불하고 세월을 사라’는 뜻입니다. 칼빈은 ‘마귀에게 빼앗긴 시간을 되찾아 내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시간을 하나님을 위하여 쓸 수도 있고 마귀를 위하여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시간을 쓰자고 하면 이유와 핑계가 많지만 마귀를 위하여 시간을 쓰는 데는 관대합니다. 향락을 위해 쓰는 시간은 많지만 하나님을 위해 쓰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시간과 기회는 하나님께서 똑같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시간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어떤 개념을 가지고 시간을 대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양적인 개념의 시간으로 살면 ‘얼마나 살았느냐?’가 기준이 됩니다. 질적인 개념을 가지고 살면 ‘무엇을 하면서 살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삽니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얼마나 살았느냐의 양적인 시간 개념을 가지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며 살았느냐는 질적인 시간 개념으로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지혜 없는 사람과 지혜 있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둘째로 주의 뜻을 이해하는 자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주기철(朱基徹) 목사의 위대한 점은 순교자로서가 아니라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주의 뜻을 따르는 자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는 1925년 12월 신학교를 졸업하고 문제투성이의 초량교회에 부임을 합니다. 아무도 가기를 원치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초량교회를 한국교회가 주목하는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마산의 문창교회가 위기였을 때도 선배들이 주기철 목사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문창교회로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찢어진 교회를 엮어 부흥하는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얼마 후 일제의 신사참배가 몰아치기 시작합니다. 주목사는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조만식 장로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센터로 산정현교회를 만듭니다. 그 소문이 한국교회에 퍼지게 되면서 의식 있는 사람들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합류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주목사는 8년 후에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의 순교는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라 일생동안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의지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따랐을 때 하나님은 기독교 역사의 인물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주의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주께서 요구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그 뜻에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지혜없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뜻은 어리석은 자가 되어 가는 것을 중지하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창조주를 거절하고 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공통된 마음입니다. 부모의 뜻을 헤아려서 순종하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지켜야 할 도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진실한 주의 자녀는 주의 뜻 아래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고 주의 뜻이 내 뜻을 다스리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오만함으로 경거망동 하지 아니함을 말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모든 일이 나 중심적 사고였지만, 믿은 후에는 예수 중심적 사고로 전환하여 주의 인도하심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어리석음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고 주의 뜻을 분별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지혜 있는 자의 삶입니다. 주의 뜻을 깨닫기 위하여 말씀을 묵상하며 그 뜻을 따라 사는 지혜로운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의 뜻을 이해하고 주의 뜻을 거스리지 않고 준행하여 지혜 있는 자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성령 충만함 받는 자

요한 웨슬리(John Wesley)가 성령을 체험하고 강력한 영향을 끼치자 옥스포드 대학에서 웨슬리를 초청했습니다. 웨슬리는 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으시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국 최고의 석학인 교수들의 반응을 보니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만났고,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예수와 함께 생활했고, 자신의 눈으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명령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머물며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렸고 오순절날 성령 충만함을 받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이 전도하자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 여러분은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있습니까? 예수와 함께 식사했습니까? 예수의 기적을 직접 보기라도 했습니까? 예수를 만나고 함께 먹고 기적을 목격했던 제자들도 성령이 임하여 권능을 받은 다음에야 영혼을 건질 수 있었다면 하물며 당신들이야 말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쓰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웨슬리의 설교를 들은 교수들이 깨어졌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 성령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산업혁명의 위기를 겪던 영국 사회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국민들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빈부격차의 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밀려오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지 않고는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밀려오는 시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방탕한 죄의 습관을 끊어 버릴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는커녕 끌려 다니며 시간을 낭비하고 후회뿐인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지혜로운 성도의 삶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술 취함과 성령충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는 우상숭배가 가득한 도시이며 방탕과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방탕과 향락에는 술이 빠질 수 없으며 우상제사와 함께 따라오는 것은 술의 축제였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절제하지 못한 채 방탕한 삶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이런 환경 속에 계속하여 머무르는 것을 경고하며 성령에 붙들리어 살아가기를 권고하였습니다. 성령충만함은 성령에 이끌리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령께서 마음껏 사용하시도록 맡겨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즉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주인이 되셔서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 가시도록 준비되어 있는 상태가 성령충만함입니다. 

랜디 호프만(Randy Hofman)은 목사이면서 예술가입니다. 그의 특징은 해변가에서 모래와 바닷물을 가지고 20여년에 걸쳐 모래 조각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등 대표적인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가 해변 가에서 모래와 바닷물로 조각품을 만드는 이유는 작품을 통해 선교 활동을 하기 위함입니다. 모래 조각 작품들을 통해 연약한 재료를 가지고도 위대한 작품들이 창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동시에 인간도 모래와 같이 보잘것없고 조류가 밀려오거나 바람이 불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나 하나님에 의해 위대한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래와 같은 연약한 인생입니다. 바닷물이 밀려오고 밀려가듯이 하루하루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될 때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누구의 손에 맡기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문필가 카알라일(Thomas Carlyle)은 “세상 사회는 내가 영광을 누릴 처소가 아니라, 내가 쓰여 질 처소”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으나 결과는 허무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양보와 희생을 통해 새로운 것이 이루어지는 데 기여하는 삶을 산다면 행복을 느끼는 지혜 있는 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인생이 되기를 소망하십니까? 지혜 없는 자의 삶입니까? 지혜 있는 자의 삶입니까? 부디 주어진 인생 속에서 세월을 아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충만한 삶을 통해 지혜 있는 자의 삶을 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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