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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수 3:1-3, 마 16: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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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수 3:1-3, 마 16:21-24)

홍사중의 ‘리더와 보스’에는 보스와 리더의 차이점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많은 차이점 가운데 몇 가지를 보면 이런 것들입니다. 보스는 ‘가라’고 명령하지만, 리더는 ‘가자’고 권합니다. 리더는 앞에서 이끌지만, 보스는 뒤에서 호령합니다. 사람들은 지배자를 따르지 않습니다. 리더를 따릅니다. 따르는 자는 이끄는 자에게 생명이 있어야 따릅니다. 따를 만한 가치가 있어야 따릅니다. 자신의 인생을 바칠만한 무엇이 있어야 따릅니다. 따라간다고 할 때에 앞선 지도자가 따를 만한 자격과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따라갑니다. 반대로 따를 만한 가치가 없으면 아무리 따르기 쉬워도 따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하여 스스로 변해가는 것을 ‘모델링’이라고 합니다. 누구를 ‘모델링’ 대상으로 삼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모델링’ 한다는 것은 관찰과 학습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따르기 위하여 면밀하게 관찰하고 모방하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모델링 한다는 것은 ‘동일시’(identification)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 사람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애쓰고 나아가서는 마치 내가 그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장교들이 부하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합니다. 절대로 “돌격 앞으로”라고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자신은 빠지고 부하들만 앞으로 가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리더십이 아닙니다. 리더란 가장 어려울 때에 제일 앞에 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유목민들에게는 독특한 생존방식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동물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의 이동경로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본능적인 감각은 사람보다 동물이 더 발달해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이 사람보다 발달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똑똑한 척해도 사람들은 무지합니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주님의 경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하늘 보좌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유년주일학교에서 자주 부르는 찬송이 기억납니다.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닌가 맘에 있는 하늘 맑고도 밝은 해는 비치네 발자취를 따라 가세 활발 스러웁게, 발자취를 따라가세 노래하며 기쁘게”. 정말 이 찬송처럼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은 기쁜 일입니다. 주의 발자취를 잘 따르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0:27에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양입니까? 주님이 여러분의 목자입니까? 그렇다면 따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양도 아니고 주님이 목자도 아니라면 주님을 따르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탈무드에는 ‘몸은 머리를 따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내가 교회의 지체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이고 내가 지체라면 주님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런 일이고, 따를 때에 비로소 보람을 느낍니다. 
  
마태복음 16:24에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자격을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온전히 부인하면 십자가를 지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른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보라”라고 하신 이 한마디에 따랐습니다. 이들이 주님을 따를 때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자기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십자가까지 따라갔습니다. 주님 때문에 당할 불이익과 고난을 각오하고 따랐습니다.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의 각오를 다시 한 번 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자기는 부인해야 진정한 자아입니다. 

오늘의 말씀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영어 성경에는 “He must deny himself”라고 합니다. 흠정역이라 불리는 킹제임스번역(KJV)에서는 “let him deny himself”라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자의 필연성입니다. 반드시 해야 합니다. 영어성경의 표현은 강제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게 하라”라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자기를 부인한 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보내시겠다는 데 입이 뻣뻣하고 말을 잘하지 못하므로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출 4:10). 이사야는 하나님을 발견한 다음 “화로다 나여”라고 하여 자신이 저주의 대상인 것을 비로소 인정하였습니다(사 6:5).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신 다음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깨닫고 “나는 죄인입니다”(눅 5:8)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그 중에서도 자신을 가장 잘 부인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세례요한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야를 갈망하고 있었고 세례요한이 바로 메시야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요 1:20)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에게 “당신이 엘리야나 선지자입니까?”라고 했을 때도 “아니라”고 합니다. 얼마든지 자신이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았지만 그는 거부하고 자신을 부인합니다. 
  
하나님만이 긍정입니다. 예수님만이 긍정입니다. 그 외에 우리 모두는 부정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나는...이다”라는 예수님의 자기 증명이 일곱 번 나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포도나무이다” 등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는...이다”(I am)이란 말이 곧 하나님의 이름이며,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하나님, 예수님만이 “나는...이다”(I am)이고, 우리는 모두 “나는...아니다”(I am not)입니다. 
  
자기부정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결코 쓰시지 않으십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자를 하나님은 긍정하시고, 사람이 자기를 부정하는 그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인정하시고 쓰십니다. 
  
사막의 교부들의 글을 모은 ‘깨달음’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 내용에 보면 은둔자 모세라는 교부가 한 말이 있습니다. “그대가 무덤 안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고 3년 동안 지내시오. 그렇지 않으면 참된 자기부정에 이를 수 없소”라고 합니다. 자기부정은 주님을 따르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훈련받는 과목입니다. 
  
구약의 방대한 예언의 주인공인 예언자 예레미야는 1:5에서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6절에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자기는 어린아이 같아서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할 수 없다고 부인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 때가 완전하게 그를 선택하여 쓰시는 순간입니다. 
    
베네딕트는 수도회를 창설한 걸출한 영성가입니다. 그는 중요한 수도원 규율을 만들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수도원 자료들 가운데 그가 기초를 세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베네딕트는 로마에서 북동쪽으로 136km 떨어진 누르시아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갔습니다. 그가 로마에 도착하여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로마는 이미 그리스도의 이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타락한 사회로 변해 있었습니다. 결국 베네딕트는 금욕적 삶을 살기 위해 야산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3년간 동굴생활을 하면서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인근에 있는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베네딕트의 헌신에 큰 감명을 받아 수도원장이 되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응하여 잠시 수도원장이 되었지만 수도사들 가운데는 베네딕트의 규율이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하여 그를 독살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챈 베네딕트는 다시 은둔의 삶으로 들어갔습니다. 수도사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부인의 삶입니다. 수도사의 삶은 우리의 영성적 삶의 한 모범일 뿐입니다. 
  
마태복음 26:35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부인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고 합니다. 베드로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제자가 다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까? 누구나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주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자기를 온전히 부인하지 못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였고,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던 가룟유다가 제자로서 스승인 예수님을 팔았고, 그 외의 배교자들도 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교하였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실패하는 원인은 삶의 초점이 핸들보다는 브레이크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르게 목표를 향하여 갈 의도보다 가다가 멈출 생각을 더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를 향하여 가는 그 길을 멈추고, 주저하고, 두려워하고,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부인에 실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2:6-7에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라고 합니다. 비움은 자기부인의 다른 표현입니다. 비움은 자기부인의 또 다른 상징입니다. 비움(emptying)은 채움(filling)의 전제 조건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부인하면 거기에 그리스도로 채워지고, 십자가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져야 의미가 있습니다. 

또 본문에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선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장식이나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그냥 장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져야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이 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게 만들어줍니다. 
  
십자가는 사람 때문에 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자식 때문에 십자가를 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다른 사람 때문에 지는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들어주시고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기 때문에 지는 것입니다. 남편이 웬수가 아닙니다. 내 자식이 애물단지가 아닙니다. 다 나의 십자가이고, 내가 감당해야 할 나의 소명의 몫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가 제일 무겁게 느껴집니다. 유대인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농부에게 두 마리의 소가 있습니다. 한 마리는 건강하고 힘이 셉니다. 다른 한 마리는 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주인이 무거운 짐을 지울 때 어느 소에게 지우겠습니까? 그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힘이 센 소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신답니다. 하나님도 무거운 십자가는 견딜만한 힘을 가진 힘이 센 사람에게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라고 합니다.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를 만들어 지워주셔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감당하지 못할 십자가를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모험입니다. 도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위험한 일입니다. 사무엘하 2:10에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 세이며 두 해 동안 왕위에 있으니라 유다 족속은 다윗을 따르니”라고 합니다. 당시에 사울이 힘을 가지고 있고 대세입니다. 다윗을 따르는 것은 죽음을 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처음 만났을 때 엘리사는 소를 버리고, 부모와 입 맞추고 스승인 대선지자 엘리야를 따라갔습니다. 엘리야는 길갈을 떠나갈 때 엘리사에게 따라오지 말고 머물러 있으라고 했지만 엘리사는 따라갑니다. 벧엘에서 그만 따라오지 말라고 했지만 엘리사는 끝까지 따라갑니다. 여리고를 거쳐 요단에 이를 때까지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며 따라갔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선지자의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끝까지 따라가며 스승의 영감이 갑절이 있기를 구했습니다. 험한 길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마치 그의 선지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과 같습니다. 이 길을 왜 가려고 따라옵니까? 엘리야를 따라가지 말고 편히 사는 게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당시의 선지자의 길은 고통의 길이며 위험한 길이었지만 엘리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따랐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주님을 따르는 길은 험한 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69에는 예수님이 잡히신 후에 대제사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말합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죽음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위태로운 모험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요한복음의 부록이라고 불립니다. 한편으로는 베드로의 위임식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21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지라”는 명령입니다. 
  
폴란드 작가 센키비츠의 ‘쿼바디스’에 보면 베드로가 얼마나 자주 약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얼마나 자주 지지 않으려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로마에서 또 십자가를 피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에 ‘아피아 가도’(Via Apia)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다짐해도 또 피하고 싶은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네가 지기 싫어하는 십자가를 내가 다시 지기 위하여 로마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듣고 오던 길을 돌이켜 로마로 갑니다. 십자가를 지러 다시 로마로 돌아간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사도에게도 무거운 짐입니다. 누구에게나 벗어 던지고 싶은 짐입니다. “십자가는 피하려고 하면 점점 더 무거워지지만 기꺼이 지려고 하면 점점 가벼워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꺼이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정사에서는 어떤 사람을 따르는 그 자체가 죽음일 수 있습니다. 쿠데타는 성공하면 공신이지만, 실패하면 역적이 되고 죽게 됩니다. 정치지도자들도 우리 주위에서 보면 성공하면 공천을 받고, 실패하면 무소속으로 떨어집니다. 어떤 임금을 따르는 그 자체가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는 한 임금만을 따르다가 선죽교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不事二君)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이런 그의 정신은 죽음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 자체가 얼마나 고귀합니까? 얼마나 멋있는 삶입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은 삶다운 삶입니다. 멋있는 삶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고난은 성도들의 영광에 추가점을 가산해 준다. 다이아몬드는 깎을수록 더욱 빛난다. 성도들의 십자가가 보다 무거울수록 그만큼 그들의 면류관도 보다 무거워진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은 성공적인 삶입니다. 
  
십자가를 지면 곁의 사람들이 다 떠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게 되었을 때에 곁에 있던 제자들도 다 도망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누구에게나 외로움입니다. 홀로 져야 하는 짐입니다. 마치 누구나 죽음은 홀로 맞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독이야말로 가장 혹독한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름다운 여인 룻을 보세요. 룻은 과부가 된 모압여인입니다. 유대인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라 벧엘로 갔습니다. 이미 아들이 죽었습니다. 이제 시어머니에 대한 의무도 그칠 때가 되었습니다. 인종도 서로 달랐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시’자만 붙어도 불편한 사이입니다. 그런데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베들레헴까지 따라갔습니다. 룻은 기꺼이 진 십자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베들레헴에 와서 보아스라는 남편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의 조상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축복은 지금도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지 못하고 지는 척하는 위선자는 감람산까지는 그리스도를 따라가겠지만 갈보리 산까지는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가 액세서리, 장식품인 사람은 갈보리까지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면 십자가가 나를 지킵니다. 십자가를 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런 십자가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의학적, 심리학적 정신치료를 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방에 걸린 십자가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결정적인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동양 사람은 고통을 망각하려고 하고 서양 사람은 약으로 달래려고 합니다. 그러나 고통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인데 고통을 기꺼이 짊어질 때만 그것은 극복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직 저 분에게서 배웁니다”. 그가 말하는 정신치료의 비법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온갖 정신적, 육체적 병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8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합니다. 언제 편히 쉽니까? 모든 무거운 짐이 벗겨질 때입니다. 언제 벗겨집니까? 우리의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것은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질 때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친히 지고 오라고 만들어주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잘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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