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음의 위기와 승리 (막 5:21-43)

첨부 1


믿음의 위기와 승리 (막 5:21-43)

개척교회를 하는 목사님의 다수가 ‘믿습니다!를 외치고 문을 열어보니까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더라.’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믿음의 속성에 대하여 생각하려고 할 때 극복해야 되는 문제가 바로 이처럼 믿음으로 해봤는데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더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반론일 것입니다. 

마치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저 그 이야기 알아요.’라고 하면서 결말을 외치는 아이가 있는 것처럼 얼마나 김이 새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제가 믿음에 대해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할 때 ‘나도 해 봤습니다.’라고 외치는 사람의 이의를 극복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주신 귀한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더라고 말하는 사람은 충분히 준비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믿습니다’를 외치는 것이 반드시 믿음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에요. 믿음은 억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이 세계선교의 막중한 책임을 받았지만 막무가내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때를 기다렸고 성령의 인도를 따랐고 순종했고 하나님보다 앞서려고 하지 않았고 준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 부르심을 실천할 때까지 십여 년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에 무엇을 했느냐? 준비했습니다. 믿음은 억지가 아니에요. 믿음을 억지로 해석해서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엄청난 위험을 초래하고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의역하면 ‘나는 나의 준비함으로써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리라’고 말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게 될 것을 믿었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해서 그 아들의 세대에 훌륭한 성전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될 것을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12명의 사도들을 정성껏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계획과 준비 없이 당신의 일을 추진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에는 위기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이 믿음의 위기입니다. 위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현재 믿음의 위기를 겪고 있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믿음의 위기는 다음과 같이 옵니다. 

첫째는 내가 분명히 믿음으로 무엇을 시작했는데 생각한대로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위기가 옵니다. 오늘 본문의 야이로가 그 대표적인 예에요. 야이로의 딸이 몹시 아파요. 그래서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가서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이 그의 간청을 들으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시는 도중에 전갈이 오기를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중이니 일이 잘 될 줄 알았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순간적으로 멘붕에 빠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멘탈 붕괴라는 뜻이지요. 딸이 죽은 것도 당연히 큰 충격이지만 신앙적으로도 혼동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면 당연히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중에 딸이 죽을 수가 있다니, 믿음은 헛것이라는 뜻이냐? 예수님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이냐? 이것이 믿음의 위기입니다. 믿음의 위기는 혼자 오는 게 아니고 인생의 고통과 함께 따라 옵니다. 이것이 믿음의 위기의 괴로움이에요. 인생의 고통도 괴로운데 우리의 믿음까지 흔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내가 분명히 기도하고 하나님이 도와주실 줄 믿고 어떤 일을 시작했는데, 왜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일이 있다는 말이냐? 내가 하나님도 신뢰할 수 없다는 얘기냐?’라고 질문하는 분이 계시다면 믿음의 위기를 겪고 계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믿음의 위기의 속성은 시간의 촉박함을 통하여 온다는 것입니다. 야이로의 딸의 질병은 촌각을 다투는 것입니다. 딸은 지금 집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일분이 급합니다. 만일 죽으면 너무 늦어요. 죽기 전에 그를 일으켜야 됩니다. 여유를 가지고 고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시간이 많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 시간을 놓쳐 버리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야이로의 집에서 전갈을 가지고 온 사람이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그 말의 뜻은 ‘이제는 예수님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제는 예수님도 기회가 지나갔다’ 이런 말입니다. 시간의 촉박함은 우리의 믿음이 이론의 차원에 머물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차를 마시면서 여유 있게 의논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 절실함을 모르는 사람은 믿음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믿음의 위기의 속성은 인생의 고통에 편승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믿음을 따로 격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인생의 아픔에 믿음의 위기가 편승해서 찾아옵니다. 그래서 인생이 괴로울 때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요. 더블 위기에요. 믿음의 위기가 괴로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욥이 당한 시련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자식이 사고를 당하고 재산이 날아가고 몸이 병든 것도 괴로운데, 아울러 믿음의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 이런 무서운 시험이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믿음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은 평소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괴로운 일을 당해봐야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의 믿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위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첫째로 왜 예수님을 모셨는데 기대한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느냐?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것은 섣불리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잠시 지체된 것이지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헛된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오시다가 잠시 지체된 것입니다. 열두 해 혈루병 걸렸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대는 바람에 예수님이 그 여자와 대화를 하게 되시고 늦어졌어요.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야이로의 딸도 급하지만 열두 해 혈루병 앓았던 여자도 급합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도 사랑하지만 열두 해 혈루병 걸렸던 딸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사랑하지만 우리만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내 이웃도 사랑하시고 나의 경쟁자도 사랑하시고 남들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들어주어야 될 남의 소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전에 먼저 술장관의 꿈을 이루고 그리고 바로의 꿈을 이루어주고 그리고 나서 자신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에요. 우리 소원을 들어주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들어주어야 될 사람의 소원이 있을 수 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우리를 잊으신 게 아니고 약속하신대로 우리 집에 찾아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나라만을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다른 나라의 경제도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 있어요. 그러나 일본이 망하면 우리라고 무사한 게 아니에요. 일본의 경제가 잘 되어야 우리나라에 유익이고 중국의 경제가 잘 되어야 우리나라에게 유익입니다. 그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열두 해 혈루병 걸렸던 여자 때문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이 인간이 빠지기 쉬운 생각의 함정입니다. 우리는 행복의 질량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남이 먼저 행복을 가지면 내게 돌아올 행복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성공하면 나의 성공의 가능성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자녀가 먼저 결혼하면 내 자녀의 배우자감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취업을 하면 나의 취업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에요. 열두 해 혈루병 걸렸던 여인이 낫는 바람에 야이로의 딸이 낫지 못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둘 다 나음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남이 먼저 가지면 내 몫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에요. 예레미야서 33장 3절에 ‘너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시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데 남이 어떻게 그것을 먼저 가져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남이 먼저 가져갈까 염려하면 안 됩니다. 

두 번째로 시간의 촉박함에 대하여.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사람을 급한 상황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베니 힌 목사가 설교하기를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우리로 식은땀을 흘리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홍해 바다에 이르러서 한쪽에서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한쪽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고 있을 때까지 하나님은 길을 보이지 않았어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갈 때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고 아주 위태해질 때까지 예수님은 고물에 머리를 베고 주무셨어요. 우리가 급하고 급해서 더 이상 점잔을 피울 수 없고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외칠 때까지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그렇게 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러실 수도 있고 우리를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실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 육신이 성령의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수도 있고 우리의 믿음을 키우기 위해여 그렇게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야이로의 입장에서는 딸이 죽으면 끝이지만 주님에게는 그것이 끝이 아니에요.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는데. 주님에게는 너무 늦은 것이 없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에게는 Too late, It’s too late, 너무 늦은 것이 없어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까지는 회개하기에 너무 늦은 죄가 없고 하나님에게 돌아가기에 너무 늦은 사람이 없습니다. 

<80일간의 세계 일주>라는 소설이 있지요. 주인공이 영국의 왕립과학원 회원들과 내기를 합니다. 80일 만에 세계를 일주를 하고 런던으로 돌아올 수 있느냐를 놓고 내기를 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세계를 돌지 않습니까. 그리고 돌아왔는데 81일째에 돌아 온 거예요. 그래서 내기에 졌다 하고 왕립과학원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중국의 시간대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중국의 시간으로는 이미 내일이지만 영국의 시간으로는 아직 80일째에요. 그래서 부랴부랴 왕립과학원으로 달려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기에 이긴다는 줄거리인데, 사람의 시간대로는 이미 늦었지만 하나님의 시간대로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달라요. 이미 죽은 사람을 예수님을 살리실 수 있다면 이미 죽은 결혼생활을 하나님이 살리실 수 있고 이미 죽은 것 같은 사업을 하나님이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인생의 시련에 믿음의 위기가 편승하는 것에 대하여. 

그렇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 아니고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은 낙심입니다. 

오늘 본문 36절을 보면 그 전갈이 와서 야이로에게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라고 말할 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예수께서 야이로가 지금 어떤 말을 들었는지를 아십니다. 왜냐하면 곁에서 들으셨기 때문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평행구절에는 이 구절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곁에서 들으시고’라는 말이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데 이것이 얼마나 귀중한 구절인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위기에 처했는지를 아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낙심될 수 있는지를 아십니다. 야이로에게 전갈을 전한 사람의 말이 야이로의 심정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한마디 말씀 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만일 여러분이 ‘나는 내 일생에 믿기만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되고 후회가 될 수 있지만. ‘믿기만 하라’ 믿음의 최대의 적은 두려움이라고 말씀드렸지요. 

마귀는 두려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영혼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인생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야이로에게 소식을 전한 전갈의 말 속에 마귀의 소리가 섞여있습니다.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이 말 속에는 마귀의 음성이 들어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믿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말이에요. 이건 마귀의 속삭이는 말이에요. 이 말을 들을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까? (김영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