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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맥추감사] 이렇게 기도하라 : 대상 (마 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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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하라 : 대상 (마 6:5-9)

: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 모두가 자신과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감격하고 찬송하기를 소원합니다. 그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의 기원이 되는 맥추절은 구약의 3대 절기중 하나로 오순절 혹은 칠칠절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맥추절은 말 그대로는 보리농사를 짓고 나서 드리는 감사 예배입니다. 

성경은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 23:16)고 하였습니다. 

맥추절은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는 보리였습니다. 그리고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으로 지키게 되는 것은 우리식으로 하면 쌀이 됩니다. 여름에 보리농사를 짓고 나서 맥추감사주일을 지키고, 가을 쌀농사를 짓고 나서 추수감사주일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농사를 짓고 사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맥추감사이나 추수감사절의 의미도 점차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맥추감사절 또는 추수감사절의 초점은 ‘감사’에 있습니다. 현대화된 도시문화 속에서도 우리의 삶을 지켜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감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한 해의 전반기를 지나고 나서 맥추감사절을 지키고,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추수감사절을 지킵니다. 우리의 삶에서 맥추가 없고 추수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모래밭처럼 점점 삭막해져가는 것은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살맛이 없는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감사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감사는 믿음이 완숙하여졌을 때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어떤 종교적인 행위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이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멈추어 서서,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들의 병을 고쳐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병환자가 완치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가족과 이웃에게로 돌아가도 좋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당시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이 제사장에게로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가다가 고침 받았습니다. 그들은 대단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는 것을 보고 가던 길을 되돌아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제사장에게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달리 예수님께로 되돌아왔습니다. 분순종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눅 17:17 [새])

여기에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겼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감사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제사장에게 보이는 것보다, 즉 율법을 준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감사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공동체로 돌아가는 것보다 먼저 하여야 할 것이 감사였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깊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 감사였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애급에서 나올 때, 그들을 홍해가 가로막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홍해를 갈라 백성들이 마른 땅을 밟고 건넜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군사들이 그 뒤를 따르다가 바다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애굽의 군사들이 바다에 빠져죽는 것을 본 천사들이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렇게 꾸짖으셨다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이 내 눈 앞에서 멸망당해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너희의 찬송을 들어야 한다는 말이야?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바클레이라는 신학자는 “이러한 유대 랍비들의 말처럼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이 당한 불행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서는 안 됩니다.”고 하였습니다. 남들이 불행해져도 자기만 잘 되었다고 감사할 것이 아니라는 역설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넌 것은 감사해 합니다. 그러나 애굽 군대가 홍해에 빠져죽은 것을 감사해서는 안 된다는 해석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감사하여야 할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에게 어떻게 기도하여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내용을 함께 생각하고 배우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기도하여야 합니까?
  
I. 누구에게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여야 하느냐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누구에게 기도하여야 하는 지는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이미 드러난 문제입니다. 5절 말씀입니다.

: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시간에 맞추어서 기도하였습니다. 오전 아홉시, 정오 그리고 오후 세 시였습니다. 더 엄격한 사람들은 해가 뜰 때와 해가 질 때를 더하여 하루 다섯 번씩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그것도 시간에 맞추어서 기도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기도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그 시간에 맞추어서 거리로 나와서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거리에서 ‘시간이 되어서’ 기도하는 것과 시간이 되어 ‘거리로 나와서’ 기도하는 것은 다릅니다. 자신이 경건한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칭찬 듣기 위해 집안에 있다가 시간에 맞추어 길거리로 나가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집안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데 굳이 거리로 나와서 기도하는 것은 자기가 기도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기도를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1.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중요한 기도를 단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이미 생명을 잃은 종교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칫 우리는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는 아니라고 하지만, 사람을 의식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저의 목회 초기에 있었던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새벽 기도회에 나오셔서 오래 기도하는 나이 많은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이 미웠습니다. 그래도 전도사가 그 교회에서 제일 오래 기도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데, 그 권사님이 전도사보다 더 오래 동안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대상 뒤에서 한참 기도하다가 가만히 돌아보아도 그 권사님은 가지 않고 계십니다. 제가 졸면서 기를 쓰고 기다려보아도 가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도를 마치고 나가고 나면 곧 바로 가십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권사님이 졸고 계시다가 제가 나가는 소리에 깨어서 집으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제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오래 기도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버티기였습니다. 

요즘은 저보다 더 오래 기도하시는 분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제 오래 하려고 버티도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저 보다 더 오래 기도하는 분이 많이 계시기 바랍니다. 교회에는 목사보다 더 많이 기도하는 성도가 많아야 합니다. 

대표기도는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의 형편을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인 기도, 아름다운 말로 꾸미기만 하는 기도,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기도, 자기 형편을 알리는 신세타령과 같은 기도, 사람들을 꾸짖고 훈계하는 기도,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기도, 자기의 확신을 위하여 ‘믿싸옵나이다’를 연발하는 기도 등등은 주의하여야 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시간 여기에서,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제발 사람에게 보이는 기도라도 좀 하시라’는 것입니다(?). 너무 기도를 안 하십니다. 안 해도 ‘너-무’ 안 합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기도를 드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람에게 보이는 기도가 아니라면, 누구에게 보이는 기도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6절 말씀입니다.

: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기에서 골방은 다른 사람들이 보도록 나가서 기도하는 길거리와 반대되는 곳입니다. 골방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자신만의 은밀한 공간입니다. 오직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공간입니다. 누구에게 기도하여야 할 것인지는 분명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은밀한’ 기도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은밀하다[kruptov"/크뤼프토스]’는 것은 ‘감춰진’, ‘숨겨진’, ‘비밀의’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 몰래 골방에서 기도해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초등학교 5학년짜리가 거실에서 “하나님! 이번 성탄절에는 자전거를 선물로 주세요!”하며 큰 소리로 기도하였습니다. 지나가다가 이 소리를 들은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기도는 하나님께 조용하게 드리는 것이란다.”하고 타일렀습니다. 그러자 손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자전거를 갖고 싶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는데, 아빠가 아직 모르시는 것 같아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중이예요!”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아빠가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b)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는데, 왜 다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데 우리가 굳지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다 아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한다면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정직한 기도’입니다. 사람들은 “다 아시는데 뭘 기도하라고 그러십니까?”하며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과 자녀와의 관계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내용을 자녀들이 감추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얼마나 섭섭합니까? 잘못도 잘못이려니와 그 잘못을 감추고 있다는 것으로 신뢰가 깨어지게 됩니다. 

부모는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자식이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감출 것이 없고 모르시는 것이 없는 하나님께는 정직하게 아뢰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허물과 잘못과 부족함까지 내어 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의 무의식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서로 다 아는 이야기를 하면서 친밀해 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직한 기도는 친밀해 지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또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내용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그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래! 바로 그거야!’라고 하십니다. 솔로몬이 기브온에 드렸던 일천번제가 바로 이런 기도였습니다. 

성경은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왕상 3:10)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솔로몬이 구하지 않는 것도 더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신 말씀의 깊은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더 가까이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드림으로 우리의 인격이 더욱 성숙하여 갈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정직하게 드릴 수 있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더욱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기도를 꾸짖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정직한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내용의 ‘주기도’, ‘주기도문’, ‘주님의 기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하여야 할 완벽한 모범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우리를 위한 기도의 내용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대한 고백의 내용입니다.

  
II. 하나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하기를 원하셨습니까?

9절 말씀입니다.
: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기에서 우리가 오늘 함께 나누려는 말씀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하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씀에서 첫째로 관심을 가지려는 말은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가르치신 기도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말은 바로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1.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기도드려야 할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쳤습니다(사 63:16, 렘 3:4, 말 1:6). 신명기 32:6 말씀은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자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라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가르침은 가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갈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아빠 아버지’는 친밀함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어떤 이미지를 가졌든지 상관없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모든 사랑과 위로를 주시는 분(고후 1:3)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를 깊이 사랑하셔서 매순간 돌보시고 항상 함께 하신다는 신뢰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레 10:3a)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었으니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까이 부르심으로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시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씀에서 둘째로 관심을 가지려는 말은 ‘우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2.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라고 부르라고 하신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나만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 되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는 모든 사람들이 형제와 자매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8 말씀입니다.

(엡 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님 안에서 형제가 되어 함께 예배합니다. 백인과 흑인이 같은 그리스도의 공동체입니다. 감리교인과 장로교인이 하나님의 같은 자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은 시대와 인종과 계층을 뛰어넘어서 형제와 자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나 혼자만을 생각하면서’ 습관적으로 우리라고 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해서 자신의 기도에서 ‘우리 하나님’이라는 말을 빼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신대로 ‘우리 하나님’이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마다 다른 그리스도인과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형제자매로써 더욱 사랑함이 풍성하여 가지를 소원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씀에서 셋째로 관심을 가지려는 말은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이라고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3.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하늘’은 땅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한마디로 ‘땅에 사는 사람’과는 격이 다르신 분이십니다. 인간의 차원과는 다른 분이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초월성 또는 존엄성이라고 합니다. 역대상 29:11 말씀입니다.

(대상 29:11)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친밀하게 부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함부로 대하여도 좋은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면서도 친밀함을 유지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친밀함을 가지면서도 그 위대하심을 그대로 인정해 드려야 합니다. 참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온전한 찬양과 감사를 드려야 할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내용과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구해야 할 내용으로 구별됩니다. 앞으로 이 내용을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친밀한 아버지이시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하늘 계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그 마음에 합한 기도를 정직하게 드립시다. 그래서 하늘의 계신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원하며, 그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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