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창에 걸터 앉은 청년 (행 20:7-12)

첨부 1


창에 걸터 앉은 청년 (행 20:7-12)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많은 사람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은 신이 아니다”(행 19:26절)라고 말한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우상을 만드는 사람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우상을 통해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바울이 말하고 있는 ‘십자가의 도’는 우상 만드는 사람들의 생업을 위협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불손한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생업을 위협받는 사람들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ex)평택 미군기지 철수 운동을 할 때, 대추리 마을 사람들

어쩜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업에 위협받는 사람일지 모르겠군요. 직장인들은 직장인 대로 사내에서 서로 경쟁하며 살아야 할 입장이고, 학생들은 학생들 대로 ‘생업’, 좁아진 그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상황입니다. 농민들도 마찬가지죠? 더 좋은 상품을 생산해내야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잃을 것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쓸 수 밖에요. 왜냐하면 그 가족의 운명이 달려 있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전한 ‘십자가의 도’가 아무리 진리라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생업’에 위협이 된다면 싸울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되는 순간 십자가의 도는 아무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바울 시대 우상을 만드는 업을 갖는 노동자들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지 않을까요? 신앙의 문제만을 놓고 본다면 우리는 다 신실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와 생업의 문제가 함께 있을 때에는 우리의 관심은 신앙이 아니라, 생업이 우선시 될 수 밖에 없는 삶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에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과연 이 땅에 신앙과 생업 사이에서 진리를 쫓아 자유로울 수 있는 신앙인이 있을까요? 

올해 총회 주제가 무엇인줄 아시나요? “그리스도인, 작은이들의 벗”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홀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이 땅에 작은이들의 벗이 되겠다는 의지가 달려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작은이들은 누구냐? 이것입니다. 단순히 가난한 자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물학적으로 키가 작은 사람을 말하는 것도 아니겠지요? 율법 밖에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어쩌면 이 시대 작은이들은 신음하고 있는 지구세계일 수 있습니다. 

이미 자족할 줄 모르고,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 남을 밟고 올라가도 되는 이런 경쟁 사회 속에서, 과연 작은이들의 벗이 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자녀들에게 경쟁사회에서의 승리를 위한 공부가 아닌, 십자가의 도를 중요시 여겨,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끊임없이 경쟁하고, 지지 않으려는, 생업을 확보하고, 지켜야 하는 지금. 이미 인문학도 죽었고, 신앙의 가치도 쇠퇴하고 있으며 생명적 가치도 경제논리로 밀려나는 상황인데, 어찌 다음 세대가 신앙적 가치를 받아드리고, 믿음의 자리로 나아올 수 있을까요? 

ex)마이클 샌들 ‘강의’ 소크라테스 친구 이야기 


행 19:27절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업은 어떤가요? 그것이 천하냐 그렇지 않냐의 기준은 세상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돈을 잘 벌면 귀한 직업이고,
못 벌면 천한 직업이라는 것은 ‘세상의 기준’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하찮은 직업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이 보기에 귀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천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업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여러분의 삶, 신앙적 삶을 통해서 여러분의 생업을 귀하게 여김받기 원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쫓겨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수리아로 가고자 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드로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다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겠지요? 

바울은 드로아에서 이레를 머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간 첫날에 떡을 떼기 위해서 모였고, 바울이 강론합니다. 날이 밝으면 바울은 떠나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니 그 강론이 밤을 세울 수 밖에 없었겠지요? 

영어 성경에는 강론이란 말을 ‘discussion'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주로 이스라엘 랍비들이 진리를 가르칠 때 쓰는 방법입니다. 우리 문화는 아직 ’discussion'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잘 묻지도 않고, 자기 생각을 말할 줄도 모릅니다. 

바울이 아무리 대단해도 밤새도록 혼자 떠들 수 있겠습니까? 물음이 없고, 말씀에 대한 갈급함 없이는 밤새 강론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discussion' 방식으로 묻고 대답하는 과정들이 이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reaction’이란 표현을 쓰는데, 예능 프로그램 방청객이 ‘oh!' ’wow'와 같은 반응을 ‘reaction'이 좋다고 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계획된 반응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하면, 프로그램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습니다만, 드로아 사람들의 'reaction'은 강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토의는 밤중까지 계속됩니다. 

묻고 싶은 것도 이 밤이 지나면 묻지 못할, 안타까운 시간이 자꾸 흘러갑니다. 그 상황을 표현하는 멋진 문장이 있습니다. 

8절,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어두워져서 킨 등불이 마치 진리를 탐구하고 시대의 어두움을 해결하고자 하는 그 시대의 등불로 오버랩되는 느낌을 받는 것은 저뿐인가요? 

늦은 밤 도서관 불빛에서 이 나라의 미래가 보인다고 할 수 있겠지요?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강단 불빛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가 보입니다. 

마치 시대의 등불처럼 드로아에서 다락방 토론은 밤 깊은 줄 모릅니다. 이 때 청년 유두고가 죽게 되지요. 이게 무슨 변고인가요? 
성경에는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해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뜨거운 복음 탐구의 자리에서 청년 유두고는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런가요? 
우리는 어떨 때 졸음이 오나요? 그것은 이야기가 관심이 없거나, 참여하지 못할 때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유두고를 ‘청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오늘 이 시대의 청년을 보는 듯 합니다. 

우리 기성 세대는 뜨겁게 바울과 강론하지만, 젊은 세대는 그 강론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혹, 다락방 창에 걸터 앉아 위태위태하게 밖으로 떨어질 상황은 아닌가요?

청년 유두고가 창에 걸터 앉아 있습니다.
이 땅의 유두고가 창에 걸터 앉아 있습니다.
흥해중앙교회의 유두고가 창에 걸터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 유두고가 창에 걸터 앉아 비틀되고 있습니다. 

청년 유두고가 떨어져 죽었을 때, 바울은 어떻게 하나요? 그리고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했나요?

첫 번째로 한 것은 떨어진 그 청년을 주목합니다. 그를 직시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청년을 바라보지 않으면 청년을 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것이 잘 안됩니다. 왜 진작 창문에 걸터 앉은 유두고를 보지 못했단 말입니까?

두 번째로 ‘바울이 내려가서, 그 몸을 안고’

여러분! 청년의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 세대의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늘 우리 자리 다락방에서 판단하고 있습니다. ‘어이구 비틀거리네, 죽었네’

사도 바울은 청년이 떨어진 자리에 내려가고 그를 안고 있습니다. 마치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릴때 포옹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 안아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안아줌입니다. 마치 바울이 엘리야처럼 유두고를 부둥켜 안습니다. 

그리고 죽었다고 비명하는 사람들에게 ‘떠들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안아주지도 않으면서 ‘멀리서 말하지 마십시오. 가까이 가십시오. 내려가십시오.’

바울은 말합니다. “아직 생명이 그에게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 땅의 젊은 크리스쳔들이 이러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생명이 그에게 있다”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이 떠난 후,
사람들이 청년을 데리고 가지요. 그리고 각자 이 일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아난 청년을 통해” 그런 위로가 우리 삶에 있기를 원합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에는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생명으로 충만하였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생명으로 충만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