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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의 물결 (요 4: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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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물결 (요 4:39-42) 

지난주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 지역의 한 지인으로부터 문자를 받았습니다. ‘10월부터 화곡고등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교회가 많이 성장해 교회당을 짓게 되었군요. 축하합니다’라는 문자였습니다. 

저희 교회는 교회당을 짓지 않기 때문에 화곡고등학교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답신을 보냈습니다. 그 문자를 받고 화곡고등학교 강당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했는데 왜 그 분은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으로 생각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그 분의 말이 이해가 됐습니다. 주변의 여러 교회들이 교회당을 짓는 과정에서 학교 강당을 임시로 빌려 예배를 드렸고 지금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역의 주민들은 행복한교회도 교회당을 짓기 위해서 학교 강당을 임시로 빌려 예배를 드리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분의 생각이 충분히 이해가 됐습니다. ‘행복한 교회가 주일예배를 10월 6일부터 화곡고등학교 강당에서 드립니다’ 라는 현수막의 문구는 행복한 교회 중심의 문구였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대부분의 대화는 자기중심적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말을 합니다. 말을 듣는 사람은 자기 입장에서 듣습니다. 그러니 똑같은 말의 내용인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화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말을 많이 해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의 입장과 생각을 알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며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사랑으로 품으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후에 이스라엘 전역을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북쪽의 갈릴리 지역과 남쪽의 유대지역, 그리고 중앙에 자리한 사마리아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북쪽에 있는 갈릴리 지역에서 사람들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의 성향을 대표하는 사람이 나다나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이라는 인물은 육적으로는 갈릴리 지역의 가난과 억압을 온 몸으로 부딪쳐 가며 고단한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와 메시야가 속히 오기를 갈망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갈릴리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말 속에는 착취와 억압을 당하며 사는 가운데 몸에 배어 있는 갈릴리 사람들의 냉소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나다나엘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놀라운 변화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남쪽의 유대 땅으로 내려가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유대 땅과 예루살렘 지역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그는 육적으로는 물질의 풍요로움과 사회적인 명예를 다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적으로 볼 때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안정감이 없고 불안한 모습입니다. 니고데모의 말 안에는 체면과 외형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내면으로는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며 그를 영적인 변화의 세계로 이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 성에 들어가 창녀의 삶을 살고 있는 한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수가 성의 여인은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의 착취와 억압,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고 있는 사마리아인을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수가 성 여인은 창녀의 삶을 살면서 열등감에 눌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과 높은 담을 쌓고 단절된 삶을 살면서 현실 도피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관심에서부터 시작된 대화는 종교적인  문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대화를 통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열등의식과 삶을 짓누르는 상처의 껍질을 하나씩 벗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변화의 자리로 나가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 니고데모, 수가 성의 여인을 변화시키기 위해 놀라운 기적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깊은 대화를 통해 변화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매우 인격적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실 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낮고 겸손한 모습으로 그들을 대하셨습니다. 나다나엘, 니고데모, 수가 성의 여인은 자신들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마음과 그 분의 겸손한 모습을 보고 그들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 40절에서도 예수님께서 수가 성의 사람들을 대하실 때도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40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 성에서 이틀 동안 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요청을 받고 그곳에 이틀을 거하시면서 그들과 음식을 나누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얼마나 경멸하는지에 대해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을 사마리아인들과 함께 걷지도, 앉지도, 먹지도, 대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과 이틀 동안 함께 거하시면서 음식을 나누고 삶을 나누셨습니다. 그 당시 상황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가 성의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인격적으로 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그들과 이틀 동안 거하며 단지 인간적으로 친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 교제와 대화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41, 42절을 보면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인격적인 만남이 이뤄진 것입니다. 

신문에 났던 이야기입니다. 대만의 한 청년이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2년간에 걸쳐 매일 연애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700통이 넘는 연애편지를 보냈습니다.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2년에 700통이 넘는 편지를 쓰는 세계적인 기록을 세웠습니다. 대단한 열정입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렇게 사랑했던 여인과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그 여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이 결혼한 청년은 아이러니하게도 2년 동안 700통이 넘는 연애편지를 전달해 준 우편배달부 청년이었습니다. 700통의 일방적인 사랑의 편지보다는 매일 얼굴을 보며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며 쌓았던 인격적인 나눔이 더 소중하더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를 만남의 자리로 초대하시면서 단편적인 성경 지식과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는 만남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어 뗄래야 뗄 수 없는 인격적인 만남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를 인격적인 만남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지를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생활 속에서 예수님과 어떤 교제가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까? 내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난주에 보여드렸던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생활 가운데 얼마만큼 영향력을 가집니까? 교회, 직장, 취미, 가정, 돈, 먹고 마시는 것, 공부와 사회적인 활동 등에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까? 삶 속에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져 우리의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변화된 수가 성의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들이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수가 성의 여인은 창녀의 삶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과 등을 지고 살았습니다. 그녀가 가장 뜨거운 대낮에 물을 길러 우물에 온 것도 마을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서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여인을 보면 침을 뱉었고 조롱했습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그들과 담을 높이 쌓고 살았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창녀의 살을 살고 있는 자신을 버리지 않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여인은 감격하여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뛰어 들어가 마을 사람들을 향해 ‘와서 보라’ 고 외쳤습니다. 

그녀의 외침의 내용을 보면 자신의 과거의 삶을 족집게처럼 잘 맞추는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이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외침 속에는 내가 창녀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버리지 않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 그 분이 바로 메시야이십니다. 내가 그 분을 만났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녀의 감격과 기쁨의 외침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그녀의 몸짓은 다른 사람들의 호기심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그녀의 변화는 또 다른 변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녀의 외침에는 자신에게로 향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변화시키신 예수님에게로 향했습니다. 사랑으로 나를 변화시키신 그 분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의 구주가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변화를 선포하며 그 변화를 만들어 주신 예수님에게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 전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가정과 직장, 이웃들 속에서 수가 성의 여인과 같은 변화된 삶을 가지고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시키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변화가 없는 외침에는 꼭 돌아오는 말이 있습니다. ‘너나 잘 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입니다.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 말씀 안에서 변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향해 이렇게 변해야 하고 저렇게 변해야 한다고 말을 하니 세상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너나 잘 해’라고 말하는 상황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지속적으로 변화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변화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변화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일방적인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을 가지고 낮고 겸손한 모습으로 이웃들과 대화를 나누며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모습을 통해 지역을 섬기는 가운데 지역 주민을 향해 ‘와서 보라’고 외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행복한 교회의 변화가 또 다른 변화의 물결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행복한 교회를 통해 지역의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의 자리에 이르는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하는 교회와 그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진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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