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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은혜에 감사 합시다 (엡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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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은혜에 감사 합시다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미우라 아야꼬라 하는 일본 여자가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쓴 수필 이라 합니다. 그 여자의 남편은 나이가 그녀보다 몇 년 아래인데도 남편이 끔찍하게 그녀를 사랑해 주었고 그 여자도 그 남편을 많이 사랑했다합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깊은 산골 아주 아름다운 자연 속을 거닐고 있을 때에 곰이 갑자기 나타나서 잡아먹겠다고 하면 자기는 곰한테 달려들면서 날 잡아먹는 동안 당신은 빨리 도망가세요."라고 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남편 뒤에 숨었다가 곰이 남편을 잡아먹는 동안에 자기는 도망을 갈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합니다. 아마 그것이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곰과 같은 사망 혹은 저주에 자기를 던져버리고 우리를 살려 내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본질이십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제물과 생축으로 드리셨다고 하는데 이는 구약의 제사 제도와 관련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의 형식에만 치우쳐 하나님과의 사랑의 회복이라는 제사의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말라기서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존경치 않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존경하여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심은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창조하셨고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어 자기 백성을 삼으심으로써 스스로 그들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지켜 보호하시기를 아버지가 자녀를 양육함과 같이 하여 먹이시고 입히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 것을 명하셨지만 방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여 가증한 죄악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눈먼 희생으로 드림으로써 범죄 하였음을 말씀하시면서 그것들로 세상의 권세 자에게 드려도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 율법에 따라 흠 없고 티 없는 것으로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좋은 것을 아까워하여 나쁜 것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범죄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실제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형식적인 제사를 드렸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제사가 형식적인 것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간구를 들어 응답지 않으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심판을 내리시겠다는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받으심에 있어서 제사를 드리는 자들의 중심의 믿음을 받으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병든 제물을 제단에 바쳤다는 것은 곧 그 중심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잊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손으로 드려지는 제물을 받지 아니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들을 기쁘시게 받지 아니하시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구약 시대에도 미가 선지자를 통해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오직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분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7-8)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을 입혀 보내시어 십자가상에서 완전한 희생의 제물이 되게 하심으로 범죄 한 인간의 죄를 사함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신 사랑의 확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 잘 아는 대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온갖 멸시와 고난과 고통을 다 당하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고 합니다.

사랑의 중요한 요소는 '실천'입니다. 상대에 대한 실천의 덕이 빠진 사랑은 모조품 사랑입니다. 마음과 의지에 머문 사랑은 일종의 감정일 뿐 결코 참된 사랑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는 실천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사건이 그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을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과 함께 하시고자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하나님께서 뛰어 들어 오신 것이 바로 성육신의 의미입니다. 복음 진리의 시효가 바로 성육신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사건은 구속 은혜가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적용되는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는 이론으로 그치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시는 실천적인 행동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사랑의 진수'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말씀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상대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하는 행위야말로 사랑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의 생명까지 희생시키며 우리를 향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 은혜는 희생의 실천이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탕은 하나님의 모든 구속섭리와 은혜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어떤 신학자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다'라고 했습니다. 과학자의 눈으로, 학자의 의식으로 하나님과 그 섭리를 대하면 끝없는 의심만 되풀이 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과 그 섭리를 대하는 성도만이 진리의 진가를 알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은혜, 즉 구속의 섭리도 마음을 열어 놓고 인격적인 자세로 대해야 그 본질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대한다는 의미는 논리적인 교리 중심이나, 신비주의적인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구속섭리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구원 교리도, 신학도 이해를 해야 올바른 앎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용서로 나타내셨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 10:12)고 합니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끝없는 이해와 관용으로 용서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수준이나 취향에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등을 돌리는 말초적인 감정과 다른 점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거듭난 성도들을 끝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이 점이 또한 큰 은혜입니다.

만일 엄격한 법관처럼 우리의 행동을 감시하고 비판하고 정죄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평안을 누리고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감사하게도 우리를 끝없이 용서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잠17:9)라고 한 것처럼 우리의 허물과 흠을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라고 한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끝없이 변호하시고 용서의 간구를 해주시므로(롬8:33,34) 정죄대신 용서의 은혜 속에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용서받은 은혜 속에서 끝없는 자기 개선과 회개의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상대가 부하고 건강하고 똑똑하면 교제를 하다가도 병들고 외롭게 되거나 약점이 있게 되면 교제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약한 것을 외면하시지 않고 더욱 아끼고 동정하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고 합니다.
우리가 외로운 처지에 있을 때, 우리를 참되게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말씀을 통해, 혹은 기도 중에, 또는 환경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의 연약한 것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말씀을 순종치 않거나 진실한 기도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합니다. 다 빈치는 그림을 구상하면서 가룟 유다를 어떻게 그릴까 생각하다가 자기가 제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려서 가룟 유다를 삼았습니다. 그리고서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고 했는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자기가 미워하여 가롯 유다로 그린 그 친구를 찾아가서 그에게 사과를 했다합니다. '내가 실상은 당신의 얼굴을 가롯 유다의 얼굴로 그렸는데, 나머지 그림이 그려지지를 않아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왔소.' 그러면서 친구에게 자기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했다합니다. 그러고 나서,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그린 그림이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할 때는 위대한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선물을 주셨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5-6)...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 5:15)고 합니다.

어느 한 수도원이 위치한 깊은 산 속의 한 작은 오두막집에는 한 랍비가 은거하고 있었다합니다. 쇠락의 길로 가고 있는 수도원 문제로 고뇌하던 수도원장은 문득 그 움막의 랍비를 찾아가 수도원을 부흥시킬 조언을 청해서 들어보기로 했다합니다. 랍비는 말하길 “죄송합니다. 전 아무런 조언도 들릴게 없군요. 그러나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당신들 가운데 메시아 가 있다는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늙은 수도사들은 랍비가 한 말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합니다. “우리들 중에 메시아가 있다고?”“이 수도원에 있는 우리들 다섯 명의 수도사 가운데 한 사람이 메시아란 말인가?” “그렇다면 과연 누가 메시아일까?” 늙은 수도사들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어쩌면 메시아일는지 모르는 서로를 깊은 존경심을 갖고 대하기 시작했다합니다. 

그러자 이 수도원의 분위기는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합니다. 그리곤 점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수도원을 찾아와 그 수도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고, 수도사가 되겠다고 지원하는 젊은이들도 많아져, 마침내 그 수도원은 옛날처럼 번창한 곳이 되었다합니다. 랍비의 지혜로운 선물 덕분에 그 수도원은 다시 그 지역에서 빛과 영성의 중심지가 되었다합니다.

하나님은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심으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저 천국의 영광을 기업으로 주시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대가를 치를지라도 얻을 수 없는 죄 사함의 선물, 다른 어떤 종교적인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영생을 하나님은 거저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4)고 성경은 교훈합니다.

자기의 가진 것 중 아끼는 것을 줌으로써 사랑을 확증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예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상대를 기쁘고 이롭게 만듦으로 행복을 느낍니다.

볼리비아 선교회는 백인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인디언들에게 선물을 주는 방법을 사용하여 선교했다합니다. 인디언들이 주로 다니는 길목이나 개간지, 혹은 물이 있는 곳에 인디언을 위하여 선물을 놓고 갔다합니다. 그리고는 그 선물 속에 흰 십자가도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합니다. 아직 한 번도 선교사를 보지 못한 인디언들을 위해서는 흰 십자가를 상징으로 담아 선물을 준 사람이 바로 이 십자가의 주인과 동일인임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합니다. 그러고 나서 선교사들은 흰 십자가를 지니고 다녔다합니다. 

그래서 인디언들로 하여금 선물과 함께 놓였던 십자가와 선교사들이 들고 있는 십자가가 동일한 것임을 알게 하여 우정을 나누도록 계획하는 것이었다 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선교사들은 인디언들의 신임을 얻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속 은총을 전달하였다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눌린 자와 죄인을 위한 피난처며 원수를 화목 시켜 한 형제로 만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은혜로 천국의 선물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영생 구원의 선물이 그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실화라 합니다. 미국의 모든 시민의 가슴을 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신앙의 도전을 주었던 한 어린 소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어린 소년의 이름은 라이언 화이트(Ryan White)였습니다. 라이언은 13살 때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았는데 수혈을 잘못해서 그만 에이즈(AIDS)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어른들의 부주의로 소년의 인생은 이제 죽음의 길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변함없이 너무나 밝게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하였고 그를 염려하는 부모님을 위로하면서 기쁘게 지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신문 기자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소년의 이야기는 신문에 매일 게재되었고 텔레비전 등의 매체에서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라는 거부 부동산 업자, 마이클 잭슨 등 유명 인사들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가 선물도 주고 위로하며 관심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후 라이언은 5년 동안 살다가 결국 18살에 죽었습니다. 소년이 죽기 전에 그의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내용이 한 크리스천 잡지에 실렸다합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제는 네게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아빠, 전 지금까지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아무도 아빠 같은 선물을 준 사람은 없었어요. 아빠는 저에게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는 티켓을 선물로 주셨잖아요. 바로 예수님을 소개해 주셨어요. 아빠 때문에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선물로 얻었는걸요. 이 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없을 거예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모든 것이 사랑을 기반으로 시행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성도는 사랑의 은혜에 감사하며 굳센 믿음과 충성으로 응답하는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교회설립 80주년의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한해를 살며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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