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렇게 기도하라(7) : 시험 (마 6:9-13)

첨부 1


이렇게 기도하라(7) : 시험 (마 6:9-13)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영과 혼과 육이 두루 건강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그 이름과, 그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는 양식과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먹어야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개를 훈련시키는 간단한 방법이랍니다.

마룻바닥에 아주 먹음직스러운 쇠고기 덩이를 갖다놓은 후 개를 데리고 옵니다. 개가 쇠고기를 보고 뛰어가 그 고깃덩이를 물면 개를 몇 차례 때려주고 고기를 빼앗아 놓습니다. 그 다음 또 그 자리에 고기를 갖다놓고 기다리면 개가 또 뛰어가려고 달려듭니다. 그때 주인은 “안 돼!”하고 명령합니다. 그러면 개가 멈칫하고 섭니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 훈련을 하면 개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나중에 고깃덩이를 또 갖다놓으면 개가 고깃덩이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봅니다. 주인이 무엇이라고 명령하나 눈치를 봅니다. 명령에 따라 행동할 자세를 취합니다.

개는 이렇게 훈련이 된다는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사람은 개처럼 훈련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개처럼 훈련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고깃덩이에 침을 흘리고, 계속 매를 맞으면서도 주인의 눈치를 살피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개가 아닙니다. 매를 맞고 나서야 고칠 줄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개보다 못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나일 수 있다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통하여 우리들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배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사람에게는 육체를 채워 줄 일용할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감싸주는 따스한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위한 기도 중 세 번째로 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VI. 시험
  
우리에게 육체를 위하여 양식이 필요하고, 마음을 위하여 용서가 필요한 것처럼, 영적으로 시험에서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배웁니다. 13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3a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 있고, 우리를 악으로 이끌어 가려는 악한 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세상에는 시험과 악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혼자서 달리기를 한다면 언제나 1등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상대가 있으면 등수가 달라집니다. 둘이 뛰면 1등도 하지만 2등을 할 수도 있습니다. 셋이 달리면 1등을 할 수도 있지만 3등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더욱이 시험하고 악한 곳으로 이끌어가려는 것이 있다면 더욱이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더욱이 영적인 상대가 있는 싸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먼저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우리에게 시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험[peirasmov"/페이라스모스]’은 훈련, 도전, 역경, 유혹 등으로 아주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기도하여야 할 내용으로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라고 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우리 자신을 위하여 양식과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험은 영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적 필요가 있습니다.

1) 믿음을 흔드는 것이 있습니다.

시험은 유혹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이상입니다. 에덴동산에 살던 처음 사람에게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말씀을 믿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간교한 사탄이 그들에게 다가와서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타락은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고 고백하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눅 22:33)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나도 허약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쉽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올곧은 신앙의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런 저런 이유로 흔들거릴 때가 있습니다. 유혹을 받기고 하고, 위협을 받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가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을 흔드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악입니다. 여기에서 ‘악[ponhrov"/포네로스]’은 아픈, 악한, 나쁜, 고통스러워하는 등등으로 폭 넓게 사용됩니다. 여기에서는 ‘악한 자에게로부터’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험하는 악한 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들에게로부터 구출되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유혹하는 악한 자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혼자 사는 세상이라면 법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고 유혹하는 것이 없다면 구원을 위하여 기도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오해하기도 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유혹하고 넘어지게 하는 영적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9 말씀입니다.

(계 12: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큰 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여의주를 물고 하늘을 날며, 때로는 입에서 불을 내뿜는다는 상상 속의 동물인 바로 그 용이 아닙니다. ‘옛 뱀’이라고 해서 땅을 기어다는 파충류의 한 종류를 가리키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 하는 바로 영적 존재입니다.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던 바로 그것입니다. 시험은 단지 마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을 받고, 유혹을 당하는 것이 단지 마음의 문제라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영적인 존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육체의 문제가 해결되어 먹고 마실 것이 있고,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어 자존감을 느낀다고 해도 영적으로 죽어 있으면 진정한 평안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자연인이 겪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이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는데서 오는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마귀를 대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여야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3) 문제는 인간은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인정하여야 할 것은 세상은 강한데 우리는 약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역설적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우리의 힘입니다. 먼저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7:24입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은 사도 바울의 탄식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는 자신을 보면서 절망하였습니다. 이런 경험은 일찍이 다윗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것이 오히려 능력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지하묘지에 있는 영국 성공회의 어느 주교의 묘비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에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 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런데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서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나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고, 나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고 나라와 온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했던 것을 후회하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자기 몸무게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몸뚱이 하나를 추단하는 것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내 말을 제일 안 듣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일 수 있습니다. 정말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세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한데 희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약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13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3a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비록 밥을 먹어야 살고, 사람을 용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하는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시험과 악에 대하여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혀 의미 없는 일을 명령하셨겠습니까?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험과 악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2. 우리는 시험과 악에 대하여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모순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고 하면서 세상에 맞서 싸우라고 하는 것은 얼핏 모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싸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 싸워줌으로 싸울 수도 있습니다. 그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가 시험과 악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적 싸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1) 우리는 끌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연약하여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과 함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우리가 영적 싸움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21 말씀입니다.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절망할 뿐만 아니라 희망도 함께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부터 존귀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한마디로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역시 아무런 생각이 없는 성령의 로봇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꺼이 순종하기를 결심하고,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야 합니다. 

에베소서 5:8 말씀은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빛의 자녀이기에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악한 영들에 대하여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9a)고 하였습니다. 

시험과 악에 끌려가지 마시고 단호하게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싸워서 승리하여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연약하여 넘어지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대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인 교회입니다.

2)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들이 홀로 살아가기를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 돕는 배필을 지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이 서로 도와 힘을 합하여 악한 세력과 싸워서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히브리서 10:24-25 말씀입니다.

(히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교회는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는 서로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모이기에 힘을 쓰지 않습니다. 그래도 서로 권하여 더욱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악한 세력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영적 공동체가 악한 세력과 싸우는 것입니다. 교인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영적 능력을 드러내는 거룩한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시험과 악과 싸워서 승리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교회가 세상을 이기는 능력은 무엇입니까?

3) 우리는 그 능력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우리의 싸움 상대가 혈과 육이 아니고 악한 영들이라면 우리가 가져야 할 무기가 어떤 것인지는 분명합니다. 에베소서 6:10-11입니다.

(엡 6:10-11)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험과 악에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영국에 비드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은 성자로 여겨집니다. 하루는 그에게 그 제자들이 묻습니다.

“우리는 종종 받은 시험으로 인하여 많은 번민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시험 받으신 일이 없으신지요.”

그러자 성자라고 불리는 그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너희들을 괴롭게 하는 온갖 시험은 내게도 온다. 그러나 시험이 찾아와서 내 마음을 노크할 때마다 나는 대답하기를 여기는 예수님이 이미 점령하였으니 들어 올 자리가 없다고 한단다. 그러면 시험하던 마귀는 물러간단다.”

시험이나 유혹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시험이나 유혹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묘지에 묻혀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다만 시험과 유혹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과 그 능력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욱 예수님으로 채우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육체까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 능력으로 시험과 악을 이기는 사람들이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시 13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3a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여기에서 ‘다만’이라는 말은 ‘도리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 주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악에서 구함을 받도록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구하여 줄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3. 우리는 최후 승리를 믿습니다.

기도하면서도 의심하는 어리석은 모습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것을 배워가야 합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라면 이것이 반드시 이루어야 질 것을 믿어야 합니다. 구원을 기도한다면 구원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영적 싸움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1) 이겨 놓은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이 세상에서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이기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이겨놓으신 것을 누리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3:8입니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 마귀의 일을 멸하셨습니다. 더 이상 사탄이 우리에게 요구할 죄의 값은 사라졌습니다. 여전히 사탄의 요구에 죄의 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쩔쩔매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십자가의 속죄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죄의 짐에 눌려 있는 사람은 믿음이 적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치르는 값은 구원의 감격과 그 능력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최후 승리를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승리를 확신하고 사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까?

2) 하늘의 백성으로 땅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며 사는 사람입니다. 베드로후서 3:13-14입니다.

(벧후 3:13-14)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여러분, 혹시 뿌리를 하늘에 박고 가지를 땅으로 향하는 나무를 보셨습니까? 세상에 이런 나무는 없습니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박아야 살 수 있습니다. 하늘의 향하여 활짝 펴고 태양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하여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주목하여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15 말씀입니다.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우리의 삶은 세상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이 필요합니다.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더욱이 시험과 악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승리하여야 합니다. 더욱이 세상은 강한 듯이 보이고 우리는 약한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반대입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약하고 비록 세상에 강할 지라도 그 이름으로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