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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이 충만한 인생 (행 4: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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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충만한 인생 (행 4:23-31)

제가 읽었던 책 중에 미국 코넬대학교 칼 필레머 교수의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2011년 라이브러리 저널이 선정한 최고의 책이자, 세계적인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가 “2012년에 읽은 가장 감동적인 책”으로 극찬되기도 했습니다. 칼 필레머 교수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인들은 삶의 답을 찾아 이리저리 헤맨다. 인간관계, 재정문제는 물론이고, 심지어 부부관계까지 삶의 온갖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TV나 라디오 등 각종 대중매체의 전문가 상담코너나 강연에 귀를 기울인다. 도움이 될 만한 칼럼을 읽거나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하고 자기계발 웹사이트에서 상담도 한다. 책 또한 빼놓을 수 없는데 그 덕분에 오늘날 서점마다 자기계발서가 넘쳐나며 사람들이 이런 책을 사들이느라 쓰는 돈도 만만치 않다. 결국 삶의 길을 찾는 사람들만큼이나 그 길을 제시하는 전문가도, 해답들도 넘쳐나는 셈이다. 그런데도 뭔가 허전한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것은 왜일까?”

칼 필레머 교수는 세상을 더 오래 산 사람들에게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해답일까요? 인생을 더 오래 산 사람들 역시 최선을 다해 살았건만 밀려오는 허전함과 외로움을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야 넘치는 활력과 기쁨이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본문 31절 보시죠.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놀랍지 않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밤새 감옥에 구금되어 있다가 장시간에 걸친 재판 끝에 “예수의 이름으로 계속 말을 하면 다시 체포될 뿐 아니라,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위협을 받고 막 풀려난 상황이었습니다. 예수 믿어 일은 꼬일 때로 꼬였고 생명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 31절이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위협과 고난 속에서도 그들이 다 성령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상황에 일희일비하는 인생이 아니라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Ⅰ.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고난 속에서도 성령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삶을 나누는 목장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주보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교회의 비전은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회가 되기 위해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목장교회입니다.  왜 그렇게 목장교회가 중요한 것일까요? 본문 23절 보시죠.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사도들이 풀려나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것은 동료들에게 가서 그 일을 알렸다는 것입니다. 동료는 바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진정한 회심을 통해 참된 믿음을 갖게 된 공동체, 바로 교회입니다. 특히 여기서 교회는 주일에 모이는 모임이 아니라 날마다 가정에서 모였던 목장교회였습니다. 그들이 고난 속에서도 성령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삶을 나누는 목장교회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거친 위협과 핍박과 고난이 찾아와도 그들은 모였습니다.
왜 그들은 모인 것일까요? 그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모일 때 성령하나님이 임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 보세요.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것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이 거룩한 모임입니다. 외로움에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사람들을 만나지만 진솔한 삶을 나누지는 못합니다. 국내 최초로 국제정신분석학회가 인증한 국제정신분석가인 정도언 교수는 “프로이트의 의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머나 먼 옛날, 원시 사회에서는 종족과 떨어져 혼자 있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현대인은 안전하게 고독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저 문을 잠그고 전화를 끄고 이메일을 닫으면 됩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이 넘쳐나는 고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매우 당황스러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을 나누는 목장교회,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성령충만한 인생을 살기 위한 우리의 절박한 필요입니다.

Ⅱ. 한발 더 나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고난 속에서도 성령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모임과 목장교회를 특징짓는 하나의 뚜렷한 구별이 있다면 그것은 목장교회가 기도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는 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면 아무리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할지라도 그 목장교회는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성령충만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모임에 대해 정도언 교수는 “프로이트의 의자”라는 책에서 이렇게 진단합니다.

“사람들 속에 있다고 고독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낮에 일하면서 아무리 많은 사람과 즐겁게 웃으며 어울려도 그들과 나 사이에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만남이 없으면 모두 허황된 것입니다. 외로움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 잃은 어린아이처럼 외롭고 쓸쓸합니다. 고독감을 피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과 어울려 보았자 힘만 더 들고 얻는 것은 없으며 자칫하면 마음과 몸에 상처를 입습니다. 누구는 남에게 방해받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막상 혼자 있게 되면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삽니다. 길거리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람들이 풍기는 낯선 냄새가 나를 압박하지만 내 발길은 오늘도 그곳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얼굴을 매일 본다고 해도 마음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서로에게 영원히 낯선 사람입니다.”

목장교회에 가보았지만 시간이 가도 낯선 느낌이셨습니까? 아니 더 많은 상처로 인해 아픔을 경험하셨습니까? 목장교회도 연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이 남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소개된 목장교회, 그들은 어떻게 고난 속에서 흩어지지 않고 성령충만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런지 본문 24절 보시죠.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그들이 사도들의 보고를 듣고 무엇을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소그룹으로 모이는 공동체들이 기도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그의 책 “담대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기도에 대해 얼마나 이상한 개념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바로 눈앞에 성경이 펼쳐져 있는데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도대체 믿는 사람들의 기도,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의 기도,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도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께 아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눈물을 뿌리며 기도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 기도를 들으신다는 그분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그것은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소연입니다. 그것은 넋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랜 시간 기도한 것 같은데 아직도 외롭고 아직도 아프고 아직도 힘들다면 제대로 기도하십시요. 기도하는 목장교회를 만들어 가십시요. 본문에 소개된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자기의 개인적인 필요와 소원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뜻대로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필요와 내 소원을 아뢰는 인생은 아무리 채워주셔도 끝없이 부족함을 느끼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인생, 그 뜻을 위하여 기도하는 인생은 성령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 그런 목장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Ⅲ.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고난 속에서도 성령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왜 중요합니까? 이것이 없이 제대로 기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제가 추천한 도서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 중의 한 사람인 제임스 패커가 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연약함의 근저에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 곧 하나님의 길,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에 대한 무지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모른 채 기도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연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약해졌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목장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은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복음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당했습니다. 가장 곤고한 날이 찾아온 그날에 그들은 가장 기뻤고 가장 담대했으며 가장 성령충만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대주재이셨습니다. 24절 다시 한 번 보세요.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뭐라고요?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대주재여’ 여기서 ‘대주재’라는 말은 헬라어로 ‘데스포테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소유주이요. 주권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대주재이시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오, 만물의 소유주이시다. ‘대주재이신 하나님’ 그들에게 하나님은 과거에 계셨던 어떤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온 우주 만물을 그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다스리고 섭리하시고 계시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믿으십니까?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고난의 때에, 슬픔의 때에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대주재이십니다.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이것을 알았던 초대교인들은 모든 것이 꺼져가는 흑암 속에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고, 도망치지 않았고, 담대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제가 읽었던 책 가운데 참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 책은 만 18살에 최연소 여자 세계 챔피언이 된 김주희 선수의 책 “할 수 있다. 믿는다. 괜찮다.”라는 책입니다. 김주희 선수는 지금 만 26살입니다. 저보다도 한참이나 어린 그녀는 2010년 9월, 4개의 챔피언 타이틀이 걸린 일생일대의 시합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경기 초반부터 부상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왼쪽 눈은 화산처럼 부어올랐고, 피는 계속 흘러 링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아직 경기가 반이나 남아 있을 때 주심은 결국 링 닥터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할 수 있다고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김 선수가 부상당한 곳을 계속 공격해왔고 오른쪽 눈마저 이상이 와서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심판은 다시 경기를 중단시켰고 링 닥터가 상태를 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괜찮겠어요? 여기서 그만 하시죠”

모두가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피가 흐르고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오르는 것보다 경기가 중단되는 것이 더 겁났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아빠는 IMF때 실직한 이후 생활능력을 잃어버렸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엄마는 집을 나갔습니다. 5살 많은 언니가 생활을 꾸려가는 지독한 가난, 그 언니와 아빠를 위해서라도 아니 인생을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참아야 했습니다.
 
10라운드 마지막 1분. 눈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매일 쉬지 않고 8시간씩 훈련하며 몸에 새긴 감각을 믿고 마지막 힘을 내어 주먹을 내질렀습니다. 그 순간 해설자의 격양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다시 한 번 공격을 성공시키는 김주희! 흔들리는 주제스 나가와! 턱이 돌아가는 주제스 나가와!”
 
관중들의 연호 소리와 함께 마침내 그녀는 챔피언 벨트를 지켜냈습니다. 시야는 흐릿했지만 그 순간의 세상은 어느 때보다 선명했고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웃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할 수 있다. 믿는다. 괜찮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을 가느냐고 내게 묻는다. 나는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이렇게 반문한다. 권투를 하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그렇게 물어봐 주실래요?”

사랑하는 여러분, 김주희 선수의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고통스러운 훈련, 아니 생사를 거는 사각의 링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지독하게 가난한 인생, 아니 자신의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생명을 걸고 링에 올라야 하는 인생, 그런데 그렇게 살아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보다 넉넉하고 아니 우리를 위해 생명을 거신 주님을 믿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불평과 원망과 외로움과 쓸쓸함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원하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대주재이신 하나님, 그분이 나를 지켜보신다. 그분이 함께 하신다, 그분이 할 수 있다고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저는 이런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이 쉬는 날, 왜 교회 가냐고 왜 그렇게 목장에서 헌신 하느냐고 왜 그렇게 누구 좋으라고 바보같이 헌신하며 사느냐고 물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기를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내가, 십자가의 길을 걷는 내가, 아니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건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그렇게 물어봐 주실래요?” (김인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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