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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 (히 4: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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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 (히 4:14-16)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지만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는 참 무기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도 사슴새끼나 망아지는 태어나자마자 일어나서 걷습니다. 심지어는 강아지도 태어나자마자 걸어서 어미에게 찾아가 젖을 뭅니다. 제가 옛날에 동물의 왕국에서 보니까 바다에서 큰 바다 거북이가 올라와 해변에서 땅을 파고 알을 낳습니다. 얼마 지나 새끼 거북이 수백 마리가 올라오는데 그 새끼 거북이들이 바다를 향해서 절대 질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메마른 육지로 가면 물이 없어서 살수도 없거니와 새가 먹고 무서운 동물들이 있어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놀랍습니까? 태어나자마자 무더기로 바다를 향해서 질주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기는 어떻습니까? 사람의 아기는 걷지도 못하고 뛰어다니지도 못합니다.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고 고개도 잘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멍하니 천장을 보고 계속 울뿐 자신의 똥, 오줌도 가리지 못합니다. 

아기는 절대적으로 의존적인 존재이고 그래서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존재입니다. 엄마는 아기를 안아주고 업어주고 먹여주고 씻겨주고 옷을 입혀주고 하나하나 모든 것을 돌봐주어야 이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서 건강하게 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십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 인간들은 아기와 다를 바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대단하게 보이지만 참 연약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머리의 실핏줄 하나만 터지면 죽는 것이 인간입니다. 항우 같은 장사도 콩알만 한 총 하나 맞으면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코털 하나 뽑다가 파상풍에 걸려서 죽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물에 빠져도 죽고 높은 데서 떨어져도 죽고 차에 치어도 죽습니다. 우리 인간이 대단한 거 같지만 죽는 것을 보면 그렇게 약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갈대와 같고 기껏해야 70년, 80년이면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게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또 하나 많이 아는 것 같지만 더 문제는 한치 앞을 모릅니다. 제가 영국에서 유학할 때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그날 아마 수천명이 그 쌍둥이 뉴욕 빌딩에 와서 아침에 회의도 하고 차도 마시고 전화도 걸고 일을 챙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가 와서 충돌을 해서 그 거대한 건물을 와장창 주저앉고 수천명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날 아침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한 시간 전이라도 그런 일이 있다고 누가 꿈이라도 꾸었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이렇게 연약하고 참 무기력하고 한치 앞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엑스레이 같은 눈으로 온 우주를 살펴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온 만물이 하나님 앞에는 벌거벗은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제가 남모르는 고통에 쌓여있을 때 내 눈물의 고독에 스며있을 때 내 마음의 억울함과 분이 넘쳐 참기가 어려울 때 세상 사람이 내 형편과 내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내 마음 아시지, 내 슬픔 아시지, 내 억울함 아시지. 

그래, 세상 사람들이 좀 몰라주면 어때! 세상을 만드신 이가, 나를 창조하신 이가, 내 마음을 아시는 이가 내 모든 것을 아시느니라.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가 내 옆에 계셔.’ 그러면 내 마음에서 힘이 생기고 용기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잘 아실까요?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의 부분부분, 구석구석, 마음 속 깊은 데까지 아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나를 판단하고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내 마음도 보시고 나의 속 깊은 사정도 다 아십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잘 아시는 또 하나 큰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주님이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니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았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말씀 히브리서 4장 15절을 보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으시고 또 우리 연약함을 친히 동정할 수 있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과부 사정은 과부가 잘 알고, 홀아비 사정은 홀아비가 잘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인생의 달고 쓴 맛을 맛보셨기 때문에 우리를 속 깊이 이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의 입장도 잘 이해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아버지 요셉이 어릴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 마리아 밑에서 살았기 때문에 부모 없는 자의 서러움도 잘 아십니다. 우리 주님은 먹을 것이 없어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찾을 정도로 배가 고프셨기 때문에 배고픈 자의 형편도 잘 아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거처할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말하실 정도로 우리 주님은 거처가 없으셨기 때문에 집 없는 자의 서러움도 잘 아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지독한 배신을 맛보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었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할 때 그 아픔이 얼마나 쓰린가도 우리 주님은 잘 아십니다. 우리 주님은 또한 억울한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억울하게 고통 받는 자의 입장도 잘 헤아리십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죄인의 모든 고통과 슬픔도 아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나인성 과부의 슬픔과 회한에 찬 눈물을 봤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도 우셨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흘리는 정말로 고통에 찬 눈물도 잘 이해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무기력함을 아시고 인생의 모든 한계를 아시고 인생의 처참한 환경을 보시고 우셨던 주님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고 우리의 위로자가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합니까? 오늘 말씀을 봤더니 히브리서 4장 16절은 우리는 긍휼하심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필요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따라 돕는 은혜가 너무 좋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것은 그때 적절한 은혜를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가 로버트 브루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도망을 가다가 동굴을 발견하고 그 안에 들어갑니다. 여러분! 동굴에 들어가면 좋기는 하지만 적이 들어오면 피할 길이 없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정한 것이 동굴입니다. 그런데 적이 오기 전에 거미 한 마리가 그 동굴 입구에 거미줄을 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적들은 그 거미줄을 보고서 사람이 들어갔으면 거미줄이 끊어졌을 텐데 거미줄이 있는 것을 보니까 이 안에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로버트 브루스가 그 안에서 정말 걱정하고 있다가 나와 보니 거미줄이 그 앞에 쳐져 있는 것입니다. 너무 감동해서 “하나님! 조그마한 거미의 뱃속에 나를 위한 피난처를 마련해두시고 또 적절한 때에 거미를 보내사 나를 보호하시려 거미줄을 치게 하시니 주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얼마나 시기적절한 은혜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눈동자처럼 우리들을 지켜보시다가 우리가 시험 당할 즈음에 천사도 보내고 까마귀도 보내고 돕는 사람도 보내고 물질도 보내면서 그때그때마다 시기적절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좀 더 시야를 넓게 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소에 절대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꼭 죽을 일만 되면 그제야 울고불고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천국에서 비파 소리만 듣고 천사와 잔치만 벌이다가 우리가 울고불고 소리 지르고 죽게 되었다 할 때 가끔 힐끗 우리를 쳐다보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 주님은 한 치도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며 우리 주님은 늘 우리를 염려하시고 우리를 향한 마음이 언제나 간절하시고 날마다 은혜 주기를 원하는 참 좋으신 하나님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생은 한번이나 두 번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평생토록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일평생 지속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농부가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둘 때까지 얼마나 고생합니까? 돌도 걸러내야 하고 뿌리도 다 뽑아내야 하고 굳은 땅도 다 일구어서 곱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른 비를 내려야 합니다. 열매를 풍성케 하는 가을의 늦은 비도 있어야 합니다. 또 병충해 있을까봐 약도 뿌려줍니다. 또 여름에 가라할 때는 물도 대주어야 합니다. 햇볕도 적절하게 일조량이 있어야 합니다. 바람이 불어 쓰러지면 일일이 다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을에는 허수아비를 세워서 새들이 오는 것을 다 막아주어야 합니다. 한갓 보잘 것 없는 씨앗의 열매를 바랄 때도 농부의 수고가 이루 말할 수 없고 하늘의 은혜와 도우심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얼마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겠습니까?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른이 될 때까지 정말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될 때까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쓸 만한 일꾼이 될 때까지 주님이 이 세상에 허락하신 사명을 이룰 때까지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간섭과 사랑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좋은 직장도 내가 잘나서 얻은 거 같지만 사실 하나님이 다 손쓰신 것입니다. 집도 우연히 내가 잘 얻었다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미리미리 예비하시고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줄로 믿습니다. 돈을 내가 능력 있어서 잘 벌었다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벌 수 있는 능력을 나에게 주신 줄로 믿습니다. 나의 아내, 나의 남편, 내 자녀가 우연히 왔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배필을 구하기 위하여 얼마가 고개를 돌리시며 찾으셨습니까? 내게 준 자녀도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착각하기를 “주님! 요리는 제가 압니다. 

주님! 가만히 계셔서 음식이나 드십시오.”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실 거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장도 같이 보자.” 하시고 “요리도 같이 하자.” 하시고 “음식도 같이 먹자.”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한 구석에 가두어 두고 “주님! 여기 계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잘 하겠습니다.” 그러지만 우리는 모든 우리 주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간섭과 동행이 필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강하고 위대하시며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원대한 분이시지만 또 우리 하나님은 엄마 같으신 분입니다. 다정하고 섬세하고 세세한 것까지 다 일일이 챙기시는 자상한 분이십니다. 하루 한 순간도 나에게 눈을 떼지 않으시고 마음 졸이시고 바라보시고 안아주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흔히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눈부신 번영이나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척박한 고난의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교도소 선교원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분이 닉슨의 보좌관으로 한때 영화를 누리고 부귀를 누리고 공명을 누렸습니다. 

그러자 정치적 스캔들에 휘말려서 모든 공직을 다 박탈당하고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차디찬 감옥 바닥에 있을 때 비로소 그는 이 차디찬 감옥 바닥이 하나님의 은혜의 울타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눈물 흘리고 회개하고 변화되어서 감옥에 나온 이후에 그는 남은 여생을 감옥에 있는 사람을 선교하는데 바쳤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척박한 환경에 숨기신 은혜에 대해서 바라봤던 사람이 청교도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는데 그 감사예배는 풍요로운 환경, 넉넉한 수확을 보고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풍요롭지 못하고 넉넉하지 못하고 감자 몇 개로 끼니를 잇는 가장 어려운 순간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때를 따라 도우시는 그때그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마음속 깊이 감사를 올리신 것입니다. 그들은 180톤 밖에 안 되는 배를 주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평균 2마일로 항해했지만 117일 동안이나 항해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항해 중에 두 사람이나 죽었으나 한 아이가 태어났음을 감사했습니다. 폭풍으로 큰 돛이 부러졌지만 배가 파선하지 않음을 감사했습니다. 18명이 심한 파도에 휩쓸렸지만 모두 구출되었음을 감사했습니다. 인디언의 방해로 상륙할 곳을 찾지 못해 한 달 동안 배회했지만 호위적인 원주민을 만나서 상륙하게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3개월 8일동안 한명이라도 돌아가자고 한 사람이 없는 것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뿐입니까? 황무지 같은 땅에 씨앗을 뿌려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심한 겨울 추위에 통나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인디언들이 있었지만 호위적인 농사법을 가르쳐준 원주민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실은 절망밖에 없는 척박한 현실이었지만 그러나 그 안에서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눈을 크게 떠보면 우리 평범한 일상생활도 우리는 은혜로 느끼지 못하지만 잔잔히 흐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를 잘 알 것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성폭행 당하고 미혼모가 되었는데 태어난 아기는 곧 죽고 말았습니다. 어린 시절을 정말 비참하게 지냈습니다. 이 사람이 쓰러지지 않고 용기를 내어 자수성가해서 미국 토크쇼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얼마나 돈이 많은지 걸어다니는 기업이라 할만큼 돈이 많고 20세기 미국 흑인 중에 최고 부자라고 칭송을 받는 그녀였지만 그가 한가지 빼놓지 않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은 날마다 감사의 글을 적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적을 거 같습니까? 우리 생각으로는 그녀가 참 거창한 일을 기록했을 거라 생각하지만 참 그녀의 감사의 글을 읽어보면 사소한 것, 일상적인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오늘 아침 거뜬하게 일어나게 된 것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맛있는 점심을 스파게티 먹었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유난히 푸른 하늘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참 얄미운 친구가 있었는데 점심 때 내가 화내지 않은 거 감사합니다. 오늘 좋은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을 쓴 작가에게 감사합니다.” 돌이켜 보면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은혜는 여러 색깔로, 여러 은혜로 내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은혜를 먹고 마시고 은혜의 바다에서 헤엄을 칩니다. 우리가 꼭 죽다 살아야 은혜입니까? 망했다가 일어나야 은혜입니까?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삶의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여전히 아침이 되면 태양이 떠오르고 한밤이 되면 달이 떠오릅니다. 우리 수족이 움직이고 사랑하는 아내, 자녀, 내 남편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내가 지금 누리는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어리석게도 이 모든 것을 당연히 여기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다가 일자리를 잃고 건강을 잃고 사랑하는 아내나 자녀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아!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로 다할 수 없는 보석 같은 은혜로구나.’ 그때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심장이 아직 뛰는 거 하나님의 은혜인줄로 믿습니다. 음식이 맛있게 느껴지시나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손발이 마음대로 걸어서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이 은혜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내, 남편이 웃어주고 내 아들, 딸이 아직도 건강히 건강히 있는 것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주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는 것도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은혜를 주어도 은혜를 모르는 것이 병입니다. 대저택에 사는 부잣집 아이들은 반찬이 어떻다, 용돈이 적다, 재미있는 놀이가 없다, 부모님이 신경을 안 쓴다, 참 불평거리가 많습니다. 그러나 눈깔사탕 하나에도 만족하고 기뻐하는 달동네 아이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사치스럽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고 은혜를 은혜로 볼 줄 아는 눈인 것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는 은혜를 은혜로 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입니다. 

왜 낙심하고 왜 좌절합니까? 집에 연탄 열장만 있어도 쌀 한가마니만 있어도 온 가족이 기뻐하고 행복하고 두 다리 쫙 펴고 콧노래 부르는 이웃들이 있지 않습니까? 왜 사업이 망해 50평에서 30평으로 이사 왔다고 낙심합니까? 수십년 산동네에 살다가 나도 18평 임대주택 얻었다고 동네 사람들 모아 잔치하는 이웃들도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인 것입니다.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살다가 ‘3일간만 본다면….’ 하고 주옥 같은 수필을 쓴 헬렌컬러 같은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맑은 눈을 가지고 봄에 아지랑이 핀 길을 밟으며 여름에 울창한 숲길을 걸으며 가을에 푸른 하늘과 코스모스를 보며 겨울에 눈꽃 핀 아름다운 겨울의 광경을 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내 앞에 있는 시련은 크고 중한데 나는 어린아이 같다고 한숨 짓는 자가 있습니까? 내 인생길을 봤더니 오르기 어려운 언덕도 있고 거친 자갈길도 있고 헤쳐나가야 될 덤불도 있고 건너야될 시내도 있다고 낙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권능하신 하나님, 온 세상을 만드신 여호와께서 그의 강하고 넓은 어깨 위에 우리를 무등 태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서 41장 10절에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나의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 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인되시는 주님의 어깨에 앉은 어린 아이인 것입니다. 

주님의 어깨에서 보니까 모든 것이 구경거리일 뿐, 신나는 일일뿐 내게 걱정과 염려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이 하시는 것을 보고 “아빠! 최고예요. 아빠! 훌륭해요.” 박수만 치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을 따르면 근심의 안개는 사라지고 광명의 태양은 솟아나고 이름 모를 소망과 기쁨의 꽃은 여러분의 마음의 정원에 가득 피어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을 향한 금빛 신념은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좋게 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 본문 히브리서 4장 16절은 우리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받는 모든 은혜의 원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의 보좌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봤더니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데 그 보좌에서 생명강이 흘러 나갑니다.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는데 그 생명나무는 열두 가지 과실을 맺는 생명나무가 있고 그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는 생명의 보좌요 은혜의 보좌요 능력의 보좌요 치유의 보좌인줄로 믿습니다. 원래 구약의 지성소는 일 년에 딱 한 차례, 그것도 대 속죄일날 대제사장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무나 들어갔다가는 죽고 맙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거룩과 위엄과 심판의 보좌라서 죄 많고 허물 많은 인간이 감히 갈 수 없는 두려운 장소이지만 우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심으로 그 거룩과 위엄과 심판의 보좌는 자비와 은혜의 보좌로 바뀌고 만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의 보좌는 일 년에 어느 한 때, 인생에 어느 하루만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보좌는 대제사장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보좌는 이제 일년 열두달,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강하고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은혜의 보좌는 은혜가 쏟아지고 기쁨이 쏟아지고 축복이 쏟아지며 문제 해결의 열쇠가 있고 부르짖는 기도의 응답이 있으며 모든 질병을 치유할 능력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사방 문제 속에 있다고 고민하는 자 있습니까? 상황이 전혀 풀리지 않는다고 근심하는 자 있습니까? 환란과 신음의 줄이 점점 더 나를 옭아매고 있다고 한숨 쉬는 자 있습니까? 

낙심하지 맙시다. 좌절하지 맙시다. 여러분도 힘을 내어 연약한 자는 일어나서, 용기를 내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면 해결책이 있습니다. 주님의 보좌로 나아가면 절망의 자리는 소망의 자리로, 눈물의 자리는 기쁨의 자리로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날마다 솟아날 줄로 믿습니다. 은혜가 부족한 곳에 원망과 한숨이 싹트고 은혜가 부족한 자리마다 낙심과 좌절이 가득하지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면 소망의 구름이 사라지고 기쁨이 넘치고 행복이 넘치며 축복의 무지개가 빛을 환하게 발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갈보리 성도 여러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위하여 날마다 보좌 앞으로 나가지 않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이지만 날마다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기에 감사와 찬미를 올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린 아기와 같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험한 세상에 살면서 사는 삶이 만만치 않을 때가 많고 하루하루가 힘들 때가 많지만 이 자리에 있는 주의 백성들 낙심하지 아니하고 절망하지 아니하고 용기를 내어 주님의 보좌를 바라보며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사모하게 하옵소서. 담대히 주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보좌로 나아가오니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풍성히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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