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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 일하는 사람들... (골 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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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일하는 사람들... (골 4:10-11)
   
 
10.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골로새서 4장 10~11절> 

할렐루야!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이번 주간에 휴가 가는 사람들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예배의 자리에 오셨으니 감사합니다.
옆의 분과 “피서(避暑) 잘 오셨습니다.”라고 인사합니다.
교회보다 시원한 곳은 없습니다.
그리고 더위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건강하다는 뜻이고
더위를 느낄 수 있어야 자연과 맞춰 살아가는 것입니다.
짜증이 나고 힘들지만 
여름이라 원래 더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지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좋은 사람, 바울

바울에게는 수많은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바울의 동역자는 
약 100명 쯤 될 것입니다.
특별히 로마서 16장에는 26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바울은 그 26명이 어떤 사람인지 
일일이 한 명 한 명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다양한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수많은 지역을 돌며 여러 사람을 만나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고, 
하나님의 일 맡은 자로 살게 한 바울은 
사람을 잘 사귀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통계적으로 철이 들고 나서 
그리고 나이 들어 친구를 사귈 수 없을 때까지
‘가깝다, 가까운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5~6명 정도 있어야 보통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나는 이 사람과 친하다. 
이 사람과는 어떤 것도 함께 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어떤 이들은 ‘난 100명쯤 있습니다. 1,000명 쯤 됩니다’라고 
하는데 … 자기만 그렇게 생각할 뿐 
다른 사람들이 좋은 친구라고 여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이 1~2명 정도 있다고 하는 사람은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성경에 기록된 자신의 서신에 
‘나와 같이 일했던 사람, 동행한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라고
기록한 사람이 100여명쯤 됩니다.
바울은 그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살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더라도 
좋은 선생이 되지 못하면 그를 따르는 제자는 없을 것입니다. 
-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이라도 
베풀고 나눌 줄 모른다면 그는 ‘구두쇠’ 혹은 ‘수전노’일 뿐입니다.
-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라도 
아랫사람을 짓밟고 깔보기만 한다면 
그를 존경하고 따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도 바울처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좋은 사람을 사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서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표어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매년 표어를 바꿉니다. 
우리 교회는 표어를 바꾸지 않습니다. 
매년 매 순간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고 싶기 때문에
교회 표어를 바꾸지 않습니다.
교회 표어를 바꾸지 않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대전에 있는 큰 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교회 형편을 알기 위해 그 교회 부목사님에게 
교회 표어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목사님인데 표어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주보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교회 표어를 매년 바꾸면 안되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변하지 않는 우리 교회 표어를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라고 정했습니다.
반면에 매년 표어를 다르게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몇 해 전에 우리교회 출신 목사님(부천 반석교회-신현준 목사)이 
목회하시는 교회 주보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 표어가 그 해만의 표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이 되자」였습니다.

보통 교회 표어라고 하면 
‘성령 충만한 교회 / 세상의 빛과 소금된 교회 /
소망을 주는 교회’ … 이런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사람이 되자’는 
굉장히 소박하고 단순하며 … 가만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합니다. 
교회가 아닌 교도소나 구치소에 붙어 있을 표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았습니다. 

요즈음,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입니까?
「사람이 되자」는 그 목사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원래의 상태를 회복하자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볼 때 어떤 사람일 것 같습니까?

연말, 임원을 뽑는 당회를 준비하며
장로를 뽑을 때 늘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신앙을 가장 먼저 보고 장로를 세웁니다. 
하지만 저는 신앙을 1순위로 보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성품을 봅니다.
신앙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성품만 좋다면
같이 예배드리고, 성경 공부하고, 뜨겁게 기도해서 …
저와 함께 신앙의 수준을 올리면 됩니다. 채우면 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시지만 제가 힘을 보탤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품은 제가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바꿀 수 없습니다. 
성품을 바꾸는데 제가 일조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사회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성품은 
쉽게 고칠 수가 없습니다. 
장로 추천되는 분들은 대부분 나이 50이 넘은 분들인데
제가 혼낸다고, 조언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서 일을 많이 했느냐 …
헌금을 많이 했느냐 … 신앙생활 오래 했느냐 … 
그런 것을 1순위로 보지 않습니다. 
성품을 제일 먼저 봅니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 배우자는 어떤 사람인지를 봅니다.
세 번째, 자녀들은 신앙생활 잘 하는지를 보고
네 번째, 장로가 되기에 합당한 직업을 갖고 있는지를 봅니다. 
장로 될 사람이 유흥업소를 운영한다면 되겠습니까.

다섯 번째, 친구를 봅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로 좋아하는 것, 취미, 운동을 봅니다.
장로 될 사람이 담배갑을 모으고, 
술병을 취미로 모으는 사람을 세우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믿음이 좋은가를 봅니다.

여러분 모두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고 사시기 바랍니다.
어제까지 혹 성품 나쁘다는 소리를 들었더라도 
이제부터 고치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암튼 바울은 좋은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사람들과 동역할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영향력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

본문 골로새서 4장 10~11절에 
바울의 동역자 세 사람이 소개됩니다. 
먼저 「아리스다고」가 나옵니다.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에 살던 마케도니아 사람으로 
바울이 전도여행을 할 때 함께 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성령이 임해 방언과 예언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바울이 지니고 있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아픈 사람 위에 얹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자 병이 물러가고, 
악한 귀신이 쫓겨 나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에베소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아데미의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성령의 역사를 행하고,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하자 
신상을 만들던 사람들의 돈벌이가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은장이(은으로 세공하는 일을 하는 자)를 
중심으로 큰 소란이 일게 되었습니다. 
밥줄이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때 바울과 같이 다녔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사람들에게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울도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구하기 위해 
군중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의 제자들과 바울에게 호감을 가진 몇몇 고관들도 
그를 말렸습니다. 
결국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켜 그 소란은 끝이 났지만 … 
아리스다고는 복음 때문에 죽을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바울과 함께 로마로 배를 타고 가는 도중 
유라굴로라는 폭풍을 만나 난파되는 자리에도 
아리스다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아리스다고에 대해 설명하기를 
“나와 함께 갇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비유적인 의미로서 
‘그리스도의 갇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아리스다고 그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이 고난을 겪을 때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물론 성경에 그의 행적에 관하여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울이 힘들었던 때마다 
곁에 있었습니다.(행19:29; 20:4; 27:2).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릴 때, 기쁠 때 함께 하는 것은 쉽지만 
어려울 때 함께 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때에는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 알려줍니다.

사도바울도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했습니다.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바울의 권면은 
‘나만 고난 받는 것이 억울하고 분하니 
너도 한 번 당해봐라 …’ 하는 투정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 고난 받으라는 권면은 가장 큰 축복이요 영광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리시는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고난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우리 죄 값을 치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죄 값을 치루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음으로 한 형제된 우리들은
서로 서로 짐을 덜어주고 힘이 되어 주고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 있어주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우리 교회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망둥이를 잡으러 나갑니다.
그런데 항상 나갈 때마다 망둥이를 잡은 적이 별로 없습니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지 않아도 
뜰채 하나로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얼마나 쉽게 고기를 잡는 지 영상으로 잠깐 보겠습니다. 

‣‣ 울둘목 숭어잡이 영상 

한 번 가서 잡아보고 싶습니다. 
숭어가 잡히는 원리는 간단합니다. 
한 가운데는 물살이 빨라서 거슬러 가기 힘이 듭니다. 
그래서 쉬운 곳으로, 가기 편한 곳으로 
물살이 약한 양끝으로 숭어들이 이동을 합니다. 
사람들은 그 원리를 알기 때문에 쉽게 숭어를 잡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한다 해도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어려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그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해 쉬운 길로만 가려 한다면 
그 피하는 길에서 사탄의 먹이가 되기 쉽습니다. 
뜰채로 쉽게 잡히는 숭어처럼 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오늘도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고난의 물살을 빠르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쉽고 편한 길로 유혹합니다. 

아리스다고는 힘들고 어려울 때도 바울 곁에 있었습니다.
힘을 주며, 함께 있어주며, 격려하며 함께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사십니까?

바나바의 생질, 마가

그리고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소개된 마가는 
마가복음의 저자이며, 요한이라고도 합니다.(행12:12)
생질은 누이의 아들을 말하는데 조카입니다.
바나바와 마가는 친척 관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의 일을 마친 후
바나바와 마가를 데리고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바울과 바나바가 
구브로로 1차 전도여행을 갈 때 
마가는 두 사람의 수행원으로 동행했습니다. (행13:5, 새번역-조수)
그러나 그들이 소아시아의 버가에 도착했을 때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좋은 관계로 헤어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가는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행13:13)
이 사건은 나중에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서 다툼의 불씨가 됩니다. 
바나바는 2차 전도여행에 조카인 마가를 데리고 가려 하지만, 
바울은 1차 전도 여행 때의 일을 좋지 않게 여겨(행15:38) 
동행을 거부했습니다. 

바울에게는 마가가 선교사역 중간에 돌아갔던 것이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아있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습니다. 
물론 후에 마가는 다시 바울에게서 인정을 받았고
바울의 사역이 끝날 때까지 중요한 동역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마가를 잘 영접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에서는 
“…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 고 했습니다. 
이는 마가가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 
필요한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가의 지난날의 일을 잊었습니다. 
좋지 않은 기억을 계속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손발이 맞지 않는 때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함께 일했고,
그 동역자 관계는 끝까지 유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한번 나쁜 기억을 갖고 있으면 머릿속에서 지우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그것을 기억해내서 또 싸웁니다.
부부싸움하면서도 과거에 있었던 일을 끄집어내서 싸웁니다.

예수 믿어 한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하더라도 … 
사람인지라 … 서로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모였는데
왜 안 부딪히겠습니까?
그래도 서로 용납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 주고
혹 실수 했더라도 잊어주고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와 맞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미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의 1위는 언제나 ‘링컨’입니다. 
그가 그렇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은
그를 따르는 사람은 물론, 비방하고 모욕하는 사람까지도
너그러이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링컨은 초등학교만 조금 다녔습니다. 

그런 그가 대통령에 출마하기까지 
수많은 시련과 수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스탠톤이라는 사람은 링컨을 향해
“교활한 어릿광대, 오리지널 고릴라다. 
고릴라를 구경하려면 아프리카로 가지 말고 일리노이주로 가라. 
거기에 가면 링컨이라는 고릴라를 만날 것이다.”라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그 막말하던 스탠톤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깍듯한 예우를 갖추었습니다.
후에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했을 때,
링컨의 죽음을 가장 깊이 애도한 사람이 스탠톤이었습니다.
그는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잠들었다.’고 하며 
슬퍼했습니다.

링컨은 스탠톤이 했던 말, 했던 행동을 다 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국방장관에 임명했습니다.
바울은 마가의 1차 전도여행 때의 행동을 털어버리고
후에 함께 일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다 털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서로 좋지 않은 기억을 갖고 있다면 …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앙금 다 털어버리시기 바랍니다.
링컨이 그랬던 것처럼,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 다 풀고 용서하세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름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좋지 않은 기억을 갖고 계신 분 (기분 나빴거나, 섭섭했거나 …)
좋은 말로 할 때 푸시기 바랍니다. 털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그래야 합니다.

유스도와 함께 역사하는 자들 …

그리고 오늘 본문에 마지막으로 언급된 사람은 「유스도」입니다. 
성경에 그의 이름은 본문에 한 번 기록될 뿐 자세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바울의 동역자로서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했는지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바울과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아리스다고」, 「마가」, 그리고 「유스도」.
그들은 할례파, 즉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하는 동역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으며 
주로 이방인들을 위해 사역해 온 바울에게
유대동족인 이 세 사람의 수고가 큰 힘과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 목회와 신학 편집부, <에베소서/골로새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두란노, p.410. 참조.]

아리스다고, 마가, 그리고 유스도.
그들은 바울과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못된 일에 마음을 모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지난 달 9일) 신문에 망치로 손가락을 고의로 때려 
보험금 20여억 원을 타낸 일당이 붙잡혔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들은 건설현장을 돌며
“마취를 하고 손가락을 골절시키면 아프지 않고 
2000만~3000만원을 벌 수 있다”고 사람들을 꾀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또한 허위 목격자 등을 미리 만들어 
보험사의 조사를 대비할 정도로 치밀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지역을 다니며 돈을 타내 나눠가졌지만, 
결국 덜미를 잡혔습니다. 
그 기사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범행에 가담했던 근로자들은 
다친 손가락이 정상적으로 회복될 것으로 믿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구부리지도 못하는 등 
장애를 앓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013.07.09. 조선일보. 참조>

세상을 살면서 이런 일에 한 마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마음을 하나로 묶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함께 동역하는 사람 …
그리고 나쁜 기억을 털어내는 사람 …
아무런 드러냄이 없어도 끝까지 바울과 동역했던 유스도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복된 삶의 주인공이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가는
복된 삶의 주인공이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땅에 살며 쉽고 편한 길을 찾아가라고, 
그런 길로만 가라고 사탄이 우리를 유혹해도 
힘이 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일을 위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발걸음을 
중단하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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