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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망의 징표가 되는 삶을 향하여 (마 5: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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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징표가 되는 삶을 향하여 (마 5:14-16)

하나님은 사람을 불러서 세상을 밝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어두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얼마나 사람들은 빛을 사모하는 것입니까? 삶의 의미를 찾아서, 위로 받을 곳을 찾아서, 상처를 치유 받기 위해서, 요즈음 더욱이 경제가 어렵다고 많은 사람들이 어둡고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일어나, 빛을 비추라!”(이사야서 60:1)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14)

누구에게 하시는 말입니까? 다름 아닌 저와 여러분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 마지막 절은 이렇게 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말씀을 읽으며 톨스토이의 단편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이야기가 생각 납니다. 

러시아 어느 곳에 ‘말틴 아프데비치’라는 제화공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구둣방은 창이 하나밖에 없는 지하실에 있어서 창 밖에 보이는 것은 오직 사람들의 발뿐이었습니다. 어느 해 이 사람의 부인이 죽었고 또 얼마 안 있어서 하나 있던 아들마저 죽었습니다. 그래서 절망과 원망 속에 무의미한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그 마을에 신앙 좋은 노인으로부터 하나님을 위해 살라는 권면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 사느냐고 했더니 복음서를 읽으면 거기에 써 있다는 대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복음서를 매일 읽게 되었습니다. 읽는 동안에 차츰 마음에 평안도 오고, 기쁨도 왔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과 같은 내용인 예수님의 교훈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은 바리새인의 이야기도 읽게 됩니다. 이 말씀을 읽는 이 사람의 마음속에 가책이 생겼습니다. “나도 무심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였을까? 나는 늘 내 등 따습고 배부를 생각만 했지 남이 어떻게 사는지 생각해보지 않고 살았다. 이제 손님들을 잘 대해야겠다. 내게 예수님 오신 것처럼 대해야지.” 생각하며 예수님 대접하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어떤 음성이 그에게 들렸는데 “내일 아침 길거리를 살피고 있어라 내가 오겠느니라.” 꿈인지 생시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또렷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다음 날, 하루 종일 마르틴은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차도 끓여 놓고, 맛있는 수프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지극히 가련하고 어려운 사람들만 자꾸 만나게 됩니다. 다 닳아진 장화를 신고 옷도 별로 입지 못한 채 눈을 치우는 노인을 만납니다. 추운 겨울에 여름 옷을 입고 샌달을 신은 여인을 만납니다. 나가보니 품에는 갓난 아이를 안았는데 변변히 아이를 쌀 담요도 없는 모양으로 아이가 마구 울어댑니다. 또 얼마 후에는 사과를 훔치다 걸린 소년이 주인에게 잡혀서 혼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르틴은 주님은 만나지 못했지만, 성심을 다해 이들을 돕고 예수님 대접하는 심정으로 대접합니다. 

그날 저녁에 복음서를 읽게 되었는데,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마르틴, 날 모르겠는가?” 이 소리와 함께, 아까 낮에 만났던, 노인, 젊은 엄마, 소년의 얼굴이 차례로 지나갑니다. 그러면서 복음서를 다시 읽게 되는데, “이는 너희가 내가 굶주릴 때 나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 말랐을 때 물을 먹이고, 길 떠났을 때 나를 잠재워 주었기 때문이니라. 너희들, 나의 형제의 적은 한 사람에게 행함이 곧 나에게 행함이니라.”

톨스토이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이런 이야기를 통해 해석한 것 같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저는 이 말씀을 우리 교회에 새해 주시는 말씀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목회의 목표를 “희망의 징표가 되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어두운 세상, 절망과 원망으로 찬 세상에 따뜻하고 밝은 희망의 빛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주위에 희망을 주는 삶이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빛을 내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빛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하늘의 별이 다 같지 않습니다. 밤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이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항성이 있고, 유성이 있고 위성이 있습니다. 태양과 같은 별은 항성이며 빛을 발합니다. 나머지 별들은 태양에서 나오는 빛을 반사하는 것뿐입니다. 유성/혹성인 지구나, 금성 화성은 태양을 돌며 거기서 나오는 빛을 받아 반사합니다.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밝게 빛을 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연결이 있는 사람은 빛이 납니다. 여러분 한 중심에 그 분을 모시고 사는 삶, 빛나는 삶입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적인 얼마나 삶을 어둡게 만듭니까? 

오늘 우리는 경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경제 위기는 사실은 도덕의 위기입니다. 자기 중심의 생활 방식이 먹구름이 되어 뒤덮은 꼴입니다. 2008년에 와서 지금까지 세계 경제 위기를 만들고 있는 미국 은행들의 행태도 남이야 어떻든지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지, 재주껏 주주들과 임원들 살찌우는데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일어난 일이랍니다. 사람들이 똑똑하지 못하거나 능력이 없어서 만들어낸 위기가 아니라, 내가 삶의 한 중심에 있다 보니, 세상에는 암흑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런 데서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내 중심이 되십니까? 이것은 끊임없는 경건의 연습과 성경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말씀으로, 기도로, 끊임 없는 자기 반성과, 회개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내 삶의 중심에 놓게 됩니다. 잘못된 것 고치고, 해야 할 것을 결심하고 순종하는 일의 반복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줍니다. 기도와 말씀 없이 주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까 이야기에 나오는 마르틴도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빛을 반사하게 되지 않습니까? 

2. 죄에서 자유함으로 빛을 비춥니다. 

등불의 등갓이 깨끗해야 빛이 비추입니다. 이 등은 우리 육신입니다. 육신이 죄로 더럽혀진 채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비출 수 없습니다. 심령의 죄는 성령께서 다스려 주시지만, 육신의 죄, 도덕적인 죄는 우리 스스로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의 위기는 다시 말씀 드려서 도덕적인 위기입니다. 굉장한 성자가 없는 것이 우리 문제가 아니라, 상식적인 도덕조차도 기독교인들이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좀 더디 가도라도 법을 지키는 사람, 내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될까? 생각하는 배려를 가진 – 그런 사람이 예수를 선전할 수 있는 등이 됩니다. 내면의 마음도 깨끗해야 하겠으나, 그것은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고, 보이는 외면의 삶이 깨끗한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3. 비춘다는 말은 높이 들리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사람마다 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을 우리 생활에서 가집니까?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사는 모습을 보게 하라는 말씀으로 깨달아집니다. 목회자의 삶을 살면서 ‘어항 속의 삶’이라는 것이 실감이 됩니다. 주목의 대상입니다. 요즘보다 옛날에는 더했습니다. 실제로 목사들은 자신의 삶을 늘 공중 앞에 내어 놓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목사 가정이었던 우리 집에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어 귀찮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귀찮은 것만큼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빛을 비추기 위해 들어 올리어야 합니다. 남에게 보여져야 합니다. 나의 삶을 개방해야 합니다. 내 사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지만, 빛이 비추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천하에 알리고, 나 자신을 주목의 대상으로 만드는 일은 귀찮은 일이지만 빛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4. 비추어지기 위해 우리는 또한 타야 합니다. 

희생이 되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삶은 남의 유익을 위해 언제나 자신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타는 삶은 결국은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연말이 되니 도와 달라는 요청이 많이 옵니다. 우리 교회도 넉넉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의 심령 속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빛을 발하라.’ 너희 자신이 어려워도 도우면, 내가 너에게 부어 주리라는 약속이 들리는 것 같아서, 도와 주자! 결심이 생깁니다.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몇 사람의 이름이 제 마음에 떠 오릅니다. 희망 전도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해 말 세상을 떠난 강영우 박사, 맹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신 분입니다. 며칠 전 세상을 뜨신 황수관 박사도 있습니다. 

몇 년 전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라는 책을 써서 유명하게 된 서진규라는 분도 마음에 떠 오릅니다. 참 놀라운 삶을 사신 분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보통 사람보다도 몇 배 힘든 환경에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강영우 박사는 중학교 때 맹인이 되었습니다. 황수관 박사의 이야기도 눈물겹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형편이었을 때, 세 시간을 걸어가는 거리에 있는 중학교에 찾아가서 교장선생님에게 사정해서 겨우 중학교에 갔다고 합니다. 

서진규씨는 책제목에 나와 있듯이, 가발공장 직공에서 시작해서 하바드대학에까지 간 사람입니다. 모두가 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지독한 가난이나, 역경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어려움과 가난이 희망의 빛을 더 밝게 하지 않습니까? 더 귀한 것은 이들의 이야기가 한 인간의 의지나 노력, 선함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많은 분들이 어떻게 나 같은 것이 희망의 징표가 될 수 있나, 생각하실 것입니다. 어려운 형편에, 나이 많은 형편에, 못 배운 형편에 나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희망의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있으면 있을수록, 그것이 희망의 빛을 더 밝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선행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선행은 우리만 아니라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무엇입니까? 누구나 그를 만나면 무엇인가 수지 맞는 사람 – 그런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면, 무엇인가 유익을 얻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 우리 자신은 좀 희생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빛을 발하는 사람은 자신이 타더라도, 빛을 비추는 일을 멈추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을 만나서 어떤 사람이 유익을 얻고자 하면 주십시오. 억지로 마지못해 주지 말고, 기꺼이 주십시오.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주신 교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먼저 예수께서 우리 삶에 빛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어두움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추운 삶을 따스하게 녹여 주십니다. 이제 우리가 받을 이 성찬에 그의 사랑의 빛과 온기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타는 등불을 결코 끄지 않으십니다. 방패막이가 되어 주십니다. 
남에게 유익이 되는 인간 결코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남을 위해 자기를 내어 놓는 사람 결코 해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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