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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평강 (빌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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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평강 (빌 4:6-7)

 
요즘 TV뿐만 아니고 일반 용어에도 힐링이란 단어가 유행합니다. 힐링 캠프니 힐링 뭐니, 뭔가 하고 유심히 보면 유명 인사들이 나와서 자기 과거 이야기를 하는데 주로 과거에 아팠던 경험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면 본인은 자기 아픔을 말함으로 힐링을 얻고 시청자들은 그것을 봄으로 대리만족을 얻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대화가 작가가 미리 써 준 대본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시청자들은 경악할 것입니다. 

힐링이란 단어는 20년 전만 해도 유행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미국의 은사주의 교회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치유하시는 것뿐만 아니고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신다는 데에서 힐링이란 말이 유래된 것입니다. 마음의 아픔이 과거의 상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상처로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는 데에서 사람들이 자기의 과거를 더듬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지어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상처가 발생한다고 해서 엄마의 상처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상처의 근원이 주로 어디냐? 주로 가족 · 부모 · 학교 친구, 아니면 어려운 가정 형편이 원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힐링이라는 개념이 원래의 기독교 뿌리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기독교에서 말하는 힐링은 성령이 주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 우리의 아픔을 드러내시면서 그 원인이 되었던 과거를 기억하게 하시고 아픔을 주었던 사람을 용서하고 나도 용서를 받으면서 힐링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힐링이 신앙의 뿌리에서 이탈하기 시작하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냐면 성령이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누군가를 탓하는 형식으로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개가 나에게 상처를 주어서 내가 아팠다, 누가 나를 왕따를 시켜서 내가 외로웠다, 우리 집이 가난해서 내가 힘들었다, 이런 식으로. 그리고 어떤 경우엔 실제로 존재하지 않던 과거를 상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동 성추행의 경우에 실제로 발생하지 않았던 일을 상상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것입니다. 예로부터 이런 것을 일컫는 속담이 있습니다. 못되면 조상 탓.

힐링이 기독교 뿌리에서 이탈하면서 생긴 또 다른 변화는 사람들 앞에 나의 아픔을 말하면 치유를 받으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원래 기독교가 가르친 것은 치유하시는 분이 주님이기 때문에 주님에게 아뢰는 것입니다.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주 우리의 친구니...’ 병자들이 예수님께 자신들의 문제를 말할 때 치유를 받을 수 있었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하는 것조차도 효험이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귀신 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갔는데 그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 말은 제자들이 믿음이 없었다는 말을 하기 위한 것도 되지만, 사람으로서는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는 성경구절도 있지만, 그것은 죄의 문제에 대한 것이고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 서로의 상처를 말하라는 성경구절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가 이런 말을 했지요. ‘당신의 문제를 나에게 말하지 말아라. 내 문제만으로도 버겁다.’ 맞는 말이에요. 사람이 자신의 영혼도 구원할 수 없는데 어떻게 남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으며 어떻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쇼펜하우어라도 바른 말을 한 것입니다. 

힐링이 세속화 되면서, 사람에게 나의 아픔을 말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나의 아픔을 말하는 것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친구 사이에 뭔가 자신의 아픔을 말하지 않으면 친한 친구가 아닌 것처럼 생각했어요. 뭔가 비밀을 말해야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있고, 교회 소그룹에서도 뭔가 자신의 아픔을 공개해야 된다는 암묵적인 압력이 존재할 때가 있는데 이것은 심리적인 폭력이에요. 성령이 내 마음을 감동해서 내가 스스로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할 수는 있지만 어느 누구도 내 마음을 털어놓도록 강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에도 이와 비슷한 습관이 있습니다, 자아비판이라고. 이러한 추세에 인터넷이 합세를 했어요. 인터넷은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을 배설하듯 쏟아놓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입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전부다 인터넷을 통하여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수년 전 제가 대학에 다닐 때 빌리 그래엄 목사님이 저희 대학에 오셔서 설교를 하신 적이 있는데 그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 방에 들어가면 라디오부터 켠다.’ 그게 벌써 30년 전의 일이니까 그 때에는 라디오를 켰지만 요즘에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그것을 대체했습니다. ‘방에 들어오면 라디오부터 켠다.’는 말은 한 순간도 침묵하지 않는다는 얘기에요. 한 순간도 조용한 시간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침묵할 때가 있어야 하나님을 생각할 수도 있고 기도를 할 수도 있고 영성을 개발할 수도 있는데 혼자 있는 시간에도 조용하지 않다면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겠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침묵>이라는 영화가 있었던 것처럼, 기독교 신앙에서 침묵은 침묵 그 이상의 것입니다. 사람이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침묵해야 됩니다. 어떻게 침묵하는 것이 기도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냐? 역설적인 것이 아니냐? 그러나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 감정 · 내 욕망 · 내 미움 · 내 초조함 · 내 염려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한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습니다. 칼 융이 말하길 ‘현대인에게 마귀가 시끄러움을 주는 것이 아니고 시끄러움 그 자체가 마귀’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성미가 급하면 말을 더듬지요? 그것은 감정이 말보다 먼저 나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든 분노든 초조함이든 욕망을 끄고 가라앉히고 침착하고 그리고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에요. 오늘 본문 말씀의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은 염려 대신에 기도를 하라는 말도 되지만, 염려를 하는 한은 기도할 수 없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염려를 꺼야 기도가 가능해진다는 얘기에요. 이것이 침묵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리고 침묵해야 기도할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을 유일한 대화의 상대로 삼아야 된다는 말이에요. 히스기야 왕이 죽음을 통보받고 벽을 향해 돌아누워 기도했다고 했는데, 그 말은 벽에다 대고 기도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을 유일한 대화의 상대로 삼았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을 유일한 대화의 상대로 삼기 위해서는 조용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Quiet Time.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씀이 있다면 ‘Be Quiet! - 조용하라!’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도록 해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사정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될 줄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이에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도록 해드려야 됩니다. 오두방정을 떠는 것이 믿음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설득해야 되는 것이 아니에요.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에요. 

만일 하나님을 설득해야 된다면 그건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선한 것을 주시기를 설득할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후하시기를 설득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할 수는 있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미 선하시고 하나님은 이미 후하시고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믿어야 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조용히 있어봐야 됩니다. 

대한민국의 개신교가 말씀과 기도를 강조하다보니까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은 시끄러운 존재가 돼 버렸어요. 말씀과 기도를 강조하다보니까 말이 많아졌어요. 말이 많은 것이 경건한 것인 줄로 생각합니다. 시끄러운 것이 영적이 것으로 생각하고 시끄러운 예배가 성령 충만한 예배인 것으로 생각하게 됐는데 시끄러움이 성령이 아닌 것처럼 시끄러운 예배가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씀이 있다면 ‘Please Be Quie. - 좀 조용하라.’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찾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실 기회를 드리고 그리고 우리의 많은 생각과 감정을 꺼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수년 전 케네스 헤이건 목사가 쓴 글에 ‘기도하는 사람의 특징은 말이 적다는 것이다.’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정말 맞습니다. 할 말을 기도로 다 했는데 무슨 할 말이 또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경건한 사람에게 문제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한은 근심과 염려가 끊이지 않습니다. 근심과 염려가 전혀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죽으면 염려가 끊깁니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는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되고, 한 아이가 아프다가 나으면 다른 아이가 아프고, 한 아이가 문제를 일으키다가 해결되면 다른 아이가 문제를 일으키고, 여기에 쓸 돈을 벌면 저기에 딸리고, 사람은 문제가 끊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머릿속에 이런 저런 생각이 개미처럼 기어 다닙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에 평강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 문제가 다 중지되고 해결되어서가 아니고 문제는 여전히 있고 이 문제 아니면 저 문제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평강. 

오늘 본문에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사도바울의 논술학원에 다녀본 적이 없는 어법입니다. 요즘은 어느 누구도 이렇게 복잡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직설적으로 쉽게 말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도하면 하나님이 평강을 주신다, 이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에요.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구한 것을 주신다 이래야지, 기도하면 하나님이 평강을 주신다? 내가 언제 평강 달라고 기도했습니까? 문제 해결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응답은 어디가고 그 대신 평강을 주신다는 말이냐? 이건 도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냐?’ 전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건 제가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을 경험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평강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을 느낀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조용히 다가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주신다는 말이에요. 이것은 우리의 개별적인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개별적인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고 함께 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평강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이것은 심리적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착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이러한 평강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말은 특별히 평강을 느낄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평강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에요.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할 때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것은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에요. 이러한 평강을 값싸게 여기면 안 됩니다. 

저는 개인 기도를 할 때 주로 영어로 하는데, 그건 마치 가톨릭 신부님들이 라틴어로 기도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자기가 은혜를 받은 언어로 기도가 나와요. 그런데 요즘엔 기도를 하려고 입을 열면 자주 튀어 나오는 말이 있는데 ‘Don''t worry - 염려하지 말아라’ Don''t worry, 제가 무엇을 그렇게 염려하는지 모르겠는데 기도하려고 입을 열면 종종 튀어나오는 말이 Don''t worry…. 하나님이 어떻게 책임을 지려고 그러시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성령이 감동하시면 제일 먼저 튀어 나오는 말이 "염려 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사람은 염려는 하고 하나님은 평강을 주십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다양합니다. 몸이 뜨거워지는 사람도 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 콧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 몸을 떠는 사람도 있고, 넘어지는 사람도 있고, 몸을 흔드는 사람도 있고, 환상을 보는 사람도 있고, 무엇을 깨닫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재채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다양하듯이 사람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너무 신비한 경험은 일회적이고 예외적이고 특별하고 보편타당성이 없기 때문에 ‘당신도 떨어’라든가 ‘당신도 넘어져’라든가 ‘당신도 울어라’ 이렇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신비한 경험을 많이 했지만 그 대부분은 일회적인 것이었고 평생 한 번한 경험이에요. 야곱이 베델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사닥다리가 이어진 것을 보았지만 일평생 한 번 경험한 것이고,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것을 경험했지만 일평생 한 번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편타당성이 없는 신비한 경험은 남에게 강요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수시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평안을 느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건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는 평강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건 진정제로도 안 되고 마약으로도 안 되고 술로도 안 되고 친구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걸 경험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됩니다. 잭 웰치를 인터뷰하는 프로를 봤더니 그가 뉴욕의 성패트릭 성당 앞을 지나다가 마음이 동해서 성당 안에 들어가서 한 한 시간을 앉았다가 나왔는데 마음이 정말 좋더라,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봤어요. 억만장자 중에 자기가 가진 돈을 다 써도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 토론토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면서 한번은 토론토 대학 채플 앞을 지나는데 채플에 들어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낮이었는데 채플에 한사람도 없고 얼마나 조용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리에 앉아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기도하는 중에 제 입에서 예언이 나왔습니다. ‘내가 곧 너를 쓰리라.’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말씀이었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며칠 후에 제가 다니던 토론토 교회에서 중고등부 여름수련회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고 제가 그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는데 대학교 2학년이 고등부 수련회 강사가 돼서 인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얼마나 크게 역사하셨는지 제가 이후에 목회자가 되었으면서도 그때와 같은 성령의 역사를 본적이 없어요. 

기도를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도하게 하신다는 말은 뭔가 큰일이 일어날 징조라는 얘기에요. 여러분에게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은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라는 말이에요. 우리는 기도를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기도할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요, 기도가 안 되는 것이 문제이지, 사람이 기도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요, 또한 기도하는 마음도 하나님이 주시지만 기도를 함으로써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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