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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쁨으로 살자면 (빌 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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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으로 살자면 
빌립보 2:12-18

그렇게도 무덥더니 벌써 아침 저녁으로는 찬바람이 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한국의 7, 8월은 무더위와 장마 등으로 쉽게 짜증이 나고, 자칫 잘못하면 갑자기 무기력해지기 쉬운 절기입니다. 그런 계절을 건강하게 지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금년 우리교회는 유치부에서부터 장년부에 이르는 각 부서가   여름성경학교를 잘 감당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을 하고, 그럴 수 있도록 기도로 도와주시고, 물질로 헌신해주신, 임원들과 성도님들과 교회학교 교장님이하 여러 교사들과 신학생을 비롯한 동역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탈무드에서 한 랍비가 말하기를,‘하나님은   마음이  밝은 사람을   축복해 준다. 낙관하는   마음은   자기뿐만 아니라     남들까지도   밝게 해 준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유태인들은 얼핏 보기에 슬픈 눈을 갖고 있는 듯하지만, 그러나 가만히 바라보면, 눈이 한없이 밝습니다. 이들은 진정한 슬픔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밝음이 또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며, 어두운 밤을 알기 때문에, 그만큼 밝은 태양의 감사함을 기쁜 마음으로  즐길  수가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비관의 길은 좁지만 낙관의 길은 넓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낙관은 모든 것을 포용해 받아들이지만, 비관은 모든 것을 물리쳐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당한 형편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그 형편에 응전하는 사람의 태도를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마음의 여유입니다. 그러면 이런 마음의 여유는,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입니까? 바로 마음의 기쁨에서 생겨납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빌립보 2:12-18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을 만났으나,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주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생활이 가능한가? 하는 점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기쁜 생활을 감당하려면 어떻게 해야만 하겠습니까?   
(1) 성경은 기쁨과 인체와의 관계에 대하여 이미 말씀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쁨과 인체와의 상관관계를, 현대 의학은 자신들이 찾아낸 것처럼 떠들고 있지만, 성경은 이미 오래 전에 이에 대한 진리를 말씀합니다.

성경을 보세요, 지혜자는 잠언 15:13에서 말하기를, ‘즐거운 마음은 얼굴을 밝게 하지만, 근심하는 마음은 심령을 상하게 한다.’라고 했고, 잠언 17:22에서는 말하기를, ‘즐거운 마음은 병을 낫게 하지만, 근심하는 마음은 뼈를 마르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을 재건한 지도자 느헤미야는, 느 8:10에서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우리 주의 거룩한 날이오. 주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이니, 슬퍼하지들 마시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 앞에서, 주님을 인하여 즐거움을 가지고, 기뻐하는 사람은, 기쁨이 있는 생활, 건강한 생활을 감당할 뿐만 아니라 힘이 있어서 능력 있는 생활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더 나아가 사람이 주 안에서 기쁨으로 살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했겠습니까? 그것은 주님 안에서 기쁘게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살전 5:6-8에서 데살로니가교인에게 말씀하기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항상 기뻐하는 생활을 감당하려면, 먼저 자기생각을 버려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처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는 판단을 받은 사람, 다시 말해서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항상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의 욕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정욕을 따른 욕심이니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야하여 시비하고 원망하고 불만을하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자기중심의 생각이나 욕심을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원하는 것이 주님의 뜻과 같으니 언제나 형통하는 은혜를 만납니다. 그러니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께서도 마 16:25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언제든지 잃은 것을 찾은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런 영적이고 육적인 즐거움과 기쁨이 여러분에게 항상 충만할 수 있도록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그리스도 에수의 뜻과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겸손히 따르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를 온전하게 극복하고, 자기중심의 생각을 온전히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성령님의 인도하심 아래 있어야만 진정으로 기쁨을 가진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을 항상 분명하게 깨닫고 믿어야만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형제 레오가 진눈깨비를 맞으며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을 본, 성 프란시스가 형제 레오에게 말하기를, ‘레오, 우리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한다고 해도, 성경을 통째로 외우고, 신학자들의 학설을 모두 통달했다고 해도, 그 안에 진정한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별들의 길을 모두 알고, 온갖 생물의 특성을 전부 안다고 해도, 그것이 절대로 온전한 기쁨의 근원이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약 3킬로미터 가량을 걸어가면서, 프란시스의 말을 듣고 있던 형제 레오가 마침내 가던 걸음을 멈추고 프랜시스에게 묻기를, ‘그렇다면 온전한 기쁨의 근원은 무엇입니까?’라고 합니다. 그러자 프랜시스는 주저 않고 레오에게 대답하기를, ‘추위와 배고품에 떨며,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렸을 때, 집주인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해도, 우리를 도둑이나 부랑아 취급하며 모욕할 때도, 사람들을 불러다가 호되게 때린다고 해도, 우리가 이런 일들까지 인내와 친절과 사랑으로, 모두 참는다면, 그제야 우리는 온전한 기쁨 언저리에 도달한 셈입니다. 자신을 정복하는 데 온전한 기쁨이 있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주님 앞에서 온전하게 나를 포기하고, 오직 모든 것을 나사렛 예수에게 맡기고, 항상 성령님의 은혜로운 인도함만을, 따라서 사는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얻은 기쁨을 가지고 살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모든 인생은 본래 기쁨게 살도록, 지어진 존재임을 확신하기 바랍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의과대학 연구팀은, 어린아이와 어른의 웃음에 대해서 연구하다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하루에 4백~5백 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년이 되면, 이 웃음은 하루 15번~20번으로 감소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기쁨과 웃음 속에 태어나서, 점점 기쁨과 웃음을 잃어버리며 살다가 삶을 끝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언자 이사야는 사 43:21에서 말하기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기쁨을 가지고,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함에 감격하며,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복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지어진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언제나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엡 1:5-6에서 에베소교인에게 말하기를,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니라.’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존재 목적과, 삶의 감격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인간을 구원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감사와 그리스도인의 구원받은 삶에 대한 감격을 노래하고, 언제나 자비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섭리를 통해 봐도, 또한 인간이 태어날 때의 신체적 구조를 보아도, 인간은 기쁨으로 살도록 지어진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언제나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해 아래 사는 인생이 기쁨을 잃은 원인은 무엇입니까?
어렸을 때는 그렇게 기쁨 속에서 잘 웃던 사람이 삶을 살아가며, 기쁨을 상실한 채, 웃음을 잃어 가는 이유는, 삶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오는 불안과 염려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고민하고 염려하는 일이 얼마나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그의 글 ‘쓸데없는 걱정’이란 글에서, 한 연구 기관의 조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이 하는 걱정 중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닌 작은 것에 대한 걱정이 22%,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4%, 우리가 해결해야 할 진짜 사건에 대한 걱정이 4%’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노만 빈센트 빌 박사의 말은, 지금도 많은 사람이 96%의 쓸데없는 걱정에 매여, 기쁨도 웃음도 마음의 평화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의 통계를 보면, 사람이 기쁨을 상실한 삶을 사는 원인이,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예를 들어 보면, 강남의 한 부유한 집의 자녀가, 그 많은 돈으로 마음의 공허를 해결할 수 없어서, 술과 쾌락에 탐닉했습니다. 잠시는 좋았는데 나중엔 술로 인한 환영과 공포증에 시달리다, 정신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 안전한 병원 시설 안에서도, ‘누군가 자기를 죽이려한다고 무섭다며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군에서 장성으로 예편을 했는데, 예편한 이유가 신경쇠약으로 인한 업무능력 부적합이었다고 합니다. 이 분의 말을 빌리면, 장군이 되기 위해서 참으로 최선을 다했고, 그 자리에 오르니, 잠시는 기쁘고 즐거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내 기쁨은 사라지고, 누군가 이 자리를 넘보지 않을까? 하는, 불안 속에서 전전긍긍하다가, 그 자리를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마음의 불안을 이기지 못해서 신경쇠약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의 주위에는 진심으로 믿을만한 존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쁨으로 산다는 것은, 환경이나 여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을 지키는데 있다는 점을 이 시간 분명하게 깨닫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자기의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중심의 생각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뜻,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의지하고, 따라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결국은 썩어져 없어질 허망한 것을 의지하거나 사모하다가 불안해하지 말고, 언제나 여러분 곁에 계셔서, 저와 여러분을 지켜주시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사랑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따라가므로, 무시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는, 담대함 삶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쁨으로 사는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에게서만 나오는 복음의 은혜를 덧입어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을 향하여 ‘기뻐하라’고, 강한 명령조로 말씀하고, 더 나아가서 ‘내 기쁨에 참여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내 기쁨’이란 어떤 기쁨입니까? 
바울 사도는 당시 로마의 감옥에 있으면서, 빌립보 교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말하는 ‘내 기쁨’이란 것은, 지금 당신이 당한 환경이나 상황을 초월하는 기쁨입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자신의 목숨을, 성도를 위해서 관제물로 주어도, 자신은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자신의 처지나 소유나 신분, 나아가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기쁨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도 때로는 상황이나 여건, 또한 자신의 처지 때문에, 삶의 기쁨을 빼앗기고, 삶의 행복을 제한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처럼 이런 기쁨의 능력만 있다면, 저와 여러분도 바울처럼 모든 것을 초월하여, 기쁨과 감격 속에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나오는, 성령의 은사 안에서 나오는, 다시 말해서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런 기쁨의 능력만 있다면, 여러분은 모든 상황과 염려를 초월하여, 성경이 말씀하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기쁨으로, 언제나 삶의 감격을 노래할 수 있는, 삶을 실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지닌 이러한 기쁨의 능력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4:6-7에서 빌립보 교인에게 말하기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염려를 뛰어넘어서,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평강으로 마음을 지키고, 삶의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능력,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앞에 나와, 그 은혜를 힘입는, 복음 안에 있습니다. 마음의 기쁨을 가지고, 삶의 감격을 노래하며 사는 일은,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음을, 이미 성경이 결론을 내렸고, 인간의 삶의 경험이 증명해 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에게 겸손히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구원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믿고, 날마다 겸손히 기도하면서, 정결한 심령으로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서, 복음의 은혜를 덧입은 사람은, 바울처럼 모든 여건을 초월해서, 기쁨으로 사는 능력을 누리게 됩니다.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베드로가 그렇게 살았으며, 프랜시스가 그렇게 살았으며, 맨발의 성자 이현필이 그렇게 살았고, 지금부터 백년전에 사촌리에서 마포중앙교회를 시작한 양미리암 할머니와 우리 교회의 믿음의 선진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식과 의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겸손하고 정직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에 아멘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모든 생각과 지식과 판단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오직 주님의 뜻에만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믿음은 어떠했는지 자신의 신령상 형편을 겸손하고 정직하게 살펴보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점이 있으면 지금 이 시간, 진지하게 잘못된 것을 주 앞에 고백하고 회개하기 바랍니다.      

어떤 형편에도 굴하지 않고, 무시로 마음에 기쁨을 가지고, 모든 상황을 초월해, 삶의 감격을 노래하며 사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신 가장 크고 거룩한 은혜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날마다 여러분이 그동안 소중하게 여겼던 세상적인 지식과 경험과 고정관념을 모두 바울처럼 배설물을 버리듯이 버리고, 전적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만을 의지하고, 예수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을 감당하고자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요동하지 않는  기쁨으로 믿음생활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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