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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떤 이야기 (사 63: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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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 (사 63:7-14)       

저는 어린 시절에 이야기를 무척 좋아해서 아버님께 이야기를 해 달라고 자주 조르곤 했습니다. 그러면 아버님께서는 성경 이야기나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 주시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님께서는 <이야기를 너무 좋아하면 궁해진다>는 말씀도 종종 하셨습니다. 아마 이 말씀은 이야기에 지나치게 심취하여 공부도 일도 하지 않게 될 것을 염려했던 옛 어른들이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보면 이야기에도 중독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매우 귀합니다. 이야기는 정서가 메마른 사람들을 풍성한 상상력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동화책을 많이 읽은 어린이들이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자랍니다. 심지어 설교학에서도 <이야기식 설교>를 장려하고 있습니다.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재미있으면서도 잘 기억되고, 잘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통한 아름다운 일들이 이루어지려면 몇 가지 구성요소가 필요합니다. 

우선 <이야기를 하는 사람, 화자>가 있어야 합니다. 유달리 이야기를 잘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확한 논리와 유머 감각과 적절한 언어 능력이 종합되어 정말 이야기를 잘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둘째로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 청중>이 있어야 합니다.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 Michael Andreas Helmut Ende>가 1970년에 발표한 『모모』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폐허가 된 원형극장에 누더기를 걸치고 눈이 아주 크고 곱슬머리를 한 <모모>란 이름의 십여 세 된 소녀가 살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원형극장 한 구석에 방을 만들어주고 옷과 빵 등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사람들이 모모를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도움을 얻는 것은 마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상하게 모모만 만나면 마음이 유쾌해지고, 막혔던 가슴이 뚫렸습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모모에게 가 보게>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모모에게는 어떤 힘이 있었을까요? 모모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루 종일이라도 잘 들어줍니다. 사람들은 모모에게 이야기를 하다가 무릎을 탁 치면서 <옳거니, 그렇게 하면 되겠군!> 하면서 돌아갑니다. <잘 듣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듣는 귀가 열리길 원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라면 금방 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면 진지하게 듣고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평생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이야기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가리켜 <인생 드라마>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 드라마의 주인공입니다. 그 속에서 기뻐하는 사람도, 우는 사람도 우리 자신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 모두는 밤을 새워 말해도 다 할 수 없는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은 이야기에 익숙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말씀이 이야기입니다. 성경 이야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아담과 하와,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와 함께 등장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시간 여행을 합니다. 다윗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약 3천여 년 전으로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2천여 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그 때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그들과 함께 괴로워하면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로만 남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3천 년 전, 2천 년 전에서 현재로 돌아오는 순간 <우리의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말씀을 읽으면서 이 질문에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이처럼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 때 거기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오곤 하기 때문에 성경 이야기는 매우 신비롭고 풍성합니다. 

또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멋진 이유는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주제가 멋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도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7절에서 <내가>라고 기록된 화자는 선지자 이사야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펼쳐놓는 이야기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7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아멘.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내가 ....말하며>라고 했지요? 원문에서 이것은 <아즈키르>인데, 이 단어에는 <기억한다>는 뜻을 가진 <자카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하려는 이야기는 상상으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사야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체험한 것을 기억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자기 이야기라면 그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자비, 여호와께 올릴 찬송,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신 은총에 대해 말하고자 했습니다. 왜 그는 자기 이야기보다 하나님 이야기를 하려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사야의 인생 드라마에는 이사야만 등장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엔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엑스트라로 등장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사야의 인생 드라마에서 중심 역할을 맡으시고, 드라마에 결정적 반전을 가져오는 역할을 맡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엑스트라 정도로 등장하신다면 굳이 하나님을 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삶에 있어서나,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분으로 등장하시기 때문에, 실질적 주인공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들의 이야기의 페이지 페이지마다 하나님 이야기가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야기를 배제한 우리들만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가 말씀하고 있는 이야기에는 이야기를 감칠 맛 나게 만드는 요소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 요소들을 순서대로 말씀드린다면 <사랑, 배신과 미움, 불신과 원망, 그리고 또 다시 사랑과 축복>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이 순서대로 따라 내려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그 첫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8-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나의 백성>이라 부르셨고,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이라 부르는 것은 쉽게 이해됩니다. 그러나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고 하시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숱하게 거짓된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실과는 다르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듬어보게 됩니다. <빅토르 위고>의 대작인 『레미제라블』에 보면 19년 만에 감옥에서 나온 <장발장>이 미리엘 신부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는데, 그는 은혜를 원수로 갚아 은촛대를 훔쳐 도망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붙잡혀 신부의 집에 끌려옵니다. 

경찰관이 묻습니다. <이 은촛대가 신부님 소유가 맞지요? 훔친 게 틀림없지요?> 장발장은 최대의 위기에 처합니다. 신부가 고개를 끄떡이기만 하면 그는 평생을 옥에서 끝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 때 미리엘 신부는 뜻밖의 말을 합니다. 

<아닙니다. 내가 그에게 준 것입니다. 아니, 이보게, 왜 촛대만 가져갔나? 내가 저기 저 은그릇도 가져가라고 주지 않았나? 미안해 할 것 없네. 저것도 가져가게!>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때 신부의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분명히 장발장이 훔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신부를 탓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사실보다 진실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이란 가슴속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부는 그를 불쌍히 여겼고, 무엇이라도 주고 싶었습니다. 정말 그가 다시는 험한 인생을 살지 않고 행복하게 살길 원했습니다. 이것이 신부의 진실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을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고 하시는 것은 사실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저질러 온 사실보다 당신의 마음에 있는 사랑의 진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귀합니다. 사형장에 끌려나온 사형수라 할지라도 어머니의 눈에는 천진난만한 자식일 뿐입니다. 그 어머니는 극악무도한 죄수인 아들을 끌어안고 <내 착한 아들>이라고 통곡을 합니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것도 제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로만 따지면 설교자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사용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진실을 믿고 이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7절에 <사랑을 따라>라는 구절이 나오지요? 원문의 히브리어 단어에는 <라함>이란 단어가 포함되어 있는데, 라함이란 <여인의 자궁>을 말합니다. 즉 <사랑을 따라>라고 할 때, 그 사랑은 자식을 열 달 동안 자궁에 잉태해서 낳은 어머니가 자식에 대해 가지는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허물까지 덮으십니다. 

일찍이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을 보면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라는 부분입니다. <여긴다>라는 말의 헬라어 <헤게오마이>는 <생각한다, 상상한다, ---라고 간주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충성 되이 여겨>라는 표현은 사실은 충성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마음에서는 충성된 것으로 간주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께 충성되기는커녕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 나오는 대로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실보다는 진실을 말씀하셔서 그를 충성 되이 여겨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엄청난 사랑을 어떻게 드러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노예로 사는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9절에 있는 것처럼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구경만 하신 게 아니라, 함께 하시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이야기의 첫 대목,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사야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두 번 째 부분은 <배신과 미움>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언제나 사랑의 이야기엔 갈등과 아픔이 따릅니다. 사랑을 주제로 한 드라마치고 눈물과 갈등 없는 드라마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배신자처럼 행동했습니다. 온갖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고, 악을 자행하였습니다. 배신은 미움을 가져옵니다. 언젠가 택시 안에서 라디오 방송을 듣는데, 신청곡이 흘러나왔습니다. 

조용필의 <미워, 미워, 미워>가 나오더니, 그 뒤를 이은 것은 심수봉의 <미워요>였습니다. 그 미움들은 모두 사랑의 배신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움은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사랑의 채찍으로 때리셨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숱한 적들의 침략을 받게 되고, 큰 고통의 나락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후에는 완전히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다음으로 넘어가 <불신과 원망>이란 대목에 이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딱한 처지가 스스로 자초한 것임을 망각하고, 하나님만 원망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된 데는 하나님의 책임이 크다. 왜 자신들을 사랑하지 않는가, 왜 과거처럼 건져주지 않는가?>라고 원망합니다. 

11-1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 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의 영광의 팔이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며 그의 이름을 영원하게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을 갈라지게 하시고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광야에 있는 말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습니다. 옛적에는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시고, 도우셨는데, 왜 지금은 우리를 더 이상 사랑하지도, 건져주지도 않느냐고 원망합니다. 이런 백성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모습으로 바라보십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은 <이 모든 것이 네 죄 때문이 아니냐? 채찍을 맞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야기는 <사랑과 축복>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14절을 보실까요? <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아멘!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또 한 번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을 아주 버리지 않으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때가 되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배신하고 원망하던 그들을 다시 사랑하십니다.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십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판 <미워도 다시 한 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 고통에 떨어진 백성들을 다시 구원하셨습니다. 적의 손에서 건지기도 하셨고, 나중에는 바벨론에서 구원하여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체험하여 고백적으로 전하고 있는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약 2천 7백여 년 전의 이 이야기를 들은 우리는 현재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사야를 통해 증언된 이야기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죄 가운데서 사탄의 자녀로 살던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마치 거짓을 말할 줄 모르는 자녀인 것처럼 여겨주셨습니다.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고 배신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어디 계시냐?>고 따지듯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다시 사랑하십니다.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품안에 깊이 안기라고 하십니다. 

교우님들 중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처음 경험하여 기뻐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좋은 분인 줄 몰랐어요.>라고 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불행하게도 그 사랑을 배신하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대로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삽니다. 부모 앞에서 자녀들끼리 다투면 부모의 마음이 아플 게 뻔한 것처럼, 우리들 사이에 사랑이 없어 서로 다투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형제자매들과, 교인들 사이에서 갈등하고 미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채찍을 맞아 깊은 고통에 빠진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앗수르의 침략을 받듯이, 아니면 바벨론에 포로가 된 사람들처럼 힘든 상황을 지나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사랑을 의심하여 원망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드라마에서 이루실 사랑의 결론을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드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만드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십시오. 그러면 아름답고 달콤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날마다 기쁨이 찰랑거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한다면 우리의 남은 인생의 이야기를 아픔과 괴로움으로 점철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남들에게 고백하기 힘든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이해인 수녀께서는 현재 암 투병 중입니다. 그 분이 암 투병을 하면서 펴낸 『희망은 깨어있네』란 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 보면 <나의 방>이란 짧은 시가 있습니다. 

비어있어 아무도 없지만 가득 차서 모두가 있다 
생각하고 꿈을 꾸고 잠을 자고 
글을 쓰고 그림 그리고 바느질 하며 
모두가 기도가 되는 나의 방은 조그만 천국이다 
여기서 내가 보낸 조그만 일생은 행복했다고 
살아서도 죽어서도 조용히 외치고 싶네 

여러분, 주님의 다가오심을 마음의 귀로 들으면서, 그 분의 말씀을 청량음료처럼 마시면서, 그 분께 속삭여 보십시오. <주님, 사랑합니다. 지금 저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지금도 저를 붙드심에 감사합니다. 제게 주시는 그 사랑이 제 가슴에 남아 이야기가 되고 고백이 되고 찬송이 되어 올려지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제게 다가오시듯 저도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주위의 사람들을 부드러운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맡은 일을 천천히 그러나 성실하게 감당하십시오. 그리고 그 삶에서 경험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라> 찬송하십시오. 교우들이 남은 삶을 통해 아름다운 인생드라마를 주님과 함께 만들어 가시길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끝이 없는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믿음의 순례길을 끝까지 완주하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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