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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사람 이야기 (왕하 5: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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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이야기 (왕하 5:14-27)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15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16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 17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18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19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평안히 가라 하니라 그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가니라 20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21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22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23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24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25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26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27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왕하5;14~27)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엘리사와 게하시입니다. 
이 두 사람은 너무나 대조적인 면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나병에서 고침 받은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찾아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진정으로 감사하며, 매우 정중하게 예물을 드립니다. 그때 엘리사는 나아만의 예물을 거절합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 게하시는 돌아가는 나아만을 좇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거짓말을 하면서 예물을 받습니다. "엘리사 선생님이 마침 신학생 두 사람이 왔는데, 줄 것이 없어니,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만 달라고 하더이다"  나아만은 그에게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었습니다. 게하시는 그것을 자기 집에 감추어 두고는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엘리사에게 나아갔습니다.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묻습니다.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게하시는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거짓말을 합니다.  엘리사는 게하시를 책망하고는 게하시는 나아만의 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주는 이 사건의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성도여러분, 나아만에게서 물질을 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저는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왜 예물이자 치료비이자 선물을 거절할까요?  더구나 그냥 거절이 아닙니다.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는 거절입니다. 받을 수 없다는 엘리사의 강한 의지요, 또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에는 받을 수 있습니다. 뇌물이 아니요, 부정한 돈이 아니며, 정말 감사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헌금입니다.  나병을 고친 사람이 얼마나 감동했겠습니까!  안 받는 것이 오히려 나아만에게 부담입니다.   더구나 물질이 필요한 선지학교 아닙니까? 

하지만 엘리사는 거절합니다. 나아만에게 부담을 지우려고 하는 행동입니다. 거룩한 부담입니다. 계속 성경을 읽어보면 그 결과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나아만은 이제까지 자기의 나병을 고치기 위해 천하에 있는 온갖 神들을 다 만났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떤 신(神)도 나병을 고치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얼마나 다급했는지 집에 있는 작은 계집종의 말 한마디에 적대국인 이스라엘 까지 찾아온 상황입니다. 

여기서도 못 고치면? -아마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고칠 수 있다는 신앙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닙니다.-  작은 계집아이 하나의 말에 휘둘린 한 나라의 군대장관이 됩니다.  국가적인 창피와 모욕도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쳐졌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그는 놀랐고 놀랐습니다. 이제 나아만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15)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여호와를 인정하는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야 말로 참 신(神)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예물을 받지 않은 후에 그는 다른 말을 합니다.

(17절)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 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에서 하나님을 예배(禮拜)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한 영혼이 온전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이것이 엘리사가 예물을 거절한 결과입니다.  이런 엘리사를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관심은 나아만의 영혼의 구원에 있습니다.   

만약 엘리사가 예물을 받았으면... 나아만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기한 하나님, 대단한 하나님 정도로 생각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 덕분에 지식적인 신앙이 영접하는 신앙, 구원받는 신앙으로 바뀐 것입니다. 엘리사의 이런 모습을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물질이 아니라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최우선으로 여깁니다.  나병을 고쳐도 돈으로 감사를 표현하려고 합니다. 이때,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그 돈을 받을 수도 있고 안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받는 것이 그 영혼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만나는 것을 방해하는 경우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배웁니다.  엘리사처럼 영혼을 우선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그리고 본문에서 또 한사람, 게하시가 자기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20절)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합니다.   

성도여러분, 나아만에게서 물질을 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게하시의 맹세는 물질에 대한 탐욕(貪慾)입니다. 그는 물질을 위해서 나아만을 속이고, 스승인 엘리사도 속입니다.  속여서 받은 물질을 집에 숨겨놓습니다. 이것이 탐욕입니다. 이 탐욕의 결과가 끔찍합니다.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그가 속인 나아만의 문둥병이 그와 그의  자손에게로 들어옵니다. 
 
성도여러분, 게하시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듣고  섬기는 사람이며, 가장 가까이서 하나님을 배우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가 고치지도 않은 나병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하여 고쳤습니다. 그 댓가를 받으려면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하고,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해서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옆에서 구경만 한 게하시가 나병을 고친 댓가를 받으려고 물질을 탐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며, 자기의 탐욕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합리화할 일이 아닙니다. 지금 게하시는 물질에 눈이 멀어있습니다. 되풀이 되는 거짓말에도 아무런 양심의 부담이 없습니다.  엘리사는 탐심과 거짓으로 가득 찬 게하시를 불꽃같은 눈으로 응시하면서 꾸중합니다.  
 
그런데 그 꾸중의 내용이 우리 생각과 다릅니다.  ‘야 이 나쁜 놈아 선지 생도가 청빈해야지, 배고파도 참아야지, 땀 흘린 음식만이 진정한 내 것이지, 감히 탐심에 빠지냐?’ 하지 않지요. 또한 ‘나에게 까지 거짓말을 하다니 넌 틀렸어’ 이렇게 꾸지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라고 꾸지람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때”를 보는 눈에 대해서, 게하시가 ‘시대’를 보는 눈이 없는 것이 죄라고, 영적인 눈이 어두운 것이 본질적인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탐욕에 사로잡힌 게하시에게 꾸지람, 비난, 비교를 하지 않습니다. 단지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게하시의 죄라는 것입니다.  

참 두려운 말씀입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왜냐면, 지금 저도 시대의 흐름을 짐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시대의 흐름을 알고 계십니까?  

그래서 고민을 했습니다. 엘리사가 말한 때는 무슨 때인가? 
지금 이스라엘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답은 쉽게 나왔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당시의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주 타락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사람들을 탐욕으로 몰아갔습니다.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탐욕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거짓과 죄악이 만연하였고,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골 3:5의 말씀처럼 탐심과 우상숭배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에 대하여 진노하셨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바로 다음 장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왕하6;8) “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왕하6;24) “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의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나라는 침략을 거듭 받는 바람 앞의 등불이며, 수도인 사마리아도 포위를 당합니다. 그런 위기의 시대인데도 임금과  신하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불신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기도하거나 회개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부패와 타락이 가득합니다.   성도여러분, 이런 시대에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선지자로 세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엘리사가 선지학교를 세워 선지 생도들을 양성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태5장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십니다. 이 어렵고 부패하고 나라가 곧 망할 것 같은 위기의 때를 소금처럼, 빛처럼 구원하는 사람이 되라고 세우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게하시는 자기가 바로 그 부패한 마음의 주인공입니다. 자기를 선지 생도로 세운 하나님의 뜻을 다 잊어버리고, 자기의 조국 이스라엘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까지 사용해서, 거짓말을 하면서 단지 물질만을 욕심을 냅니다. 

성도 여러분, 게하시의 죄는 물질에 대한 탐욕이 아니라, 나아만과 엘리사에게 한 거짓말이 아니라, 시대를 모르는 눈이었습니다.  게하시는 선지생도입니다. 하나님의 종입니다.  선지 생도로서의 시대를 모르는 게하시, 자기의 사명을 모르는 게하시는 탐심만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탐심을 채우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선지생도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물질에 대한 탐욕을 채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메시지는 어떻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이 됩니까?  이스라엘나라는 어떻게 됩니까!!    

사실 게하시는 선지생도 중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입니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깊은 기도, 엘리사의 영감 있는 말씀, 엘리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큰 기사와 이적들을 가까이서 직접 봅니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는 때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양심이 파괴된 사람이었고,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한 선지생도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겉으로 경건해 보이는 사람이 실제로는 욕심쟁이요, 거짓말쟁이일 수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혹시 게하시처럼 살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눅17;27-30)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노아 홍수 심판 때에도 그랬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사람들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를 몰랐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까많게 모릅니다.  롯의 때도 그랬습니다.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도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최후의 심판이 언제일까요?  30절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순간에도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을 먼저 찾는 사람, 말씀을 지키는 그런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 시대였습니다.
 
엘리사가 예물을 거절한 결과는 첫째는 나아만을 위하여, 둘째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였습니다.  이것이 엘리사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엘리사가 나아만의 예물을 받지 아니하였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을 때냐?" 

빌립보서 2장을 보면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서 사람들과 같이 되신’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빛나는 그 보좌에서 자신을 비워... 죄인들이 사는 이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탐욕과 거짓과는 너무나 상반된 모습입니다. 더 가지려는 욕심이 아니라 오히려 가진 것을 모두 내어주시려고 다 비우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선지자 엘리사의 사환이었던 게하시는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는  말씀과 반대로 행동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다는 지식과는 상관없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주시는데... 그 말씀을 단지 듣기만 하고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말씀을 잊고 세상의 것들에 눈을 돌리고 하루를 살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놓지 않기 위하여 오히려 세상 것들에 눈을 감고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구(求)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즐거워하십니다. 우리가 등 따뜻하고 배부르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기까지 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우리가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사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소금처럼, 빛처럼 사는 것이 진짜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대를 분별하는 눈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얼마 전 서울대 교수 한 분이 우리나라 이만 칠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정직한 국민이 어느 나라 국민인가?"하는 질문에 73%가 "일본사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 정직한 사람이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가?"하는 질문에 73%가 "우리나라는 정직해서는 살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자의 80%가 청소년들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정직하게 살면 바보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이 믿음을 어떻게 바꾸어 줄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예수 믿는 성도님들이 ‘아니야. 정직하게 사는 것이 옳은 일이야. 정직하게 살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 나를 봐. 우리를 봐.’ 이렇게 될 수는 없을까요? 
 
물론 오늘 본문의 게하시가 보여준 교훈도 있습니다. 
 
(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해서라도 나의 탐욕을 채울 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믿는 사람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물질만이 최고라고 행동할 때... 나의 탐욕은 나 혼자 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나병이 걸리고, 내 자손들에게 까지 나병이 유전병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나병을 유전병으로 자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겠습니까?  게하시가 탐욕을 부린 것이 아마 자기의 자녀들을 위한 목적일 수도 있습니다. 나아만같은 큰 부자가 주는 헌금을 언제 또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녀들을 위해서 탐욕을 부렸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탐욕의 결과는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내 자손들에게 까지 나병을 유전병으로 물려주게 되었습니다.  
 
(고후 9: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심어야 할 씨가 있고,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심어야 할 씨조차 먹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는 씨와 같은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이 원칙을 더 잘 지켜야 합니다. 부모가 먹을 것을 먹고, 심을 것도 먹는다면 자녀는 미래가 없습니다. 부모가 사명을 다 잊어버리고 탐욕을 심는다면 게하시처럼 나병을 유전으로 물려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럴까요? 혹시 우리 대한민국도 지금 탐심과 거짓으로 무너져가고 있지는 않을까요?  성도들은 우리나라의 앞날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그 자체가 세상을 향한 메시지여야 합니다.  정직하게 살려니까 가난하게 된다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서 부하게 살면 되지, 정직하려다가 출세를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과 명예를 누리면 되지, 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이런 자세로 살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일어섭니다.

하나님 앞에 서있는 두 사람 엘리사와 게하시 중에서 우리는 엘리사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엘리사의 말씀 "이때가 어찌 은을 받을 때냐?" 는 말씀이 우리에게 시대를 보는 눈을 깨우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때’와 ‘시대’를 깨닫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한국사회, 정직하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이 80%인 한국사회를 볼 수 있는 엘리사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게하시처럼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시대를 보는 눈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다 그렇게 되시기를 바라면서...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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