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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 교회, 소망, 그리고 감사! (레 23: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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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교회, 소망, 그리고 감사! (레 23:39-44)


모든 인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어떤 육적인 부요함도 결국에는 허무함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육적으로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 잃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사실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사람들을 통해서 깨닫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단군 이래로 가장 잘 먹고, 가장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지금 우리의 시대는 가장 영적으로 기갈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생들에게 해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죽은 자들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십니다.  그래서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 길이 열리게 됩니다.  온 인류가 매달려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도 예수님께서 한 번만 도와주시면 그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하나님께서 모든 영혼들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를 누리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되셔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간증의 주인공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닫혀졌던 축복의 문들이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어느 누구든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의 물결에서 벗어나게 되면 결코 행복한 인생을 열어갈 수가 없습니다.

오래 전에 영국에 살던 어떤 여자 성도에 의해 쓰여졌던 편지 한 부분을 읽고자 합니다.
"우리는 출발부터 도착까지 상상외의 노도광풍과 침몰의 위기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처음 항해의 출발이 결격사유로 인해서 지연된 탓에 항해 중 비축했던 양식의 거의 전부를 소모했습니다.  우리가 항해를 시작했을 때는 여름이 아닌 9월이었으며 따라서 초가을의 성난 파도와 싸워야만 했습니다.  모두 102명이 출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기대하지 않았던 살인적인 괴혈병에 시달려야 했고, 또 여러 사람들이 이미 벌써 죽어 바다에 장사를 지내야만 하는 그런 사고가 뒤따랐습니다."

이 편지는 아메리카 신대륙의 꿈을 안고 '메이 플라워' 배에 탑승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엘리자베스 합킨스라는 한 자매가 영국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의 한 부분입니다.

1620년 12월 21일 영국을 떠난 청교도들은 미국 프리머스 항구에 도착합니다.  미국 땅에 왔던 청교도들은 도시 출신의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노동이나 농사를 몰랐습니다.  그것도 추운 겨울에 도착했기 때문에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배고픔과 전염병과 싸우면서 도착한 사람들의 약 절반 가량이 그 해 겨울에 죽어 갔습니다.

그런데 봄에 뜻밖에 한 사람의 인디언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농사 짓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지도를 따라 열심히 농사를 지었던 이 청교도들은 그 해 가을 의외의 풍성한 곡식을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그들은 인디언 추장 매스소이트라는 사람과 90명의 인디언 식구들을 전부다 초청해서 함께 어울려 한바탕의 떠들썩한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감사의 잔치를 가졌습니다.  이것이 지구상에서 첫 번째 감사의 예배요, 감사의 잔치였습니다.

1863년 미국의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이런 청교도 정신, 특별히 이런 감사의 정신을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서 매년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소위 Thanksgiving Day, 추수감사절로 지킬 것을 국가적으로 선포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시 청교도인들의 추수감사절은 최악의 상황에서 드린 최선의 감사였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이런 정신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절망적인 순간에도 감사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도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노도광풍으로 하늘을 가리웠던 위급한 순간에도 마음의 하늘을 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불평과 원망이 우리의 인생에 도움을 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불평이 없어야 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불행한 사람은 물질이나 권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의 습관을 체질화해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특정한 환경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마음의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입니다.  사실 우리는 마음의 습관의 피해자들이기도 하고, 마음의 습관의 축복자들이기도 합니다.  복을 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사랑하십시오.  자기 마음을 자꾸 학대하지 말고 마음을 늘 아름답게 지키고 사랑하고 가꾸어 나가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 내 마음에 감사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는 것은 영국 청교도들이 미국에 도착한 그 전통에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추수감사주일과 가장 유사한 절기를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막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초막절이 되면 광야에 나가서 빈들에다가 초막을 짓습니다.  요즈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집 옆에다가 붙여서 초막 하나를 만듭니다.  네 개의 프레임에다가 캔버스나 혹은 판넬 같은 것으로 사방을 만들어서 벽을 만든 다음에 그 위에다가 감람나무나 종려나무 혹은 버들가지들을 얹어서 지붕을 만드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호텔 같은 데도 식당 옆에다가 만들어 놓고 그 식당에 들어가서 먹는 사람도 있지만, 식당 옆의 간이 초막 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식사를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그리고 성경도 읽고 예배를 드립니다.  특별히 시편을 읽기도 합니다.  이런 초막을 가리켜서 히브리 사람들은 '수코트'라고 부릅니다.  초막절 기간이 되면 자기 초막에서만이 아니라 남의 초막에도 돌아가며 방문하면서 서로 어울려 파티를 열고 한 주간 동안 내내 즐거워하는 아주 기쁨의 절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요컨대 이 초막절은 지나간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의 생활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 낮에는 구름 기둥이 인도를 했습니다.  열사의 사막에서 태양을 견딘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구름 기둥이 일종의 천막 역할을 해 줍니다.  피난처가 되고 보호막이 되고 또한 그 구름 기둥이 가면서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이 가야할 목표와 방향을 알려 주어서 그들은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의 인도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배가 고팠을 때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시고, 마실 것이 없었을 때 반석을 깨어서 거기서 샘물을 솟게 하신 하나님의 공급의 은혜를 그들은 기억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초막절에 맞춰서 이제 추수가 다 끝납니다.  그러니까 초막절은 농사를 짓고 수확을 거두게 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그것 말고 이 초막절은 특별히 세 가지의 감사의 초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가정에 대한 감사요, 둘째는 믿음의 공동체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영원한 소망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음 주일에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추수감사절을 한 주간 앞에 두고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 세 가지에 대한 감사를 다시 한 번 새롭게 고백하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째는, 가정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 초막은 가족들이 함께 모여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막은 가족에 의하여 혹은 가족들을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많은 고난과 시련이 있었지만 그들이 이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에너지가 가족 때문에 가능했다고 믿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자녀들, 가족 사이에서 나누어지는 그 사랑의 힘이 광야의 고난과 역경과 시련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리켜서 소위 핵가족화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편리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에서는 식구들이 많아지는 것이 부담스러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조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을 부담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부모님조차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자녀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 어떤 부모는 자녀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부담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확실히 많습니다.  가족을 이제는 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탈무드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족들은 새의 날개와 같다.  새는 날개를 부담으로 여기지 않는다.  새는 날개 때문에 오히려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비상할 수가 있다."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대부분의 결혼한 부부들은 아이를 빨리 낳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3년 후에, 4년 후에 어떤 사람들은 5년 후에 낳겠다고 말합니다.  이유를 물어보면 부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안정된 다음에 아이를 갖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탈무드의 이야기를 인용한다면 가족은 결코 부담이 아닙니다.  자녀 하나 생긴다고 해서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녀를 통해서 갖게 되는 기쁨과 보람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삶의 용기와 에너지,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제공하고, 또 살아야 할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녀이고 가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제로 나에게 있어서 가족이라는 존재, 이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커다란 힘이 됩니까?  물론 가족 때문에 어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자녀 때문에 속상하는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나 속상함보다는 훨씬 더 많은 축복, 훨씬 더 많은 사랑, 훨씬 더 많은 격려가 우리의 가정에서 나누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초막이라는 것은 가족들에게 사랑의 보금자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안식의 피난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초막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고백합니다.  온 가족이 축제를 벌이고, 그 안에서 함께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힘든 고통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약육강식이 존재하는 치열한 경쟁의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가족마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 얼마나 더 무력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나를 격려해 주고 나와 함께 하는 내 남편의 존재, 아내의 존재, 그리고 자녀들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나는 얼마나 더 낙심했었을까요?  가족은 내가 힘들 때 일어설 수 있는 버팀목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가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할 첫 번째 감사입니다.

두 번째는 신앙의 공동체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가정을 위한 초막을 만들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때로 다른 사람들의 초막을 방문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옛날에는 아주 광야에 나가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거할 수 있는 굉장히 큰 천막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요즈음은 회당과 같은 데를 방문해서 그곳에서 큰 천막을 만들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 그렇지 못한 형편의 회당에서는 종려나무 가지나 혹은 감람나무, 버들가지들을 취해서 회당 안에다가 여러 가지 장식을 해 놓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행진을 했던 것은 비단 내 가족만의 행진이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모여진, 더 큰 가족 공동체의 행진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 초막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초막, 우리가 함께 머물 수 있는 커다란 공동체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더불어 광야의 길을 행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가족이 나에게 위로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을 고백하고, 함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서 더불어 나눌 수 있었던 격려와 위로 때문에 그 험난한 광야의 길을 우리가 걸어갈 수가 있었다는 것을 모두가 함께 회고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약성서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바로 이 믿음의 공동체가 우리에게 있어서 교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 여러분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이 드넓은 태평양 한 가운데서 난파를 당해 황량한 무인도에서 혼자 살게 되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멀리 지나가는 배를 보게 되었고,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미친 듯이 손을 흔들며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결국, 그를 발견한 배가 섬을 향해 다가왔습니다.  배에서 내린 선장은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질문을 했습니다.
"저기 오두막이 왜 세 채나 됩니까?"
"저쪽에 있는 것은 저의 집이지요."
"그러면 그 옆에 있는 것은요?"
"그것은 제가 다니는 교회랍니다."
"예, 그렇군요.  그러면 그 옆에 있는 것은요?"
"아 예, 그것은 제가 전에 다녔던 교회이지요."

여러분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 사회를 향해서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심지어 어떤 안티 세력들은 이 땅에 교회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비판을 들으면서 상당히 부끄러움과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저들의 주장에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단 하나의 교회마저 완전히 사라져 버린 세상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의 교회가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부끄러운 점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줄 수 있었던 축복,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마다 드린 예배에서 얻을 수 있었던 영감과 삶에 대한 감동과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내 속에 회복된 기쁨과 평화와 안식의 체험들, 또 교회 생활을 하면서 얻어진 수많은 행복한 추억들, 그 추억과 감동의 순간 순간들, 성도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면서 함께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따뜻한 교제 속에 누릴 수 있었던 그런 안식의 의미.  그런데 그 교회가 하나도 없이 사라진다.  교회가 사라진 세상.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교회가 없이 내가 지금 인생을 산다.  상상이 되십니까?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늙은 나이에 기독교 신앙에로 귀의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유명한 고백을 남겼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하고 무시했었다.  그러나 내 조국이 어려워졌을 때 교회는 우리 유대 민족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소망이며 안식처였다.  내 나이 먹어 석양녘에 교회 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곳도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와 교회로 돌아온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교회는 어떤 존재입니까?  어쩌면 교회 생활을 하면서 이런 저런 상처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교회 공동체에서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는 가운데 누릴 수 있었던 은혜의 시간들, 그리고 무엇보다 구원받은 자녀로 믿음의 공동체에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회복의 기쁨을 누렸던 체험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믿음의 자산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저 영원한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방주입니다.

어떤 장로님은 자신이 다니던 교회 안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 모습들을 보면서 "교회가 이럴 줄 알았으면 예수를 안 믿었다"고 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의 영혼은 또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조선일보에 오랫동안 '광수생각'을 연재했던 박광수 씨가 쓴 '참 서툰 사람들'이라는 책에 보면, '사랑, 그 미친 짓'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좋은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나쁜 것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내가 먹고 싶은 것만 먹기가 힘들어집니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 가게도 가기 힘들고, 일요일에 좋아하는 야구를 하는 것도 눈치가 보입니다.  쉬는 날 늘어지게 낮잠 자기도 눈치가 보입니다.  오랜 친구들과 마주 앉아 밤늦게 소주 한 잔 기울이는 일도 힘들어집니다.  일도 손에 잘 안 잡히고, 생활 리듬도 깨지기 일쑤이지요.  어디 그것뿐입니까?  늘 조바심으로 마음을 애태우고 전에 없던 의심병도 생깁니다.  혼자 있을 때보다 지출도 많아지고, 훌쩍 떠나는 혼자만의 여행은 더더군다나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사랑이 끝날 땐 스스로 다짐합니다.  그 미친 짓을 또 해?  그런데 우리는 아무래도 진짜 미쳤나 봅니다.  그런 굳은 다짐을 잊은 채 또 사랑에 빠져드니 말입니다."

아마도 사랑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이 미친 짓이 이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좀 미친 것 같은 그 일이 얼마나 귀한지 이해가 가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나에게 가족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우리의 가족들이 모여서 형성하고 있는 보다 커다란 가족,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들이 모인 교회를 주신 하나님 앞에 찬양과 감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하는 이 믿음의 공동체를 더 사랑하고 아름답게 세워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또 하나의 감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소망에 대한 감사입니다.

초막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을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  요즈음 편리한 시대가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초막절을 지킬 때 먼 광야나 사막까지 나가지 않고 자기 집 옆에다가 그냥 초막을 만들고 그렇게 편리하게 지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래 옛날 초막절을 지키던 방식은 모두가 광야로 나갑니다.  초막절 기간인 한 주간 동안 광야로 나가서 야영을 합니다.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집을 떠난다.  일시적이지만 집을 떠난다.  우리의 욕망과 편안함과 안정의 중심이었던 집을 잠시 떠나갈 때 그들은 저 영원한 천국을 향한 소망을 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한 순간 우리는 집을 떠나는 날이 옵니다.  우리의 영혼도 이 육체의 집을 떠나갑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면서 행복한 기억들을 축적해 왔던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을 잠시 떠나서 어디론가 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집이 있다.  그렇습니다.  옛날 애굽 땅의 안일한 집들을 버리고 광야로 떠나갔던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광야에서도 집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 가나안 땅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구한 집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저는 이 영원한 소망이야말로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소망의 그림자라고 믿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앞의 스크린에 띄워져 있는 고린도후서 5장 1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여기에서 '우리의 장막 집'이라는 말은 우리의 육체를 말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이 육체를 떠나면 하늘에 있는 새로운 몸, 영원한 우리의 집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이런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느 날 이 세상을 떠나갈 때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우리는 이렇게 인사할 수가 있습니다.  "여보, 나 먼저 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  그 영원한 만남, 그리고 영원한 처소에 대한 소망, 이것은 오직 선택된 믿음의 자녀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들의 곁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그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로 하여금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리라."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많은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견고한, 아니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할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 그리고 천국의 소망입니다.  그 영원한 소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감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을 지킬 때 초막절 바로 직전에 지키는 절기 하나가 있습니다.  속죄절입니다.  이 속죄절 다음에 초막절이 옵니다.  초막절은 버들가지를 취하고, 종려나무 가지와 감람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찬양하고 감사하는 기쁨의 절기라고 한다면, 반면에 이 속죄절은 고통의 절기입니다.  속죄절에 그들은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위해서 드려지는 피 흘린 제물.  그들은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용서를 확인하면서 그 다음 절기인 초막절로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애굽 땅을 떠나가게 하기 위해서 유월절이란 의식을 지나가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집의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흘려졌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이 되어서 죽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그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고 해방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었고, 가나안의 소망을 갖고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적용하면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의 그 피 흘리심의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니 이 십자가 때문에 오늘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광야 같은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나는 오늘도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합니다.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견고하고도 영원한 소망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이 있기 전에 있었던 속죄의 절기, 그들이 피 흘리는 제물을 주 앞에 바치며 하나님 앞에 회개했던 그 절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축제의 절기로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주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다는 것, 때로는 삶의 여정에서 어려움도 많지만 여전히 내 마음속에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살 수가 있다는 것,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다는 것.  이 감사의 중요한 원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때문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내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지극하신 사랑으로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가정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무지함과 게으름과 그 기질이 변덕스럽기까지 한 우리를 아시고 우리 안에 믿음을 낳고, 그 믿음을 키워가고 영원한 천국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교회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공동체를 통하여 무너진 우리의 신앙을 회복시키고, 구원받은 자의 감격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금번 추수감사절은 가정과 교회, 그리고 영원한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앞에 전심으로 감사하는 귀한 축제의 예배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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