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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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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5-37)

 
존 웨슬리 목사는 "한 권의 사람, 만 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한 권의 책은 성격 책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만권의 책은 양서 즉 좋은 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한권의 책인 성경과 만권의 양서를 읽기를 원했습니다. 빌게이츠는 "나를 나으신 분은 어머니이지만 나를 만든 것은 책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만큼 책을 읽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한 권의 사람, 즉 성경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 한권이라도 제대로 읽고 듣고 행하면서 살아야 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한권의 책인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가를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어떤 율법학자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 맞서려고 '보부도당당하게'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율법학자에게 율법에 '무엇(헬 : 티스, What)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헬 : 포스, how) 읽느냐?'(눅10:26)고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이렇게 질문하신 것은 율법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기록된 말씀을 어떻게 읽느냐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어떻게 성경을 읽는지"의 방법론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영어로 읽느냐 러시아어로 읽느냐, 일본어로 읽느냐 헬라어나 히브리어로 읽느냐, 또는 소리를 내서 정독으로 읽느냐, 속독으로 다독하여 읽느냐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성경을 읽고 있느냐 하는 질문은 "성경에서 무엇을 읽어내는지"의 본질에 관한 질문입니다. 본문 바로 앞절 24절에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였다"는 것은 읽는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게 아닙니다. 보아야 할 것, 들어야 할 것에 주목하지 못하고, 귀 기울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문자로 읽는 것이 아니라 뜻으로 정확하게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떄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하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으로 무슨 마음으로 읽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도적질하려고 읽는 사람, 사람 잡을려고 읽는 사람, 이런 성경 읽기는 바른 성경읽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율법학자는 에수를 시험하기 위해서 그리고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복음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씀을 읽는 사람이 시험하고 대적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성경에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는 "말씀 읽기"는 잘 못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구원, 성령의 은사를 읽어내야 합니다. 내 입 맛에 맞는 성경읽기나 자기의 주장이나 의도를 굳히기 위해서 읽고 사용하는 성경은, 자기 욕망에 근거한 성경 읽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음식의 맛도 사람이 길들어진 입맛에 따라 제각각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읽을 때도 제각각으로 읽을 수 있는 소지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사람은 같은 것을 보고도 얼마든지 다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보고도 얼마든지 다른 소리를 할 수 있습니다. 길들어진 것에 따라서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어디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기록된 성경속에 내재하고 있는 조건들은 도외시하고 자기의 편의대로만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읽기는 그저 인쇄된 글자를 읽고 명사와 동사를 구분할 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단들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은 그래서 위험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단들이 성경을 읽는 것과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에 참가하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훈련하는 것 외에 다른데서 성경을 공부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나,다른 사람들이라도 은밀하게 따로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거나 은밀하게 성경공부를 유혹하면 반드시 교회에 알려야 합니다. 
거기에는 여러분의 교회생활과 영혼을 도적질하려는 음모가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을 잘못 읽고 있는 한 율법학자가 주인공입니다(눅10:25-37).
율법에 '무엇(헬 : 티스, What)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헬 : 포스, how) 읽느냐?'(눅10:26)고 질문하신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사는 성경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정확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사의 답변은 신명기6장5절과 레위기19장18절 말씀으로, 율법을 한 구절로 요약하면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사답게 정확히 대답하고 있습니다. 
율법 학자의 성경 지식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읽는 방식에는 심각한 잘못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읽느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를 들면서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길을 가던 어떤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서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거반 죽게 되어 버려졌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제사장이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을 피하여 멀리 돌아서 지나가버렸습니다. 레위인도 그와 같이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사람이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다 갚으리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다 율법을 잘 알고 있었고 누구보다도 율법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사람이 성경을 읽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문자로 기록된 성경은 객관적이고 불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록된 성경을 내 눈으로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하는 것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읽는다"는 헬라어 단어는 "아나기노스코"를 쓰고 있는데, 그 의미는 "연루된 의미로 읽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무엇과  연루된 것일까? 나와 연류된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향하신 하나님 뜻의 계시로 보고 듣는 "마음의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성경을, 설교를, 믿음의 권면을,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는 "마음의 습관"은 마음을 옥토로 가꾸고, 100배의 믿음의 결실을 얻기 위한 매우 중요한 정지(整地)작업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해야 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바울은 경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것으로 기록된 말씀을 연루시키지 않으면 성경을 제대로 읽는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하여 제각기 많이 아는척을 하고 있지만, 그 말씀을 내게 적용시켜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어떻게 실천하는냐에 대해서는 연루를 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마치 율법사처럼 예수님한테 조차 은근히 자기의 성경지식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예수님을 망신을 주려고 했던 어리석음을 가진자가 지금도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율법학자을 향하여 "네가 어떻게 읽느냐?" 질문하신 이 질문을 나에게도 던지십니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

지식으로 읽고 있느냐? 아니면 내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으로 듣고 그 말씀을 행하기 위해서 읽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은 그렇게 살기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듣고도, 보고도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을" 읽어 내지 못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당부하십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절).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한 것,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한 것은, 애당초 "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셨는데, 실천하지 않고도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며, 그 약속에 힘입어 살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믿음이 삶의 사건으로 구체화 될 때에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그 능력과 지혜를 보고 듣고, "말씀이 내게서 이뤄지이다," "말씀이 내게 응하였다" 감사함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네가 무엇을 읽느냐?" "나를 살리시려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고, 듣고, 읽습니다"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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