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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렇게 기도하라(2) : 이름을 위하여 (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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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하라(2) : 이름을 위하여 (마 6:9-13)

: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평화가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존귀한 자녀들입니다.
  
요즘 정치권은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데 소위 ‘귀태 논란’까지 일어났습니다. 야당의 원내 대변인이 대통령을 ‘귀태의 후손’이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처음, 저는 뉴스를 중간부터 보다가 뉴스화면 하단에 ‘귀태 논란’이라는 말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왜 논란이 되는지 선 듯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제게 ‘귀태’라는 말은 좋은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귀태’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그것은 ‘귀태가 난다’는 말이었습니다.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시골에서 자랐지만 얼굴이 잘 생기고(?) 피부가 희어서 ‘귀태가 난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전혀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귀태’라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나쁜 말로 들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에게 귀태라는 말을 사용하였다고 해서 청와대가 나섰습니다. 청와대 홍보수석이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자유민주주의에 정면 도전한 것”이라며 공식 사과하라고 압박했습니다. 여당은 이미 합의한 국정조사 일정을 일방적으로 취소하였습니다. 결국 야당 원내대변인이 사퇴를 하고, 야당이 유감을 표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귀태라는 말이 그렇게 안 좋은 말입니까? 제가 들었던 말과 이번에 대통령에게 사용한 말은 우리말로 똑같이 ‘귀태’입니다. 그런데 한자로 전혀 다른 말이었습니다. 제가 좋은 뜻으로 생각하였던 말은 ‘귀한 귀(貴)’자, ‘모양 태(態)’자 귀태(貴態)로 고귀한 태도나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번에 논란이 된 말은 ‘귀신 귀(鬼)’자 , ‘아이 밸 태(胎)’자 귀태(鬼胎)로 일반적으로 두려워하고 걱정함을 가리킵니다. 이 말의 본래 뜻은 악한 귀신이 나쁜 마음으로 잉태 시킨 아이입니다. 즉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태어났다’는 것이랍니다. 야당 원내대변인은 박정희대통령을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태어난 것이라고 비유하고, 그 딸인 박근혜대통령을 귀태의 후손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청와대가 펄쩍 뛴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이 논란의 옳고 그름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야당 의원은 정치적으로 발언하였고, 맹비난을 하고 나선 여당 역시 다목적 포석이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렇게 같은 소리로 들리는 말이라도 전혀 다른 뜻이라는 것입니다. (규태^^-)
  
‘같은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같은 말을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고 해도 ‘같은 마음’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의미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뜻으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을 표현하는 말은 같은 말을 전혀 다른 내용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하면 하나님을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지난 주 설교 준비를 하면서 돌아가신 아버님을 잠깐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깊이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과 글로 기록된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읽고 듣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심지어는 그 말씀대로 행하면서도 성경을 단지 사람의 말처럼 여길 수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조차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5a)고.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만이 유일한 기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모든 기도의 모범이자 원형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배워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깊이 사랑하셔서 매순간 돌보시고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이 형제와 자매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할 놀라우신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배워야 하는 내용은 크게 두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 세 가지와 ‘우리’를 위한 기도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의 첫 번째 내용은 그 분의 이름을 위한 기도입니다. 
  
I. 이름

‘하나님’을 위한 기도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그 분의’ 또는 ‘당신의’라는 말이 붙어있는 내용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말씀은 9절 말씀의 세 번째 구절입니다.

: 9c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말씀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에 이어지는 첫 번째 내용으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하나님의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새번역]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거룩하게 받들어지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말은 ‘이름[o[noma/오노마]’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라고 불려지는’이름(name)입니다. 이름은 비유적으로 권위, 성격을 나타냅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개성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특성을 나타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들에게 나타나 보인 하나님의 본성, 특성, 인격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a)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그 분의 본성, 특성, 인격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 이름은 존재 양식입니다.

40년 동안, 애굽의 왕자로 자라났던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또 다시 40년간 미디안의 목자로 살아가던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는 거기에서 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타서 사라지지 아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가?’하며 가까이 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에게 애굽으로 가서 고통당하고 있는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가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10)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그는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못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12a)고 약속하시면서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아룁니다. 출애굽기 3:13 말씀입니다.

(출 3: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것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묻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겠다고 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설명하여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14a)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가 만들어서 생겨난 분이 아닙입니다. 처음부터 그 스스로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여 주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창 22:1-14)라는 이름은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위하여 이삭을 대신할 양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여호와 라파’(출 15:22-27)라는 이름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다가 불 뱀에 물려죽는 사람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여호와 닛시’(출 17:8-16)라는 이름은 승리의 깃발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이 제일 먼저 만난 대적 아말렉과 싸워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메카디쉬켐’(출 31:12-18)이라는 이름은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살롬’(삿 6:24)이라는 이름은 평화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기타, ‘전능하신 하나님’(신 10:17-22),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창 14:17-24), ‘감찰하시는 하나님’(창 16:1-14), ‘넉넉하게 하시는 하나님’(창 17:1-8), ‘나의 주가 되신 하나님’(창 15:1-5) 등등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이름은 바로 그 이름을 가진 분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 이름을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롬 10:13)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말씀에서 두 번째로 ‘거룩히 여기다’는 말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은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2. 그 이름이 더럽혀지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그 백성인 이스라엘 때문에 더럽혀졌습니다. 여기에서 ‘더럽히다[ll'j/하랄]’는 말은 ‘구멍을 뚫다’, ‘상처를 입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 때문에 오염되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돌이켜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 너희의 노비로 삼았도다.”(렘 34:16)고 하셨습니다. 자유롭게 풀어 주었던 노비를 다시 끌어다가 노비로 삼았을 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졌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형제와 자매를 서로 미워하고 학대한다면 그것으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교회 안에서 서로 싸운다면 사람들은 교회를 향하여 ‘너나 잘하세요!’합니다. 우리가 조롱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조롱을 받으십니다.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는 “이 후에 다시는 너희 예물과 너희 우상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지니라.”(겔 20:39b)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집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정작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은 더럽혀집니다. 만약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속물근성을 가지고 보이는 것만을 귀중하게 여긴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너나, 믿지 않는 나나 다fms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할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입니다.

선지자 아모스를 통하여도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암 2:7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에 담지 못할 부끄러운 일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성적으로 타락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남자에게 한 아내를 주시고, 한 여자에게 한 남편을 주셔서 살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원리입니다. 그런데 요즘 온통 가정이 파괴되고 성윤리가 타락하였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람들도 그렇게 살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집니다. 

지혜의 말씀인 잠언은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9b)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우리’가 하는 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는 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을 우리가 똑 같이 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러냐?’고 하나님을 걸고넘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때문에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휘하에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대왕의 이름과 같은 알렉산더인데 그 병사는 형편없는 행동을 하여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먹칠하였습니다. 병사 알렉산더의 안 좋은 소문을 들은 대왕 알렉산더가 그 병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네 이름이 뭐냐?” 물었습니다. 병사는 ‘알렉산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시 대왕은 “네 이름이 뭐냐?” 물었습니다. 역시 그 병사는 ‘알렉산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화가 난 대왕은 “네 이름이 뭐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네 이름을 대라”고 소리쳤습니다. 병사는 세 번째도 똑같은 말로 자기의 이름이 ‘알렉산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왕 알렉산더가 병사 알렉산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네 이름이 알렉산더라지? 그렇다면 자네 이름을 바꾸던가 아니면 자네의 생활 태도를 바꾸도록 하게!”

이름이 알렉산더라면 대왕 알렉산더처럼 살던지 아니면 이름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대왕 알렉산더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왕은 “아무도 내 이름 알렉산더를 자기 이름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명령도 내렸다고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름값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얼굴을 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빼앗길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살아가야 할 성화(聖化)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위하여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여기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aJgiavzw/하기아조]’는 ‘깨끗하게 하다’, ‘성별하다’는 뜻입니다. 그 근본적인 의미는 ‘구별’을 뜻합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것들과는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분이심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없는 분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하여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고 찬양을 받으시게 하여야 합니다.


3. 그 이름은 거룩히 여겨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만 아니하여도 다행인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김을 받도록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든지 아니하든지 하나님은 언제나 거룩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이는 내 이름을 위함이라. 내 이름을 그 이방인의 눈 앞에서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행하였음이라.”(겔 20:9b)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은 그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 자손을 인도하셨습니다. 출애굽의 기적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워도 다른 사람들에게 약속을 지킨다면 사람은 ‘역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르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실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실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또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겔 36:22b)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럽힌 하나님의 이름을 스스로 거룩하게 하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놀라운 분이시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찬송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시 34:1-3) 

우리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말과 아울러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말과 행실과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든지 않든지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 분의 거룩하심을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일을 하나님께 미루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인데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으니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함으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데 말하자면 ‘역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하여 감동받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도 그냥 그렇고 그런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고 그렇게 살아갈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빼앗길 수 없는 영생을 선물로 받은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도 우리 안에 함께 계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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