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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하나님 앞에서 자란 아이 (삼상 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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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자란 아이 (삼상 2:12-21)

권달웅(1944-) 시인이 쓴 ‘요즈음 아이들’이라는 시에 보면 현대 아이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물보다는 코카콜라를 좋아하고,
김치보다는 소시지를 좋아하고,
고추장보다는 캐첩을 좋아하고,
밥보다는 일회용 라면을 좋아합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동화보다는 만화를 좋아하고,
위인보다는 운동선수를 좋아하고,
암산보다는 전자계산을 좋아합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새보다는 총을 좋아하고,
친구보다는 로봇을 좋아하고,
순정영화보다는 람보를 좋아하고,
홍난파보다는 뉴키즈를 좋아하고,
유관순보다는 브룩실즈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요즈음 아이들은 조상의 얼을 모르고,
어머니의 음식맛을 모르고,
친구의 정을 모르고,
팝송만 듣고, 만화만 읽고,
컴퓨터만 두드리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잊혀진 것을 모르고.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어려운 것을 모르고.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무서운 것을 모르고.


여러분, 공감이 되십니까? 요즘 자라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불쌍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이들이 아이들답게 자라지 못하는 현실에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런 모든 현상에는 부모의 욕심이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교육학이나 상담학에서 자주 하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문제 있는 부모는 있어도 문제아는 없다’는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나 어른이 그 아이에게 문제를 떠안긴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시대의 아이들이 아이답게 자라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 책임이 전적으로 부모에게 있습니다. 내 아이를 어떤 아이로 자라게 하느냐 하는 것도 전적으로 부모에게 달려 있고, 내 아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도 역시 부모의 책임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우리 자녀들이, 그리고 우리 손주 등 자손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소중한 사람들로 자라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비단 우리의 자녀나 손주들만이 아니라 우리 교회에서 믿음으로 양육받는 우리 교회의 아이들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소중한 사람들로 자라게 해야 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자라서 하나님의 사역에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에, 한 남자에게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첫 번째 부인을 굉장히 사랑했지만, 그 첫 번째 부인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남편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했지만, 그녀에게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아이를 가진 두 번째 부인은 아이를 갖지 못한 첫 번째 부인을 괴롭혔습니다. 아이를 가졌다는 것에 유세를 부린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이를 갖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거나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두 번째 부인은 첫 번째 부인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여자’라고 구박을 했습니다. 더군다나 남편은 자식을 낳아준 둘째 부인보다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첫째 부인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둘째 부인이 얼마나 독한 마음으로 첫째 부인을 괴롭혔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둘째 부인이 첫째 부인을 얼마나 괴롭혔던지, 둘째 부인은 첫째 부인에게 마치 ‘대적’과 같았습니다.(사무엘상 1:6) 원수와 같은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둘째 부인은 첫째 부인을 계속해서 괴롭혔습니다. 아이를 갖지 못한 것도 마음이 아픈데, 거기에다가 둘째 부인이 계속해서 약을 올리고 괴롭히면서 분노를 일으키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첫째 부인은 둘째 부인에게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부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분통함과 가슴 아픔을 다 털어놓고 어찌하든지 아들 하나만 낳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녀는 특별히 하나님의 성소가 있는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을 합니다.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으로 삼겠습니다.’ 

자신은 아들을 낳는 기쁨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낳은 아들은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녀의 애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드디어 아들을 낳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사무엘입니다.

이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주 큰일을 했던 사람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지도자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태어날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2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시기였습니다. 그 때까지 이스라엘은 지파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때에 맞게 세워주신 사사를 중심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세워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시지 않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는 나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대하고 있었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20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는 나라를 만들려는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주변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 국력이 튼튼한 나라를 만들게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사무엘 선지자가 영적인 지도자로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끊임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런 요구에 결국은 왕을 주시기로 결정하고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왕을 세워주십니다. 그 첫 번째 왕이 바로 사울 왕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나라를 세우는데 1등 공신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왕인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후에는 다윗을 두 번째 왕으로 기름부어 세웠습니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세운 사람 역시 사무엘 선지자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직무가 다 끝났다고 생각되었을 때에 자신의 자리에서 미련 없이 물러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은 너무나도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백성들에게 질문합니다. 

‘내가 너희의 지도자로 있을 때에 누구의 소를 빼앗은 적이 있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은 적이 있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한 적이 있느냐? 누군가의 손에서 뇌물을 받은 적이 있느냐?’(사무엘상 12:3) 

그렇게 묻자 백성들은 한결같이 ‘당신은 우리를 속이지도 않았고, 어느 누구도 압제하지 않았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 것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사무엘이 선지자로, 또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섬기면서 그는 하나님께나 사람 앞에 조금도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마만큼 깨끗하고 정직하게 지도자로서의 역할만을 잘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왕이 세워지면서 이제 지도력은 왕에게 넘어갔지만,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계속 기도하겠다고 말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로 너희를 가르치겠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정말 멋진 지도자입니다. 부러운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사무엘이 그렇게 멋진 지도자, 부러운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바른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어렸을 때 받은 교육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랐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자신이 기도하며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사무엘이 태어나자 젖먹이는 기간 동안에만 자신의 품에서 키웠습니다. 그리고 젖을 뗀 후에는 아직도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의 성소가 있는 실로에 데려다 줍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사사 겸 제사장이었던 ‘엘리’였습니다. 그 엘리 제사장 아래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받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되어 사역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제사장 엘리를 뒤이어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된 엘리의 두 아들은 망나니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삼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들은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짐승을 가져오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에 자신이 원하는 고기를 빼앗아갔습니다. 

본문 13절 이하에 보면 사환을 시켜서 솥이나 가마에 있는 고기를 갈고리로 찔러서 가져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제사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께 먼저 제사를 드린 후에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말려도, 그들은 막무가내로 고기를 빼앗아가버렸습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늘상 그렇게 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12절에서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를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 직을 계속 유지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인 엘리 제사장으로부터 제사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제사장 직분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욕심을 채우는 데에만 혈안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아버지 엘리 제사장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이어 나오는 말씀 가운데 27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 제사장을 꾸짖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 가운데 2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겼다.’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들이 잘못한 짓을 해도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한 것처럼 제사를 멸시하고 제물을 마음대로 빼앗아가는데도, 그리고 그것이 고기가 먹고 싶어 충동적으로 어쩌다 한 번 하는 것이 아니라 관습이 되어서 늘상 그렇게 하는데도 거기에 대해서 엘리 제사장은 아들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책망 한 번 하지 않습니다. 

본문 바로 이어 나오는 22절 이하에서 자신의 두 아들이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부끄러운 짓을 한 후에야 아이들을 불러다가 책망을 합니다. 그런데 이미 엘리의 두 아들들이 행한 그 나쁜 짓들은 백성들에게 다 소문이 난 후였습니다. 백성들에게 소문이 나서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온 나라에 퍼지고 난 후에야 엘리는 아들들을 불러다가 ‘그러지 말라’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아이들이 이제는 아버지의 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비단 엘리 제사장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엄마들이 한두 명 낳은 자기 자식 일이라고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기 자식만 감싸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식을 금쪽보다 귀하게 여겨 무엇이 자식을 위한 것인지조차 제대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법을 하더라도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안달을 합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를 꾸짖거나 나무라면 학교에 찾아가서 행패를 부리기도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이 떠들고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어도 내버려둡니다. 나무라거나 제제하지도 않습니다. 아이들 기죽인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도 않고 윤리나 도덕도 모른 채, 자기중심적으로만 자란 아이가 과연 올바른 아이로 자랄 수 있겠습니까? 공부는 잘 할지 모릅니다. 부모가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공부시키니까 좋은 학교에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자라난 아이는 사회적으로나 아이 개인에게나 엄청난 피해를 입히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요즘 매스컴을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자주 접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친구를 왕따 시켜 다른 아이에게 고통을 주고, 왕따 당한 아이는 그것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래 아이들을 성폭행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없습니다. 자기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너무 내 자식만 위하다 보니 그런 아이들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언 13:24) 자식을 무조건 때리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의 잘못을 눈감아주거나 심지어 자식이 잘못을 했음에도 자기 자식 편만 들어주는 것은 그 아이를 망치게 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더 큰 해악을 끼치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말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그런 사람입니다. 자식들이 제사장 일을 하면서 잘못하고 있다면 그것을 빨리 고쳐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식을 사랑한다는 핑계 아래 자식들이 잘못해도 못본 체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온 백성들에게 소문이 다 퍼진 후에야 자식들을 불러다가 책망을 하는데, 이미 그렇게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자식들이 늙은 아버지의 말을 들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25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 두 아들을 죽이기로 뜻을 정하시고’ 말았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에도 수수방관했던 엘리의 행동이 과연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고 하나님의 징벌로 인하여 젊은 날에 블레셋과 싸우던 전쟁터에서 죽어야 했는데도 말입니다. 

반면 사무엘은 엘리의 두 아들과는 달랐습니다. 사무엘이 어떻게 신앙적인 훈련을 받았는지는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 1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어머니 한나가 매년 아들 사무엘을 위해서 작은 겉옷을 만들어다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통해서 사무엘이 어떻게 신앙교육을 받았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18절에서는 ‘사무엘이 비록 어렸지만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를 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마포 에봇을 입었다’는 말은 제사장으로 사역을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민수기 8:24절에 보면 제사장은 25세 때부터 사역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 나이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역대상 23장에 보면, 솔로몬 시대에는 20세부터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제사장의 숫자가 부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 제사장 시절에도 엘리의 두 아들 외에는 제사장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제사장이 매우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마포 에봇을 입고 제사장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물론 어렸을 때에는 제사장을 돕는 보조역할을 하면서 제사장의 직무를 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어머니 한나가 매년 실로에 찾아와서는 만들어온 작은 겉옷을 아들 사무엘에게 가져다줍니다. 왜 성경은 어머니 한나가 매년 사무엘에게 겉옷을 만들어 가져다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겉옷을 만들어다주었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나는 눈물로 기도하여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기도하면서 아들을 낳으면 하나님께 드리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낳았고, 하나님과 약속한 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성소가 있는 실로에, 엘리 제사장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의 옷이나 먹는 것에 대해서는 어머니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엘리 제사장이 다 알아서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한나는 매년 사무엘을 찾아갔습니다. 겉옷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사무엘을 만나기 위한 구실일 것입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찾아와서 어떻게 했을까 상상해 보십시다. 사무엘에게 겉옷을 싼 보자기만 건네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지?’ 하고 한번 물어보고는 곧바로 집으로 뒤돌아왔겠습니까? 한나도 엘리의 두 아들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소문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사를 멸시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기 욕심만 채우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소문을 들은 한나의 마음속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어린 사무엘이 엘리의 두 아들 아래서 제사장의 역할을 보고 배우고 있습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한나의 마음속에는 사무엘이 엘리의 두 아들들이 행한대로 따라 할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인데, 그 아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기 욕심만 채우는 제사장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옷을 가져다주면서 아들 사무엘에게 늘 다짐을 받습니다. ‘절대로 욕심에 끌려서는 안 된다. 제사장은 제 욕심에 끌려 사역하는 사람이 아니다.’고 말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 잘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너 만이라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바르게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어머니의 그 말씀을 늘 새기며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각오를 다졌을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21절에서는 ‘아이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자랐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늘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를 만나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되어 태어난 사람이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말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무엘 선지자가 자신의 사역을 다 마치고 물러가면서 ‘나는 당신들 중에서 소나 나귀나 그 무엇도 빼앗은 적이 없고, 당신들을 속인 적도 없고, 뇌물을 받은 적도 없지 않느냐?’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 겉옷을 가져다주면서 어머니 한나가 사무엘에게 단단히 일러둔 말들 때문이었음에 분명합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한 교육이 사무엘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이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우리 가정의 자녀들이나 우리 교회의 자녀들이 모두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큰 사람들로 자라도록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아이들이 먼저 믿음에 바로서는 아이들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엘리와 그의 두 아들은 당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바로 서지 못하니까 하나님께 버림 받게 되고, 제사장이라는 큰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이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젊은 나이에 전쟁터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또 교수가 되고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을 가진 교수가 되어야 하고, 바른 신앙을 가진 부자가 되어야 하고, 바른 신앙을 가진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른 신앙’이 빠져버린 그냥 교수, 그냥 부자, 그냥 성공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사람은 바른 믿음 위에서 자신의 인생을 그려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너무 많은 부모들이 사무엘을 만드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엘리의 두 아들들처럼 만들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기만 하면 되는 그런 아이 말입니다. 대학도 원하면 들어가고, 돈도 원하면 벌 수 있고, 권력도 원하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얻기만 하면 되는 그런 아이가 엘리의 두 아들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시대에 원하는 사람은 엘리의 아들들이 아니라 사무엘입니다. 깨끗한 지도자, 바른 신앙을 가진 지도자,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지 않는 사람 말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충청북도가 충청북도의회에 제출한 행정사무 감사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노인보호 전문기관에 접수된 노인학대 신고를 분석한 결과 노인들이 자기 아들로부터 폭행을 당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신고자 3명 중 1명꼴인 34.7%가 자기 아들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며느리가 시부모를 폭행한 것은 8.7%였고, 딸은 6.3%였다고 합니다. 

아들만 두신 분들 조심해야 합니다. 잘 키워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도록 가르쳐온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도 늙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 주지 않으니까 필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도움을 안 주니까 폭행하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부모를 공경하게 만듭니다.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사는 사람이 어찌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아이들이 무엇보다도 바른 믿음을 가진 아이들로 자라도록 기도하시고, 바른 믿음을 심어주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무엘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라는 아이로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른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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