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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헌금 때문에 고민하는 그대에게 (마 6: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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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때문에 고민하는 그대에게 (마 6:19-34)

현대인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인가 라는 설문 조사가 있습니다. 그 결과 첫째 관심사는 건강입니다. 

우리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남자가 77세이고 여성이 84세랍니다. 30년 전보다 약 10년 이상 늘어났답니다. 

그런데 일본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약 100년 전인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33세였답니다. 그때는 유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비하면 거의 40년 이상 늘어난 숫자입니다. 

현대인의 두 번째 관심사는 ‘경제’입니다. 우리나라는 경제도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40년 전만해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에 하나였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때는 북한보다 못사는 국가였고 심지어 필리핀보다 못사는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원조를 받던 우리나라가 원조를 베푸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경제 규모로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선진국으로 올라섰습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경제 만족도는 밑바닥이라는 것입니다. 

행복지수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세계 178개 국가 중 102위라고 합니다. 
OECD 36개국 중 27위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행복지수가 떨어지는 것일까요? 

재물에 대한 욕구와 관심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탐심과 욕망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인들이 ‘국민 행복 시대’를 열겠다는 공약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탐심이 얼마나 큰지를 모르고 하는 공약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현재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보세요. 아파트 한 채를 가지셨다면 재산이 최소 2억대입니다. 억대부자입니다. 자가용이 없는 집이 거의 없습니다. 돈이 없어 자녀를 대학 못가르친 분이 거의 없습니다. 옛날에는 많았지요. 그런데 요즘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경제가 어렵다 어렵다합니다. 그런데 어렵다고 하면서도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삽니다. 먹고 싶은 것 다 사고, 입은 것은 다 입고 그러면서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풍요한데 어렵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니 박탈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재물로 사람을 만족시키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물질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세요. 물질이야기가 상당히 많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가 총 38개입니다. 그 중에서 16개 비유가 재물에 관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

복음서 내용의 6분의 1이 돈과 소유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산상설교의 3분의 1이 돈과 소유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은 성도의 물질생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기도에 대한 강조보다 더 강조한 것이 재물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분이 조사해 보니 성경에 기도에 관한 언급이 약 5백번 정도 나온답니다. 그런데 물질에 관한 언급은 약 2천 번이 넘게 나온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재물이 신앙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성경적 물질관, 즉 하나님 나라의 경제관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입니다. 
그중에서 성도의 헌금 생활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믿는 성도는 하나님께 어떻게 물질을 드려야 하는지, 그리고 구원 받은 성도는 어떤 경제관을 가져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헌금 때문에 고민하는 성도에게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어떤 헌금관을 가져야 할까요?  

1.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십니다.

獻金(헌금)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 재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의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십니다. 

19절 이하를 다 같이 읽습니다.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놓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땅에 쌓는 것은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땅에 쌓아두면 해를 입는데 하늘은 해하지도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며 여기서 말하는 ‘보물’은 뭘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가 보물로 간주되었습니다. 

1)옷을 보물로 여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옷이 흔합니다. 그렇지만 옛날에는 옷이 매우 귀했습니다. 그런데 보관 방법이 좋지 않으면 좀이 먹었습니다. 

2)금과 은 같은 보화가 보물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금은보화를 집에 둘 수 없었습니다. 도적이 들어 빼앗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감추어 두는 장소가 밭입니다. 

마13:44에 보면 밭에 보화를 감추어 두었습니다. 낮에 나가서 밭의 적당한 곳을 물색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밤중에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 혼자 가서 밭을 깊이 파고 그 속에 보화를 감추어두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보회 주인이 어느 날 갑자기 죽습니다. 그래서 가족 중에 보화가 밭에 감춰진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됩니다. 그러니 그 밭이 팔리고 팔려 수백 년 후에 어떤 농부의 손에 들어납니다. 몇 백 년 걸리기도 합니다. 그 후에 그 보화 상자를 열어보면 보물들이 녹이 슬었습니다. 금과 은은 별로 녹슬지 않았지만 쇠로 만든 동전이나 종이 화폐는 녹이 슬어 있는 것입니다. 

3) 곡식이 보물입니다. 

그때는 먹고 살기가 힘든 때였습니다. 그래서 창고에 가득 쌓아놓은 곡물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창고에 곡식을 많이 쌓아두는 것도 그리 안전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느 날 도둑이 들아 다 가져 가거나 전쟁이 일어나면 다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새로운 저장법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안전하고 자기에게 큰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19절 첫 부분과 20절 첫 부분을 다시 보세요.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너희를 위하여”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서가 아닙니다. “너희를 위하여”입니다. 

속지 마세요. 하나님을 위해 보물을 드린다고요? 아닙니다. 그것은 드리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왜냐면 드리는 자에게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막10:29-30절도 보세요.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성도 여러분! 
요즘 은행에 저축을 하면 이자가 몇%인가요? 많으면 4%됩니다. 그것도 장기 저축이 4%, 5%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경우는 100배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로 계산하면 10,000%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보다도 더 확실하고 수지맞는 투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거기다가 하늘나라 은행은 안전합니다. 결코 부도가 나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게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금세에는 백배나 받고, 내세에는 영생까지 겸해서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확실한 투자입니까? 믿어집니까? 하나님이 약속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옛날 영락 교회를 설립하신 한경직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영락 교회를 건축할 당시에 교인들의 수가 대략 15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당이 좁아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이렇게 설교 했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서는 우리의 물질을 바쳐야 합니다. 10일 먹을 양식만 남기고, 하나님의 성전건축을 위해서 다 바칠 수 있는 마음의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만 기공예배에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며칠 뒤 기공예배를 드리는 날 150명의 교인들 가운데 53명이 그렇게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10일치 먹을 양식만 남겨놓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 몽땅 바쳤습니다. 

그리고는 30년이 흘렀습니다. 
교회설립 30주년이 되었을 때 한 목사님이 한 번 조사를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10일 먹을 양식만 남기고 다 하나님께 바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53명이 하나같이 ‘재벌’이 되고 자녀들이 부자가 되어 있더랍니다. 특히 한국의 300대 재벌 속에 본인이나 그 자식이 거의 다 들어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이렇게 복을 주시는 것일까요?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21절에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느니라”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우리의 보물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갑니다. 반대로 마음이 가면 물질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왜 자식들 학비 대느라 그토록 고생하는데 그것이 왜 아깝지 않나요? 자식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십일조나 감사헌금을 드리는데 아깝지 않나요? 하나님과 교회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왜 십일조와 감사헌금 선교헌금을 드리는데 갈등하고 주저하는 것일까요? 마음이 하나님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여러분 재물의 쓰임새가 달라집니다. 동시에 여러분의 돈이 들어간 것에 마음이 가 있기에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울 어느 교회는 지금도 교인들이 파당이 나누어져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싸우면서 그 교회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누군가 살펴보았더니 교회 건축하는데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싸우면서도 떠나지 않더랍니다. 

그런데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교회에 헌신이 없었던 사람들이랍니다. 
그러기에 하늘에 재물을 쌓으면 우리의 마음이 거기에 있기 마련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게 되면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보물 이야기를 하시다가 22~23절에서 갑자기 눈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뭡니까? 
성경에 보면 물질에 욕심을 부린 사람들은 다 망했습니다. 
왜요?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결국은 비극을 경험합니다. 

구약에 소돔성에 살던 롯의 처도 그렇습니다. 그녀도 소돔성에 쌓아놓은 재물이 한꺼번에 날라 가는 것이 아까웠습니다. 그러다 뒤돌아보아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습니다. 아간도 그랬고 게하시도 그랬습니다. 특히 가롯 유다가 그랬습니다. 

신약에도 사도행전에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들은 교회 헌금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땅을 팔아 돈을 손에 쥔 순간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일부를 감추고 전부인 것처럼 속였습니다. 

결국 둘 다 그 현장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들 부부는 헌금하고 죽었습니다. 
왜죠? 탐심에 눈이 뒤집어진 결과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물질의 욕심을 버린 사람들은 영적인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졌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노아를 보세요. 그는 엄청난 돈을 드려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홍수심판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을 보세요. 자기가 갖고 있는 온갖 금은보화를 성전건축에 다 드립니다. 결국 솔로몬이 그를 대신해서 성전을 건축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종으로 크게 쓰임받습니다. 

베드로도 보세요.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를 잡아습니다. 그런데 그 고기를 포기했습니다. 나 같으면 주님 조끔만 기다리세요. “이것 좀 팔고 따라 가겠습니다”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베드로는 즉시 따라 갔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수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세요. 24절에 보세요.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물질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 없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은 물질을 주인으로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수 있습니까? 
우리가 청지기로 사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물질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사용해야 합니다. 

내게 100만원이 어느날 주어졌다면 그 돈을 주신 이유가 뭔지를 물어보세요. 
그리고 주님이 주신 뜻에 맞게 사용하세요. 
성령의 감동으로 다 헌금하기를 원하신다면 다 헌금하세요. 

아니면 성령께서 다른 용도에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면 그 용도에 맞게 써야 합니다. 시간을 길게 끌면 사탄이 우리 속에 탐심을 넣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부리게 합니다. 결국 눈이 어두워지게 됩니다. 그러니 성령의 이끌림에 결단해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니고 주인님 것입니다. 

그런 자세가 청지기 자세입니다. 
 

2. 목숨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25절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재물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사람들은 뭘 염려합니까? 목숨입니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합니다. 그런데 염려하지 말라 하십니다. 

왜 염려하지 말라 할까요? 염려가 우리를 해롭게 하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염려는 신앙생활에 상당히 해롭습니다. 

‘염려’라고 하는 단어의 원어는 ‘메린나우’입니다. 이 말은 ‘마음을 나눈다’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할 마음이 하나님과 재물로 나뉘게 됩니다. 

이것 왜 문제냐? 여성 성도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 남편이 몸은 여러분에게 있는데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있다면 어찌 할 것입니까? 쫓아 내버리지요?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계속될 수 있겠습니까? 못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짓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찬송도 드리고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재물에 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는 마음이 나뉘어 자기를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7장 22절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걱정 염려가 지나친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공통점은 몸이 건강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염려 걱정은 무익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합니다. 27절을 보세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키 작은 사람이 염려한다고 키가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염려한다고 상황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하루는 교회에서 목사님 설교를 듣고 지혜를 얻었습니다. 

“염려 걱정거리가 생기면 종이에 적어 상자 박스에 넣자.” 그 상자 이름을 “문제 해결통”이라 정했답니다. 

한 주간 내내 염려거리가 생기면 종이에 적어 넣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에 개봉하여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냐면 그 상자를 열어서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웃었답니다. “별 걱정 다했구먼” 그러면서 자신의 염려 걱정이 쓸데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염려 걱정은 95%가 쓸데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중의 새를 보십시오. 여기 새는 제비랍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먹이십니다. 

어떤 조류학자가 제비를 연구해 보았답니다. 

제비가 하루에 줄잡아 7000마리의 곤충을 잡아다가 새끼들에게 먹인답니다. 그래서 새끼를 키우는 3주간 동안에는 약 15만 마리를 먹인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제비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많은 제비를 하나님이 다 먹이시고 키우십니다. 제비를 먹이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필요를 공급해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벧전5: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입니다. 문제는 내가 맡기느냐 맡기지 않느냐 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정말 중심으로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주시는데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의 공급을 믿으시고 근심 걱정 염려에서 해방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우선순위를 바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33절을 보세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무슨 말입니까?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구별하고, 먼저 할 일에 힘쓰면 나중 일은 다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공한 사람들의 강력한 특징입니다. 

누구나 똑같은 1년 365일을 부여 받았습니다. 하루 24시간, 한 달 30일, 그런데 사람들의 삶은 다릅니다. 왜일까요?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야 할 것을 혼동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우선순위를 무시합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것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우선순위를 바로 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중요한 일, 정말 소중한 일을 먼저 해야 하고 그 일을 힘써야 합니다. 그 일에 시간을 쓰고 그 일에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명심할 것은 급한 일이라고 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급하지만 중요하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면 포기해야 합니다. 
주일에 친구 만나러 가는 것, 주일에 결혼식에 가는 것,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예배자로 서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이것은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힘써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면 이것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살수는 없습니다. 갖고 싶은 것 다 갖고 살수는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 하나님이 옳다고 보시는 그것을 추구하십시오. 

쓸데없는 것에 인생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를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명에 인생을 거십시오. 진정한 성공과 행복은 사명대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헌금 때문에 고민해 보셨나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이 드려지면 재물도 따라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 때문에 갈등하고 걱정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물질, 우리의 시간,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쌓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려면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염려를 버리고 우선순위를 바르게 하여 당당하게 주를 위해 살아가셔야 합니다. 

따라서 합시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최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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