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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을 넘어서 : 부활을 산 사람들(1) (행 7:5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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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넘어서 : 부활을 산 사람들(1) (행 7:51-60)
 
생명의 삶, 그것이 부활절의 축복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기독교 최고의 축하와 축복의 자리인 부활절의 아침, 생명의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아침은 지난 주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주일 아침마다 생명의 아침을, 부활의 아침을 다시 맞이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기둥이 되는 두 개의 절기가 있다면, 하나는 성탄절이고 하나는 부활절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 내려오신 것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슬픔, 눈물을 아시고,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셨다는 것이 성탄절의 축복입니다. 

이 성탄절의 목표는 부활절에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을 이기는 권세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기쁨과 삶을 빼앗아가는 어둠의 세력이자 사탄의 세력입니다. 이 인류 최대의 적인 죽음을 우리는 부활절을 통해 이기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허락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증표, 이것이 바로 부활절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부활절에 마음껏 찬양한 것입니다. 

부활절이 주는 메시지는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가장 소중하고, 아름답고, 찬란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생명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이제는 죽음이 아닌 생명을 향해서 가라고, 부활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요청이고 명령입니다. 다시 말하면, 먼 미래에 다가올 부활도 기대해야 하지만, 먼저 지금 부활의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미래에 올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의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그것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을 열망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언젠가는 죽을 몸이지만 부활의 몸을 덧입게 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고린도전서 15:44) 

이것은 곧 부활신앙을 가지고 현재를 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부활을 오늘의 세계 속에 끌어안고, 그 능력을 가지고 오늘을 살라는 것입니다. 또한 2000년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동참하며 살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풀어서 말하자면, 종말론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내 인생의 마지막 시간인 것처럼 생명을 즐기고 기뻐하면서 사는 것, 그러면서도 하나님과 영원한 세계를 사는 것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의 생명을 품은 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렇게 부활의 삶을 산 믿음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스데반입니다. 그는 생명을 거꾸로 산 사람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나간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에게는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큰 보화를 가슴 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었습니다. 

지금 내 나이가 몇이든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려 한다면, 꺼져갈 내 생명보다 더 큰 하나님의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그렇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순교자가 된 것은 자신의 설교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그의 설교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었기에 순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 내용은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려 전체 분량의 1/3 정도가 강연과 설교로 되어있는 사도행전에서, 가장 긴 설교가 바로 이 7장에 담겨있는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스데반은 자신과 이 민족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다시금 되돌아보는 설교를 합니다. 그것은 스데반이 가지고 있는 민족사관이자 역사관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관계, 중·고등학교 때 겪은 일들, 대학·청년 때 만난 사람들, 연애와 결혼, 직장 생활 등 각자의 인생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인생 이야기는 곧 ‘나’를 이야기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 풍성한 삶의 내용들 사이에는 내 가치관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곧 공동체의 역사입니다. 국가의 스토리가 국가의 역사이고, 인간 전체의 스토리가 인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삶의 내용이자 가치관이며, 그 삶의 방향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왔는가를 인식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며, 사명의 사람이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에게는 역사를 통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에서 이스라엘의 중요한 역사 인물들을 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우상 속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 했지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을 향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서 믿음의 조상으로 높임을 받게 됩니다. 

또 모세를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종 된 것에 가슴 아파했지만, 아무 능력이 없다고 탄식할 때에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십니다. “네가 선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자리다. 이제는 네가 밟는 땅이 거룩한 곳이 될 것이다. 네가 움직이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거룩한 일들을 일으키실 것이다. 네가 이끄는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세워집니다. 

이 역사의 내용들을 스데반은 말하기 시작합니다. 역사의 굴곡마다 함께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할 것인지 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따랐을 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축복을 받았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을 때는 징계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행합니다. 

이것은 스데반이 가지고 있었던 민족사에 대한 거대 담론이었습니다. 이런 거대 담론은 제3자적인 것이 될 때가 많습니다. 나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민족의 지도자들에 대한 것이기에 간접적인 경험으로 끝날 때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매우 소중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민족사의 거대 담론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어떻게 일본에게 억압당하고 36년 동안 종살이를 했는지 가르쳐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독립시키셨고, 민족투사들은 이 일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6.25 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아픔을 주었는지, 지금도 남북의 대치상황에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는지,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서 배고픈 적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민주주의 나라까지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축복, 물질적인 축복 때문임을 자녀들이 알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거대 담론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 다시 미시적인 담론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역사 속에 우리의 조상들이 있었고,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고, 나 또한 이 역사의 현장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민족사가 나의 스토리가 되고, 교회사가 내 신앙의 스토리가 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의 내용들이 내 삶의 스토리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바로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된다’고 전했던 것입니다. 역사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가 될 때 비로소 신앙의 축복이 허락됨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데반의 이야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설교에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스데반의 말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사도행전 7:51)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기를 원하며 선포했지만, 이 말씀은 회개함으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찔렸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을 들었을 때의 찔림을 두 가지 반응으로 보여줍니다. 그 중 하나는 베드로의 설교에 대한 것으로 사도행전 2장 37절에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What shall we do)”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라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마음으로 받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회개의 결과로 초대교회의 역사가 새롭게 탄생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찔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의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사도행전 7:54)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들은 마음이 찔림으로 회개를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 속에 미움과 분노가 생겨서 이를 갈았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사도행전 7:57) 

그들은 아예 귀를 막았습니다.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미 불순종하기로, 스데반을 죽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귀를 막고 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죽음을 넘어선 평안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이제 스데반은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슴에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자신을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계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사도행전 7:55∼56) 

성경은 스데반이 성령 충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다른 말로 생명 충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곧 생명력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 충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성령이 그 마음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 성령 충만함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이 보였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를 막고 “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보라”하면서 돌로 스데반을 치게 됩니다. 이 때 스데반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요?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사도행전 7:59)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께 당신의 마지막을 의탁한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의탁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스데반은 예수님께 의탁을 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나님을 절대 신뢰했던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절대 신뢰하는 스데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전 존재를 맡겼던 예수님처럼, 스데반은 예수님께 자기의 전 존재를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넘어선 믿음을 가지고 짧은 생을 마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었던 스데반의 모습을 성경은 뭐라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사도행전 6:15) 

여기서 말하는 천사의 얼굴은,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그 얼굴에 세상이 주지 못한 평안함이 담겨져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얼굴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생각과 인격과 영혼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거울로 얼굴을 보는 것은, 주름 없이 잘생긴 얼굴이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내 영혼의 상태를 알기 위해서, 내 속에 기쁨과 감사와 평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얼굴에는 죽어가면서도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함이 있었습니다. 의연한 마음의 기쁨이 그의 얼굴에 표현되어 있었던 것, 그것이 바로 천사의 얼굴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안함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보통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본 것은 하나님 옆에 서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스데반의 죽는 모습을 보시며 그의 영혼을 맞이하시려고 일어나 계신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스데반아, 수고했구나. 애 썼구나. 내가 너를 맞이하리라. 영원한 생명으로 맞이하리라.” 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마지막에 스데반에게는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 7:60) 

이것도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과 유사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자기가 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예수님도, 스데반도 용서의 마음을 품고 인생을 끝마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지금 끌어안으십시오. 

참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래 사는 것이 참된 생명일까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다가 아낌없이 내 생명을 세상에서 토해내고,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 앞에 서는 것일까요? 
저는 스데반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이토록 멋진 분을 왜 그렇게 빨리 데려가셨습니까? 사랑과 열정, 주님의 생명을 가슴에 품었던 분을 왜 그렇게 빨리 데려가신 겁니까?’ 라고 오랫동안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물음을 가지고 성경을 읽다 보니, 하나님께서 스데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네 인생은 그것으로 끝났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게 맡겨라. 평안히 내 앞에 와라.” 

성경을 보니 스데반 다음에 나타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스데반의 시대를 끝내시고, 바울의 시대를 열어주십니다. 또 한 사람을 세우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가득하다 해도, 내가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냥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지금 끌어안고 그 생명으로 주어진 삶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투정하고, 불평하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살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고, 죽음을 넘어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갖는 인생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절은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부활절을 맞고 일주일동안 이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생명을 품고 이 시대 어둠이 있는 곳, 죽음을 향해 가는 곳에 살림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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