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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요 11: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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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요 11:25-27)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서론 

요한복음에는 일곱 개의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예수님이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한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신 기적은 마지막 일곱 번째 기적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에고 에이미’ 즉 ‘나는 누구다’에 해당되는 말씀이 일곱 개가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세상의 떡이다.” 등 일곱 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말씀은 여섯 번째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 일곱 개의 기적과 일곱 개의 ‘에고 에이미’에 해당되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 살려내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이 죽게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아이러니’라고 합니다. 즉, 예상한 것과 반대되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7절에 보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시는 것을 보고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분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경배하며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속에 시기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공회를 모아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며 의논했습니다.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요 11:53).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분을 죽이려고 모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1장에 나타난 ‘아이러니’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것은 예언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표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오늘 죽은 나사로가 나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건은 우리에게 다섯 가지 위대한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Ⅰ. 인간에게는 사망과 이별이 피치 못하게 찾아온다 

나사로가 죽은 것처럼 우리에게도 사망이 찾아옵니다. 이별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예배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때가 되면 사망이 찾아올 것이고 때가 되면 현세에서 함께한 모든 사람들과 이별해야 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벗어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나는 언젠가 죽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죽음이란 우리의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육신에서 영혼이 떠나면 죽는 것입니다. 사망은 필연적으로 이별을 동반하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온다는 사실을 무시해버리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죽음을 경험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미화시키려 합니다. 시신을 곱게 화장해서 관에 뉘어서 마치 잠자는 것처럼 만들어 놓습니다. 공동묘지를 온갖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여 공동묘지로 소풍도 가고 점심도 먹으며 아름답고 깨끗한 장소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죽음은 얼마나 추한 것입니까? 죽음은 인간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입니까?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함으로 말미암아 온 죗값이기 때문에 괴롭고 추한 것입니다. 죽음과 이별은 인간이 겪는 환난 가운데서 가장 큰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을 읽는 사람들에게 죽음과 이별은 현실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과거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도 다가왔던 현실이고 우리 모두에게도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다가올 현실임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람에게 우리도 언젠가 죽을 것이라고 말하면 뭐라고 말합니까? 밥 맛 떨어지게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사람들은 이것이 현실이고 확실한 것임에도 자꾸 생각하지 않으려 하고 피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죽음이 끝이라면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이 추한 죽음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Ⅱ. 인간은 부활에 대해서 믿기를 주저한다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서 믿기를 주저합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그러면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냐는 반응을 보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 일이 있었고 우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인데 그 사실을 잘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을 만져보라고까지 하셨음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는 부활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라는 여자는 동생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리자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요 11:3). 빨리 오셔서 나사로의 병을 고쳐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요단강 동편에서 이틀이나 더 머무르십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 11:6). 예수님은 왜 이틀을 더 유하셨느냐?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4).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린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그 이유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사랑한다고 하신 예수님이 사람을 보냈는데도 즉시 오시지 않은 것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21). 

이 말은 원망을 넘어서서 주님을 책망하는 것 같은 어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이 요단강 동편에서 사역하고 계실 때 마르다가 사람을 보내 예수님이 계신 곳까지 가는데 하루가 걸렸고 예수님이 거기서 이틀을 더 머무신 후 나사로가 있는 곳까지 오는데 하루가 걸렸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로 오시는데 나흘이 걸린 것입니다. 나사로도 죽은지 나흘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계산해보면 예수님이 바로 오셨더라도 나사로는 이미 죽었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주님이 여기 계셨다면 자기 동생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고통을 더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경 주석가인 메튜 헨리(Matthew Henry)는 사람들이 슬픔을 당할 때 “만일 … 했더라면 … 하지 않았을텐데”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심장마비로 이미 죽은 사람을 오 분만 더 일찍 병원에 왔더라면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스스로 고통을 더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마르다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위로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요 11:23).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4). 일반적인 부활에 대한 믿음은 있었지만 지금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자신의 동생 나사로를 살려내실 수 있다는 사실은 잘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려내신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교리 정도로는 생각하지만 실제로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믿는 것은 주저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7절에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보고 실제로 만져봤던 제자들조차도 의심했습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마 28:17).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만져보게까지 해주셨음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하는 가운데 의심하는 제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냐며 의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도 있었으며 예수님을 믿는 우리 또한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확실히 말씀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Ⅲ.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 어떤 사람이 자기가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자신이 죽은 자를 능히 살려내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종교와 기독교가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 중에도 훌륭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자, 맹자, 석가모니 모두 얼마나 훌륭합니까? 하지만 그 분들 또한 저와 동일한 인간입니다. 정말 훌륭하지만 인간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계시입니까? 동생이 죽어 슬퍼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자신이 바로 사람들을 무덤에서 살려낼 하나님이라고 하시며 죽은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지금 살려내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어 슬퍼하고 있는 마르다의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해주셨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가 아무리 크더라도 능히 해결해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Ⅳ. 예수님의 본질은 사람에게는 복이 된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속성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시기 때문에 부활의 능력이 흘러나와 누군가는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할 때 예수님으로부터 떡이 나와 누군가는 떡을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할 때는 예수님으로부터 빛이 흘러 나와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도 빛을 받아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패턴은 다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나는 누구다’라고 말씀하시면 그에 해당되는 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은 육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가 교차되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 이해하고 읽어야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 이 말씀은 말 그대로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 26절을 잘못 해석하면 이단이 될 수 있습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6). 이것을 육신적으로 해석하여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서울과 인천 사이에 소사라는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부천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거기에서 박태선이라는 사람이 전도관을 창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었습니다. 박태선의 발 씻은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해서 거저 줘도 먹기 싫은 물을 돈주고 사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단 가운데 한 사람이 따로 나왔는데 조희성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영생교라는 것을 창시했는데 요한복음 11장 26절을 가지고 자기가 죽지 않는 존재라고 그러더니 감옥에 잡혀 들어가서 결국 죽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한 구절이라도 잘못해석하게 되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이 죽을지라도 다시 살아나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켜서 영생이라고 하는데, 육신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을 믿는 자가 영생을 받게 된다는 말씀을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까? 사람이 어떻게 죽어도 육신적으로 다시 부활하는 존재가 됩니까?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가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살아있을 때 예수님을 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가 되게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내가 거기서 죽은 것이고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은 나도 살아나는 것이고 예수님이 영원히 살아계신 것은 우리도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켜주는데 이것을 상징하는 의식이 침례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침례를 받아야 됩니다. 세례는 약식이고 침례가 정식입니다. 유명한 종교개혁가 루터와 칼빈도 침례가 정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살아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명령대로 침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침례를 받지 않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장로교에서는 교육을 받아야 세례를 주지만 침례교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즉시 침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침례교는 믿음과 침례의 간격을 두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은 즉시 침례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침례를 받지 않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침례는 주님의 말씀에 첫 번째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가 된 사람은 그 상징으로 침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반드시 상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반드시 상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바라보시며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6). 마르다는 주님이 나사로를 어떻게 살려주실지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시니까 요한복음 11장 27절에 놀라운 신앙의 고백을 합니다.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 11:27).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해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이라면 절대적으로 믿겠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믿음의 고백을 한 마르다에게 믿음의 상을 베푸셨습니다. 믿는 사람은 상을 받습니다. 죽은지 사흘이나 지난 나사로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 걸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으로 가셨는데 나사로가 죽은지 사흘이 지나 이미 다 썩어서 냄새가 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말씀하시자 나사로가 벌떡 일어나 베로 동인 채 살아서 걸어 나온 것입니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살아나왔습니다. 물론 나사로는 다시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엄격한 의미에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회복(resuscitation)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성도가 부활할 것에 대한 예표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 각자에게도 ‘나사로’가 있습니다. 무언가 괴롭고 스트레스를 주는 장애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신 주님은 우리의 나사로도 능히 해결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나사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어려운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나사로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야 되는 문제처럼 자신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가 바로 나사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사로도 죽은 자 가운데 살려내셨기 때문에 우리의 어려운 문제도 능히 해결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단지 주님께서 “네가 이것을 믿느냐?”하고 물으실 때 우리는 “믿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려운 문제를 주님이 해결해주실 줄 믿습니까? 주님이 나사로를 해결해주실 줄로 믿습니까? 믿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하는 주님의 질문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믿나이다.” 이런 대답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요 11:40). 이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보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나쁜 말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느냐?”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이러면서 하나님은 사기꾼이라며 나쁜 말만 합니다. 이렇게 나쁜 말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영광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고 아름다운 분이시며 우리가 경배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상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 모두 부활절을 맞아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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