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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의 편견과 불신 (막 9: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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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편견과 불신 (막 9:14-27)


우리는 공산주의가 유물론을 가르치고 기독교는 신령한 것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생각도 상당히 유물론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증거는 축복의 척도를 물질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돈이 많으면 축복을 받은 것이고 돈이 없으면 축복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적나라하게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반대로 고난의 이유도 가난에서 찾습니다. 돈이 없는 것이 고난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말하는 불쌍한 사람이란 돈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반대로 유복한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이에요. 우리가 신령한 것을 말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지만 우리 중심의 생각은 상당히 유물론적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에게는 고난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흔히 하는 말이 ‘우리가 너희 나이였을 때는 먹을 것도 없고 학용품도 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너희들은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고마워할 줄 모르느냐?’ 이런 말이 아닙니까.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고민이나 아픔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 역시 유물론적인 생각인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물질적인 풍요함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누누이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쉽게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연예인이라든가 억만장자라든가 스포츠 스타를 동경하고 그들의 삶이 우리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TV든 신문이든 잡지든 유명 연예인들과 사진과 기사를 앞 다투어 싣고, 그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디에 살고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느냐 이것을 호기심을 갖고 쳐다보게 하지 않습니까. 파파라치들이 그런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 않습니까. 멀리서 유명인들의 사진을 찍고, 휴가 가는 모습,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모습을 찍어서 신문에 올립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다 행복해 보이고 그들이 입는 옷은 다 좋아 보이고 그들의 삶은 다 신비해 보입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클라이맥스는 주인공 앤 해서웨이가 우연히 메릴 스트립의 집에 갔다가 메릴 스트립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장면이에요. 평소에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던 메릴 스트립이 우울하고 불행하고 고독해 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입니다. 아, 저런 성공한 사람도, 저런 유명한 부자도 나와 같이 외롭고 불행한 순간이 있구나! 그들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구나! 마치 무슨 큰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다를 줄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일에 놀라는 것입니다. 

<프리티 우먼>이라는 노래가 있지요. 그 노래 가사를 보면 길에 걸어가는 아름다운 여성을 쳐다보는 남자의 심리를 노래했습니다. 저 여자의 이름이 뭘까. 나를 좀 봐주었으면. 그러면서 그 가사에 어떤 말이 등장하느냐면 당신도 나처럼 외롭습니까. 이런 가사가 등장합니다. 남자들의 편견과 미련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여자가 아름다우면 다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 부유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도 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편견이요 착각이에요. 

수년 전 신문을 보니까 프랑스의 어느 교통경찰이 과속하는 차를 잡았는데 창문을 내리라고 하고 보니까 운전자가 유명한 가수 에릭 클랩튼이었어요. 에릭 클랩튼이 영국인이기 때문에 그냥 티켓을 끊어주고 보낼 수가 없고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벌금을 내야했습니다. 그래서 에릭 클랩튼이 현금으로 내는 벌금을 교통경찰이 받고 그리고서는 사인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먼저 돈부터 받고 그러고 나서는 민간인의 자격으로 사인을 부탁했다는 말인데 모르긴 몰라도 예수님은 누구를 만나시든 그 사람이 부자든 유명한 사람이든 아름다운 사람이든 그 사람이 누구든 간에 그들의 외적인 명성 · 지위에 감탄하지 않았고 예수님은 어느 누구를 만나도 사인을 부탁하셨을 것 같지 않습니다. 

당신을 만나서 영광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것 같지 않아요. 만일 예수님이 그러셨다면 그들의 영혼을 들여다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 외적인 모습에 감탄한다든가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시고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만난 사람이 누구든,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지위와 상관이 없이 그들의 영혼의 필요를 간파하셨으리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너에게 다섯 남편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라’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었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런 식의 말씀을 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똑같아요. 사람이 입는 옷은 다를 수가 있고 사는 집, 타는 자동차는 다를 수가 있지만 사람은 다 똑같은 사람이에요. 케네디가 말했듯이 인간의 공통점은 다 지구상에 산다는 것이고 똑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것이고 자녀의 미래를 소망한다는 것이고 그리고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경말씀을 추가한다면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고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고 우리는 모두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사람들의 영혼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만일 겉으로 나타나는 외모에 위축된다든가 압도된다든가 기가 죽으면 그들의 팬이 될 수는 있고 그들을 시샘할 수는 있지만 그들의 목자가 돼 줄 수 없고 그들의 영혼의 불쌍함을 알 수 없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선입관으로부터 자유해져야 됩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선입관이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선입관을 주입합니다. 선입관은 편견이에요. 남은 나와 다를 것이다, 이건 편견입니다. 부자는 나와 다를 것이다, 유명인은 나와 다를 것이다, 편견이에요. 외국인은 나와 다를 것이다,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이 백만 명이 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국에 왔다간 외국인들이 입을 모아서 하는 말이 한국인들은 인종차별이 심하다고 말합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됩니다. 한국을 찾았던 많은 외국인들이 상처를 받고 돌아갑니다. 우리는 서구문명을 동경한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배타적인 민족이에요.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나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 남들은 나처럼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생각도 편견입니다. 
저희 교회가 처음 시작했을 때 전교인 신앙수련회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교인 중에 사회적인 지명도가 있는 분이 참석해서 박수를 치면서 찬양하는 것을 누가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더라구요. 저런 분도 박수를 치며 찬양을 하는구나! 저런 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두 손이 있으면 누구든지 박수를 칠 수 있습니다. 손이 하나가 없으면 문제가 있지만 사람이 두 손이 있는데 누구는 박수 치며 찬양하고 누구는 그런 걸 하지 못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 생각 자체가 편견이에요. 

제가 처음 전도사가 됐을 때 저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아, 저 친구는 아이비리그를 나왔는데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손뼉 치며 찬양하는 게 신기하다. Why not?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무슨 차별이 있습니까. 
제가 뉴욕에서 다니던 어느 외국교회의 한 자매는 남자가 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것이 치유가 된다고 말했어요. 얼마나 남자가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면 남자가 우는 장면을 볼 때 그것이 치유가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이처럼 뿌리 깊은 선입관과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손해가 됩니다. 인생을 제대로 바라보는데 장애물이 되고 사람을 이해하는데 장애물이 돼서 우리 스스로가 사람을 어려워하고 기가 죽고 접근하기를 두려워하고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늘 편견과 시샘과 두려움을 갖고 사는 것은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이 편견과 선입관이 나로 하여금 두렵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믿음을 갖는 것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편견부터 버려야 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편견부터 버려야 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나서야 그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성령이 이방인에게 역사하시기를 유대인에게 역사하신 것과 같이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더 많이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편견이 믿음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이 많다고 했지만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한, 세상은 여전히 좁고 할 일은 없는 것입니다. 

외국인에 대한 편견, 부자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뿐만이 아니고 남자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보다도 더 잘 믿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자가 남자보다도 더 열심히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가 남자보다도 더 뜨거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보다 더 큰 편견은 없습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여자들을 제자로 삼으셨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교부들은 교부가 아니고 교모가 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자들을 불러서 제자로 삼으셨고 처음 순교한 사람, 처음 헌신한 사람들이 전부다 남자들이었습니다. 남자가 여자보다도 못 믿는다는 법이 없습니다. 

신앙을 표현하는 스타일은 다를 수가 있겠지만 남자든 여자든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입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슬람을 보면 이슬람은 철저하게 남자 중심의 종교에요. 기독교인들이 남자에 대해서 갖고 있는 편견이 올무가 되는 것입니다. 왜 아버지가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까. 왜 자녀를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라고 생각합니까. 왜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라고 생각합니까. 

오늘 본문을 보세요. 이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사람은 그 아버지에요. 어머니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어머니만이 자식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라는 법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못하면 아버지가 하는 것이고 아버지가 못하면 어머니가 하는 것이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못하면 할머니 할아버지라도 해야 되는 것이고 하는 사람이 임자에요. 반드시 누가 해야 되는 것이 아니에요. 아버지라도 아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오니 망정이지 데리고 올 사람이 없는 사람이 불행한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엄마가 기도하면 된다, 이것은 편견이요 불신입니다. 우리의 편견은 불신을 낳고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고 우리 자신에게 손해가 됩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제한합니다.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나는 점잖은 어른이기 때문에, 나는 체면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를 제한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이런 면으로 해석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에 대하여 한계를 둔 것, 내가 나에 대하여 갖고 있는 선입관, 이것부터 부인해야 됩니다. 내가 지위가 있으면 얼마나 있고 내가 지켜야 될 체면이 있다면 얼마나 있습니까. 그건 인생의 중요한 일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허영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면 그 이외의 것은 헛된 줄 알고 버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잘 믿는 사람입니다. 헛된 줄 알고 버릴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버지가 - 어머니는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 자기 아들의 손을 잡고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아버지의 재력, 아버지의 인맥, 아버지의 지식, 이것으로 도울 수 없다면 예수님께 데리고 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식을 잘 먹이고 교육을 잘 시키면 문제가 해결될 줄로 생각하지만 인간에게는 물질로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했습니다. 

자식이 철이 들면 해결되겠지…, 철이 들어서 해결되는 문제도 있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문제도 있습니다. 자식이 스스로 믿음을 가지면 해결되겠지…, 자식이 믿음을 가지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아직 믿음이 없다면 부모라도 대신 믿어주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믿음부터 챙기지 않습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그 아이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고 아버지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병든 것은 아들이지만 그 아버지가 먼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아버지의 믿음을 세우시고 그 다음에 그 자식을 고쳐주셨습니다. 가정의 치유, 자녀의 문제 해결은 함께 치유를 받아야 되는 면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 이 아이처럼 예수님께 데리고 올 사람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라는 얘기냐. 불공평한 것이 아니냐. 불공평한 것이 하나 둘입니까. 누군가가 나를 예수님께 데리고 갈 수 있다면 그것이 축복이에요. 여러분 중에 나는 아무도 나를 데리고 오지 않았는데 내가 스스로 예수님께 나왔다, 그건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누군가가 데리고 나와야 되고 관심을 가져야 되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 됩니다. 누군가가 사랑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것이 없이 주님께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영국의 어느 청년이 사형을 당해서 이제 땅에 묻게 됐는데 스펄전 목사가 설교를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형수의 장례식에서 무슨 설교를 하면 되겠습니까. 스펄전이 깊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설교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청년에게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냉혹한 말이에요. 그러나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의인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착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처음부터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내버려두면 다 탕자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관심을 갖고 누군가가 기도해주고 누군가가 우리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지 않으면 우리는 다 탕자처럼 됩니다. 인간은 언덕위에 놓여있는 수레와도 같아서 내버려두면 골짜기로 굴러 떨어진다고 했어요. 수레와도 같아요. 다 굴러 떨어지게 돼 있어요. 누군가가 붙잡아 주어야 됩니다.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어야 됩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야 됩니다. 사람이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고 또 성령을 보내신 것이고 교회를 세우신 것이고 우리가 형제자매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말을 유념해야 됩니다. 이 아버지가 말하기를 ‘내 아이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내 아들이 아니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병든 게 아니지만 자식의 병은 아버지의 병이요 자식의 아픔은 아버지의 아픔이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도 도우시고 그 아들도 도우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온 사람은 결코 빈 손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하셨어요. 결국은 우리가 교회도 나가고 목사의 설교도 듣고 기도도 받는 것이지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예수 앞에 나오면 흰 옷을 입으며 밝고 빛난 내 집에 길이 살리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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