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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셈의 장막에 거하시는 하나님 (창 9: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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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의 장막에 거하시는 하나님 (창 9:18-29) 

학교 다닐 때 많은 사람들이 세계사를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공부하기가 어렵고 복잡하며 외울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잡하고 골치 아픈 세계사가 오늘 읽은 노아의 예언 속에 간단히 요약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예언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퍼져 나갈 새로운 인류의 역사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의 조상은 노아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며 노아의 후손인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의 후손이면서 노아의 후손이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그들은 모두 홍수로 죽어버렸습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도 열두 아들의 미래를 예언합니다. 이처럼 노아나 야곱이 예언할 수 있었던 것은 인류의 역사가 우연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decree)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라는 진리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아무렇게나 운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계획을 가지고 역사를 운행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을 알면 예언이 가능한 것입니다. 

노아는 홍수가 끝나고 방주에서 나온 이후 농사를 지었습니다. 포도나무를 심어 그 열매로 포도주를 만들었고 그것을 마시다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든 것입니다. 홍수 이전 사람들이 매우 악했지만 술 취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홍수 이전과 홍수 이후의 농업에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홍수 이전에 술이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술로 인해 죄를 많이 지었을 텐데 그런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홍수 이후에 포도주를 허락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노아가 술에 취해 수치스러운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자기 장막에서 벌거벗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술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사람의 죄성을 드러나게 합니다. 

약 십억의 인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의인이 되어 살아남은 노아조차도 이런 실수와 죄를 저질렀다고 하는 사실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십억 명의 사람들이 멸망하는 홍수심판을 직접 체험했지만 그것이 인간 속에 있는 죄성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기적이나 체험이 사람의 본성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오직 성령으로만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함은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아비의 죄를 덮어주고 숨겨준 것이 아니라 아비의 수치를 드러내고 그것을 재미있어한 것입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함과 전혀 다른 행동을 취했습니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창 9:23). 

함의 태도는 대단히 불경건했고 셈과 야벳의 태도는 경건했습니다. 노아는 술이 깨어 아들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을 했는데 이것은 노아가 술에 취해 화가 나서 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예언한 것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한 것입니다. 물론 그 촉매가 된 것은 노아에게 아들들이 행한 사건이지만 술에 취해 노아의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예언을 했다는 것은 노아가 먼저 자신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께 회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은 즉시로 용서하시고 다시 관계를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큰 위로가 됩니다. 노아는 다시 한 번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회복했고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예언은 자녀들의 미래에 관한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허물이 있다고 해도 이것이 자녀들을 책망하거나 축복할 권리를 빼앗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들은 자신이 부족하고 허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될 책임도 있고 권리도 있는 것입니다. 나도 허물이 많은데 어떻게 자녀들을 지도할 수가 있느냐고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에게 완전성이 요구된다면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할 수 있겠습니까? 노아는 자신도 술에 취해 부끄러운 짓을 행했지만 자녀들의 장래에 대해 책망도 하고 예언도 하면서 부모의 권위를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아는 세 자녀로부터 나올 온 인류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 예언의 핵심은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아가 누구를 통해 올 것이냐는 것이지 각 나라의 사람이 누구의 자손이냐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확실하고 또 흥미로운 사실은 노아의 예언이 인류 역사 가운데 정확하게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면 세 자녀에 대한 예언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Ⅰ. ‘함’에 대한 예언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창 9:25). 

노아가 저주한 대상은 함이 아닙니다. 함은 아들이 넷이나 있었습니다.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창 10:6). 

노아는 함의 네 아들 중 막내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함의 자손 전체가 저주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왜 성령의 영감을 받은 노아가 함을 저주하지 않고 함의 막내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가나안 족속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가나안 족속을 미리 저주하신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함이 죄를 짓고 잘못해서 함의 막내아들인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죄로 그 자녀가 죄의 결과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수치스러운 일을 하면 자식도 수치를 당할 수 있고 아버지가 병이 들면 자식에게도 그 병이 유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로 인해 자녀들에게 고통이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합니다. 제 군대 동기생 중 한 명은 군대를 제대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회사에서 신입사원 환영회를 하는데 술집의 예쁜 여자가 연락처를 주더랍니다. 환영회가 끝나고 만나기로 했는데 갑자기 아들, 딸 얼굴이 떠오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로 돌이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저에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만약 여자를 만나 바람이 났다면 가정도 파괴되었을 것이고 그 자녀들은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때 돌이킨 덕에 자녀들도 시집, 장가 잘 가고 아내와도 사이좋게 잘 살고 있습니다. 

창세기 10장 15~19절을 보면 함의 막내아들인 가나안의 후손들이 거한 지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가나안의 지경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창 10:15~19). 

함의 막내아들인 가나안의 후손들이 주로 가나안 땅에 거주하며 가나안 7족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소돔과 고모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연애와 바알과 몰렉 숭배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황불비의 심판을 내리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7족들이 가나안 땅에 거하며 악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노예생활을 할 동안 가나안 땅에서는 가나안 후손들의 죄악이 관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어 가나안 7족을 그 땅에서 내쫓으신 것입니다. 그때 쫓겨나지 않은 가나안의 후손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B.C. 146년 로마군대는 가나안 족속을 멸망시켰습니다.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보냈는데 그들 중 열명은 가나안 족속에 비하면 우리가 메뚜기 같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7족들은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자손과 같이 덩치가 크고 강해보이니까 겁을 먹은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들은 어디서 이런 믿음이 나와 이렇게 말했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노아의 예언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은 노아의 예언을 통해 이미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은 우리가 그들에게 질 리가 없다고 확신하여 담대하게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열 명의 정탐꾼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니까 불안해하며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저주받은 ‘가나안의 후손’이 함의 자손 전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함의 자손들 가운데 일부분인 것입니다. 함의 자손들은 흑인들로 아프리카와 중동지방에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8, 19세기에는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 말씀을 근거로 흑인들의 노예매매를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흑인들은 종들의 종이 되라고 노아가 예언했다고 하면서 흑인들을 노예로 팔아먹은 것입니다. 하지만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 윌리엄 윌버포스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여 이런 주장에 반대하였고 노예 해방운동의 선두주자가 된 것입니다. 그의 노력으로 1833년 영국은 노예 해방령을 선포하게 되었고 미국은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나와 남북전쟁 이후에야 비로소 노예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흑인들의 얼굴이 조금 검다고 해서 저주받은 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백인이나 황인들 중에도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흑인들 중에도 훌륭하고 착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피부 색깔이나 인종으로 차별하시는 분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의 후손 가운데 저주받은 것은 가나안 족속임을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Ⅱ. ‘셈’에 대한 예언 

셈은 아버지를 존중하고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셈이 복을 받았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사실 셈에게 복주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가렸다고 해서 그 대가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셈이라는 사람을 통해 메시아를 보내시려는 주권적인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장 26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셈의 팔대손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셈의 구대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어 하나님 말씀의 보관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어 영적인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후손인 가나안 7족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모압 땅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거짓선지자인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여 그들이 우리 땅을 통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발람은 처음에는 그 뇌물을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이스라엘을 세 번이나 저주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는 축복으로 바뀌게 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복받은 백성을 저주하려 하지만 하나님이 복주시는 한 저주가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도 셈의 후손 가운데 일부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한국인의 조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연구하는 일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잘 모르지만 셈은 황인의 조상이 되고 함은 흑인의 조상이 되었으며 야벳은 백인의 조상이 된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셈의 하나님이라고 했으니까 물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우리 또한 셈의 자손으로 하나님이 복주셔서 복음을 받고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하루 빨리 우리의 동족인 북한도 하나님이 복주셔서 공산당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때가 오기를 바랍니다. 

셈이 축복받은 백성이지만 노아가 찬송한 대상은 셈이 아닙니다.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창 9:26). 

노아가 찬송한 대상은 셈의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인간의 찬송을 받으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옵소서” (시 115:1). 

시편 115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만찬을 끝낸 후에 부른 노래입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찬송할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상한 우상들을 찬송하지 마시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평생 찬송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Ⅲ. ‘야벳’에 대한 예언 

야벳의 후손은 백인들로 유럽,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정착했습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 9:27). 야벳의 특징은 ‘창대’입니다. 가나안은 ‘저주’, 셈은 ‘복’, 야벳은 ‘창대’입니다. 셈의 복은 영적인 복이고 야벳의 복은 육적인 복입니다. 셈의 복은 특별한 은혜, 구원의 은혜이고 야벳의 복은 일반 은혜인 것입니다. 야벳은 부자가 되고 번창하여 좋은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복은 셈이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야벳의 복을 원하십니까? 셈의 복을 원하십니까? 둘 다 받아야 되겠습니다. 야벳이 받은 복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야벳이 돈도 많고 잘생겼어도 죽으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셈이 받은 복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적인 복을 받게 되면 하나님이 야벳의 복도 곁다리로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9장 27절에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셈의 장막에 거하는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영어 번역본에서도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KJV 성경은 하나님을 주어로 봅니다. 히브리어 문법상으로도 그렇고 제가 보기에도 하나님이 주어인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NIV 성경은 야벳을 주어로 봅니다. 

이것은 개역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 9:27). 

이 번역이 옳다면 가나안은 셈의 종도 되고 야벳의 종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벳을 주어로 보는 번역의 특징은 유대인인 셈족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이방인인 야벳 족속으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야벳의 후손인 백인들은 경제, 정치, 문화적으로 창대하였지만 영적으로는 셈의 후손을 통하여 은혜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셈의 장막에 거한 것도 사실이고 야벳의 후손이 셈의 후손으로부터 영적인 은혜를 받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어떤 번역을 하든지 실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결론 

노아의 간단한 예언은 수천 년에 걸친 인류역사를 통해 분명한 사실로 입증이 되었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았고 셈은 축복을 받았으며 야벳은 창대하게 되었습니다. 노아는 이런 미래의 일들을 어떻게 알고 이렇게 간단한 표현으로 인류역사를 요약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노아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21절을 보면 노아가 사사로이 풀어서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20~21).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서 노아는 자기의 세 아들로부터 퍼져 나갈 인류의 역사를 간단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이처럼 노아의 예언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면 노아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얼마나 더 확실한 사실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천국과 지옥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구원과 심판에 관해 말씀하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 그대로 우리 앞에 드러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좋은 말로 할 때 성경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심판의 날에 심판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서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을 몰랐다고 말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더 확실한 예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점쟁이들에게 가서 점을 치거나 무당에게 가서 굿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더 확실한 예언인 성경을 붙들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여러분 모두 이 말씀을 믿으시고 행복자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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