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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당신이 깨뜨릴 옥합은 무엇입니까 (마 2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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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깨뜨릴 옥합은 무엇입니까 (마 26:1-13)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왜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을까? 한 마디로 말하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관심과 목적은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사는 목적이 성공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너무 가난하게 살아서 실컷 배불리 먹는게 자기 인생의 목적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복수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국영화를 보면 자기 부모가 누구한테 살해당하니까 일생을 복수하기 위해서 칼을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사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시는 목적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였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 이유는 바로 십자가 때문에 존재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한 마디로 가장 잘 말씀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 말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함이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그것은 십자가를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서 속죄의 대속물로 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대속물이 되기 위해 오셨다면 오늘 우리가 사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옆에 분들에게 이렇게 한 번 물어보십시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사십니까?” 여러분이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사셨다는데 정말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2절에도 예수님이 자신이 걸어온 인생의 목적을 또 한 번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자 2절 말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팔리는 이유, 은 30에 팔려가는 이유가 뭐예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고 계신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이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수난 예고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체포되고 고난을 당하게 되고 십자가에 죽고 그리고 삼일만에 살아날 것이다. 이 예수님의 수난예고가 마태복음에만 해도 네 번씩이나 반복되어서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 첫 번째 수난예고가 나옵니다. 두 번째는 마태복음 17장 22절 이하에 나옵니다. 세 번째 수난예고 마태복음 20장 18-19절 이하에 나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그리고 우리가 오늘 읽은 마태복음 26장 2절이 네 번째 수난예고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 가장 가까이 와계십니다. 오늘 2절은 마지막 수난예고입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앞에 놓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 이 본문의 상황은 이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그 한 주간을 보내는 과정 속에서 오늘 본문의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여러분 십자가를 떠나서는 기독교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를 떠나서는 구원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그토록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교회 강단에 어느 교회를 가든 십자가가 중앙에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로 일부 교단은 십자가를 중앙에 게시하지 않습니다. 혹 어떤 분들이 십자가를 우상처럼 여길까봐, 그러나 십자가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신앙의 중심이예요. 

여러분 십자가를 우리가 뭐라고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첫 번째 능력입니다. 어떤 능력이예요? 구원의 능력입니다. 따라해보세요.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의 선물을 주는 아름다운 중심 본질입니다. 자 고린도전서 1장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아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겸손입니다. 겸손.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가장 천하고 흉악한 자가 매달리는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고 있는 거예요. 

빌립보서 2장 8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낮추셔서, 어디까지? 십자가까지. 십자가는 가장 낮은 곳이예요. 가장 흉악한 중죄인이 달려죽는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겸손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배척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랬어요. 

또 십자가는 치유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치유의 사건이 일어나요. 이사야 53장 5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아멘.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치유입니다. 십자가에서 그 분이 찔리시고, 그 분이 상하시고, 그 분이 징계를 받으시고, 그 분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 십자가는 바로 치유의 사건입니다. 여러분 상처가 있습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또한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어찌 보면 가장 흉악스러운, 죄인 중에서도 가장 몹쓸 죄인을 사형하는 사형도구이지만 그 십자가는 바로 예수님이 달리심으로 사랑의 증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 로마서 5장 8절 말씀 같이 읽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확증이라는 말은 ‘확실히 증거하셨다.’, ‘확실히 증명해주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것을 확실하게 증명해 보이셨다라는 것입니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 증명해봐?’ 아이가 불 속에 죽어 가는데 거기에 뛰어들지 않는 모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몸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뛰어 드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이냐? 아이가 강에 빠졌을 때 헤엄도 할 줄을 모르는 어머니가 그것도 잊어버리고 뛰어 드는 것. 자기 헤엄을 못 치는 것도 잊어버리고 뛰어 드는 것.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분명히 증거하셨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에베소서 2장 16절에 보면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사랑으로 하나되고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이예요. 십자가의 사랑을 이 고난 주간에 묵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향해서 오늘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십자가와는 정 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제자들에게 4번씩이나 반복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것이 무슨 얘긴지 잘 몰랐어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성공하고 출세해서 우리가 다 덩달아 잘 될 줄 알고 있지?! 그래서 누구는 하나 우측에 누구는 좌측에 높은 자리에 이것을 바라고 있는 자들에게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그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어요. 

또 제자 중에 가룟 유다라는 사람은 어떻게 했어요? 예수님은 은 30냥에 팔아넘기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흉계를 꾸미고 있었어요. 

자 오늘 우리 성경 3, 4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 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아멘 대 제사장, 종교인 중에 가장 최고의 우두머리, 존경받는 백성의 장로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 거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요.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장 신임해서 맡겼던, 재정을 맡겼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으려고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이 때, 예수님을 기쁘게 했던 예수님께 기쁨을 드렸던 한 여인이 있어요. 우리는 그 여인을 마리아라고 알고 있어요. 오늘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자가 나드 향유 옥합을 가져와서 그것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사건.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서 큰 기쁨을 느끼셨어요. 그런데 그것을 보고 제자들이 못 견뎌요. 뭘 보고 못 견디는 분들 있잖아요. 하필이면 저것을 어떻게, 저 비싼 것을 어떻게 허비하느냐?! 그렇죠?! 

여긴 없지만 다른 성경에 보면 나드 향유 한 옥합은 한 병이면 약 300데나리온이에요. 큰 돈이예요. 여러분 광야에서 5천명을 먹이는데 빌립이 그랬어요. 이거 이 사람을 다 먹이려면 200데나리온 어치 떡이 있어도 부족하다구요! 200데나리온이 5천명을 먹일 수 있는 떡인데 300데나리온이면 얼마나 비싼거예요?! 1데니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품삯이예요. 그것을 5만원씩만 잡아도 1500만원이에요. 이 여인은 1500만원의 고가의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어요. 그랬더니 의협심이 많은 제자들이 분개해서 ‘왜 그것을 허비하느냐?! 가난한 자에게 주면 얼마나 많이 줄 수 있는데 왜 그것을 허비하느냐?!’ 

여러분 그 말은 하나는 맞지만 하나는 틀린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라는 여인은 누구입니까? 마르다 마리아의 자매이지요.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났던 나사로의 누이 동생입니다. 자기 오빠가 죽었다가 그를 죽음의 자리에서 일으키셨어요. 얼마나 큰 감격이 있을까요? 

또 예수님은 마리아 마르다 자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그 집에 자주 거하셨어요.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는 그 감격 그 은혜를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러 가는 마지막 자리에서 예수님께 보답하고자 했어요. 그래서 여인이 결혼하기 위해서 꼭 마지막에 준비했던 것이 이 향유 옥합입니다. 돈이 생길 때마다 한 방울 한 방울 모아서 이제 이 옥합을 채웠어요. 이것을 가지면 이제 결혼 준비가 다 된 거예요.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가면 남편의 사랑을 평생 받으면서 살아 갈 수 있는데. 그녀는 이것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어요. 그것은 전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그것이 바로 향유 옥합을 깨뜨린 이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그 여인이 아마 향유를 아마 부어드리면서 ‘내가 이렇게 해도 되나?’, ‘이거 내가 후회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니예요.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다는데 일생에 한 번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감동이고 기쁨이었을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건을 가리켜서 ‘마리아의 예배’라고 부릅니다. 예배란 바로 그런 겁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을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주님께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면 그것이 뭐예요? 그것이 바로 예배예요. 예배! 예배는 ‘주님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예배예요. 그런데 여러분이 부르는 찬양도 예배에 하나인데 바로 거기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해요.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 속에 헌금 속에 우리의 정성 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담겨 있어야 해요. 그것이 예배예요.

왜 우리 예배가 감동이 없습니까? 왜 우리 예배가 기쁨이 없습니까? 최선의 것을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최선의 찬양, 최선의 기도, 최선의 감사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는 자기가 준비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주님 앞에 드렸어요. 그런데 여러분 오해하시면 안돼요. ‘나는 향유 옥합도 없는데, 300데나리온도 없는데, 나는 예배 못 드리겠네?!’ 그런 얘기가 아니지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올려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여인이 동전 한 닢을 연보궤에 넣는 것을 보고 이 여인은 자기가 가진 것 중에 최고 많은 것을 넣었다! 자기 전부를 드렸다고! 예수님이 칭찬하시지요.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내 마음과 정성과 모든 시간과 내 모든 입술을 들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최고의 찬양이 그것이 바로 예배다! 그것이 우리는 이것을 마리아의 예배다.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입니까? 물질을 쓰다가 남으면 주님께 드립니까? 시간 다 사용하다가 ‘아이고 시간이 좀 남으니까 교회 한 번 가볼까?’ 그래서 우리 중 대부분들은 주일에 한 번 오는 것도 생명 걸고 올거예요. 그리고 주중에는 아예 교회와는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주일에 한 번 그저 이것도. 정말 주님 앞에 예배드리는 시간이 최고 귀한 시간입니까? 아니면 짜투리 시간으로 여러분 남으셨습니까? 다른 것이 우선입니까? 예배가 우선입니까? 그렇습니다. 정말 이것이 최고의 예배를 올려 드리고 있느냐? 오늘 마리아에게는 쓰다가 남은 향유를 가지고 온 거 아니예요. 쓰다가 남은 정성을 가지고 온 거 아니예요. 자기의 일생을 모은 최선의 것을 주님 앞에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사랑의 표현, 최고의 예배의 모습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예요. 지극한 헌신의 모습입니다. 향유를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다는 것은 ‘주님 내 자신을 주님께 내어 드립니다.’라는 그런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보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예배란 입술로만 드리는 것이 아니예요. 머리로는 다른 생각하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모아서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이 진정한 예배예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마리아의 행위를 통해서 큰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제자들 중에 일부 사람들은 분개합니다. “왜 이것을 허비하느냐? 가난한 자에게 주면 더 많은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데” 그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어요? “이 여인을 괴롭게 하느냐? 이 여인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선한 일을 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내 장례를 준비했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 마다 이 여인이 행한 일이 오래 오래 기념되고 기억 될 것이다!‘ 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이라도 우리에게 이런 감동되는 예배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마리아의 헌신을 통해서 주님은 큰 위로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앞에 두고 걸어가고 계십니다. 주님은 그분은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요. 실제 예수님은 이후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할 수 만 있으면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셨어요. 

‘아버지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여러분 예수님이시지만 십자가는 역시 두려운 것이예요.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고 계시지만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 고독한 마음, 괴로운 마음, 비통한 심정을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마리아의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예수님의 마음에 큰 위로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의 장례를 준비했다.’ 유대인들은 시신을 하관할 때 향품을 넣어서 함께 묻었습니다. 향유를 미리 부어 장례를 준비했다. 

또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이와 비슷한 기사가 나오지만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 있을 때 바리새인인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한 죄 많은 여인이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감람유를 부은 사건이 있을 때 사람들이 또 그것을 보고 비난을 해요.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나? 바리새인 시몬에게 야. 너는 내 발도 씻어주지 않았고 내 볼에 키스도 하지 않았고 내 머리에 향유를 부어주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여인은 나를 위하여 이 향유를 부었다.

유대인들은 귀한 손님이 오면 먼저 발을 씻어요. 그리고 그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드려요. 그것이 유대인들의 아주 귀한 손님을 맞는 풍습인 것입니다. 오늘 마리아가 지극한 사랑의 고백과 함께 예수님을 최고의 VIP로 그분을 환영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 큰 위로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위로를 줄때가 있지 않습니까? 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제가 목회하면서 아주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주일 날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저녁 먹을 생각도 안나요. 그래서 아내에서 어디 나가서 간단하게 사먹자고 하고 교인이 운영하는 식당이 생각나서 여기 가서 간단하게 먹고 가자. 이래서 갔는데 전혀 의도하고 간 것이 아닌데 너무 반갑게 맞아주시고 따뜻하게 격려해주고 정성을 다해 대접해주는데 제가 그것을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그 분은 의도한 것이 아니고 평상시 그대로 행동한 것인데 그날따라 저에게는 굉장한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수님께도 이 여인이 행한 일이 엄청난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 대해서 칭찬과 격려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고난주간에 주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주님의 마음에 향유옥합을 깨는 심정으로 주님을 예배 할 수 있을까요? 정말 우리가 이 고난주간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구속의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다면 이 고난주간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언제가 책을 받더니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워싱턴 DC 부근 한 복권도 파는 가게에 한 한국인이 복권을 샀는데 그 복권에 어마어마한 금액에 당첨이 된 거에요. 일시불로 그것을 다 받을 수도 있고 조건이 일 년에 1억씩 분할해서 받게도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 번에 받으면 감당이 안 되니까 일 년에 1억씩 받기로 정했어요. 매년 일억씩 여러분들에게 1억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너무 좋아서 어쩔줄 몰라요. 이 분이 너무 좋아서 복권을 파는 분에게 2천 5백만원을 선물로 줬어요. 여러분은 그렇게 하시겠어요? 그게 쉬운게 아니에요. 물론 2천5백만원은 큰 돈이지만 그가 받은 기쁨에 비하면 큰 돈이 아니에요. 

여러분 오늘 이 사람 복권에 당첨되서도 이렇게 감동을 받고 사례하면서 답례를 하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던 그 날 우리에게는 엄청난 사건이 이루어졌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죄가 씻음 받았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축복이 임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생이 우리에게 보장되었어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그 날 모든 것이 이루어졌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언제든지 성소와 지성소의 휘막이 찢어짐으로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얻었어요. 여러분 이 특권이 어떻게 복권당첨과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늙어죽을 때까지 1억씩 받는 것도 놀라운 감동이지만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이 축복으로 바꾸어지는 십자가의 사건은 복권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는 거예요.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데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런 진한 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교회만 오면 인상을 쓰십니까? 여러분 왜 교회만 오면 엄숙해지십니까?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은 2만불씩 사례를 하는데 영혼의 문제까지 해결한 우리들은 정말 하나님 앞에 어떤 것으로 감사드리고 있는가? 왜 그럴까요? 우리가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이지 않을까요? 아니면 내가 죄를 용서받은 확신, 아니면 내가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확신이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러분 이 고난주간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예배드리러 왔습니까? 정말 내 삶의 우선순위가 예배였습니까? 내가 정말 전심을 다해 하나님께 헌금을 드립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영혼들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까?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될까요?

십자가의 구속의 사랑을 경험한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도 될까요? 일주일에 교회 한번 오면 내 할 일 다 했다.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될까요? 복권 당첨된 사람보다 못한 기쁨, 감격을 가지고 이렇게 살아가도 될까요? 옥합을 깨뜨렸던 마리아의 마음을 좀 우리가 본받을 수 있을까요? 

아도니람 저드슨이란 선교사님은 버마에 1813년 7월 도착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없어요.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버마에 간지 얼마 안되서 지금은 미얀마라고 하죠. 그는 자기 아들이 풍토병으로 죽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아내가 열병과 이질로 결혼 14년 만에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는 그 땅을 떠날 수 없었어요. 그는 열심히 선교합니다. 6년 만에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첫 열매 이후에 많은 사람이 예수께 나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버마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는 성경 번역 작업을 합니다. 무려 23년이 걸려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66권을 전부 번역을 합니다. 대단한 일이었죠.

그는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흥미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이야기 보다 귀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나는 이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여기에 왔고 그것이 곧 나의 사명입니다. 그는 자기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가족의 생명을 깨뜨리듯이 선교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부어드렸습니다. 오늘 마리아는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최고의 헌신, 최고의 사랑, 최고의 예배를 올려드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라면 그의 보혈이 나의 죄를 씻어 버렸다면 그리고 나를 위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준비되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살아도 될까요?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이 고난주간 새벽예배 나오셔서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배우세요. 그리고 내가 어떻게 주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말씀을 배우세요. 예배에 나오세요. 그래서 우리 모두가 부활의 새벽에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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